백제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질문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한 배경?
백제 성왕은 16년(538)에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깁니다. 당시 부여의 이름은 사비 또는 소부리라고 불렀습니다.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본, 중국과 통하는 곳으로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공주라는 산이 둘러 쌓여 있는 곳보다 확터진 부여를 택한 것 같습니다. 공주에서는 관부가 공산성에 있어서 관료들의 출입이나 왕들의 나들이에 불편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여는 금강이 북쪽에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천도와 함께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고 하지만 멸망 때까지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자료는 국내외 사료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부여는 만주 길림성 장춘에서 500리 북쪽인 농안에 있었던 부여국( 후에 북부여라고 칭함)이 기원전 2세기 경에 건국되었고, 기원후 37년에는 고구려의 추모대왕이 장춘의 동남쪽 400리 지점인 지금의 회인현(당시 환인)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이곳을 홀본(졸본 부여)라고 칭하였으며, 기원후 300년경에는 북부여에서 지금의 연길 지방으로 동부여가 세워졌다가 북부여와 동부여는 4세기말 5세기 중엽에 각각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와 그의 형 비류도 고구려에서 내려온 부여족입니다. 그래서 백제의 왕들은 부여씨라고 칭해왔습니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이런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에서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사당을 수도에 짓고, 중요한 일이 일이 있을 때 참배하는 수호신으로 기능읗 했습니다.
그런데 근초고왕 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평양성 전투에서 사살함으로서 백제와 고구려는 견원지간이 되었고, 고구려의 그 보복은 광개토대왕의 남침, 장수왕의 한성점령으로 개로왕이 죽고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습니다.
공주로 천도하였으나 동성왕은 가림성의 장수직을 맡겼던 백가에 의하여 시해되었는데 가림은 지금의 서천의 장항 북쪽에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백가의 반란은 무령왕에 의해 제거되었고 무령왕 때에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사신왕래를 자주했기 때문에 부여의 지세에 대한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2)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이야기는 후대에 전하는 서동요에 의해 국문학자들이 덧붙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라는 성왕이 진흥왕과 함께 한강 이북을 탈환함에 성곡했으나 진흥왕이 약속을 배반하고 한강하류를 독차지하자 신라와 충주 관산성전투에서 시해된 후 신라는 백제와 철천지원수관계였습니다.
무왕은 신라 진평왕과 남원과 함양사이에 있는 아막산성전투를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적국의 공주와 연애를 했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왕 대에 미륵사, 왕흥사를 건축하였고, 미륵사 건축설화로 서동요가 후일 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3) 사씨는 백제의 8성 귀족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여시대 고관직을 지낸 사람으로 사택지적이라는 사람이 유명한 비문을 남긴 것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후일 더 조사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충분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첫댓글 정박사님!
이렇게 빠르게 답변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이기에 늘 역사적 궁금증이 많으니 이점
양해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백제사중 백제부흥 운동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부여풍, 복신 ,도침, 흑치상치 등의 활약과 결국 내분으로 인해 나당 연합국에게 패망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세상은 결국 외침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분으로 망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8월초 휴가중에는 백제 부활의 애환이 담겨 있는 임존성(예산과 홍성 경계)을 한번 투어해볼 생각입니다.
다녀와서 다시한번 글을 올리겠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의 기지는 임존성도 있고, 정산에도 있습니다. 현장답사이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장 답사는 역사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잘 배우고 갑니다
네. 청양 우산성과 정산의 두릉윤성은 일전에 한번 다녀왔습니다. 홍성에 집안 어르신중 지역 향토사학자가 계셔서 겸사겸사 한번 다녀올려고 합니다.
당시 청양 정산은 백제의 최인근지역이었습니다. 향토사학이란 용어보다는 지역사연구라고하기도합니다. 각 지역사가 좀더 활발하게연구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