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팔리는 문제로 여러 해를 속을 끓이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어 이사를 왔다. 내가 원하던 이층집이고 전체적으로 넓어서 좋았지만, 환경이 바뀐 탓인지 한동안 감기를 달고 지냈다. 소원하던 큰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떠나 온 집은 왜 자꾸 그리워지는지...
이민 와서 처음 장만한 그 집은 낡고 협소해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호사를 부릴 처지도 못되어 아쉬운 대로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며 28년을 살았다. 자식들과 함께 힘들었던 이민 생활을 견디며, 암, 수 두 마리의 치와와가 세 마리의 새끼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우리 집은 다섯 마리의 개들과 함께 사는 늘 소란한 집이었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뜬 뒤에도 사진을 벽에 가득 붙여놓고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직장을 잡으려고 눈물나게 노력을 했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나는 중년을 한참 넘긴 나이가 되어 있다.
2004년인가, 우리 동네 양로원 주인이 찾아 왔었다. 우리 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다른 두 집을 사들여 양로원 건물 한 동을 더 짓겠다고 했다. 우리 집이 팔려야 다음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옆집의 이태리 노인이 집을 팔고 떠나면서 집을 팔려면 가격협상은 신중히 하라고 충고를 남겼다. 그 뒤 깐깐한 협상에 실패를 한 양로원과는 여러 해 동안 소식이 끊겼다. 나는 모든 일은 때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살고 있던 참이라 덤덤했다.
얼마 후, 옆집을 양로원 측이 허물어 버리는 바람에 공터가 생겨 우리 집만 덩그렇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삼면이 양로원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밤에도 무섭지 않아 더 좋아졌다고 위로하고 살았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생각지도 못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이태리 노인 옆집에 살던 호주 할아버지도 폐렴으로 사망 했다.
다시 몇 년이 흘러, 큰 회사에서 양로원을 인수했다며 우리 집을 사겠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먼저 주인과는 협상이 안 되었는데 새 주인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궁금했다. 결국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빈터 옆집의 호주 할아버지 집을 아들이 와서 팔고 떠나는 것을 보고 우리 집도 팔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뒷마당에 나가 90년이 넘은 집 바깥벽을 쓰다듬었다. 낡아있는 벽돌이 안쓰러웠지만 그 동안 수고했다고 위로하며, 해체되어 쉴 때가 된 것 같으니 잘 가라고 미리 작별 인사를 해 두었다.
우리 집은 정원이 되고 두 집터를 합쳐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 건물이 완성되면 내가 그곳 정원 벤치에 앉아 지난 날 살아온 추억을 되살려 보고 싶다는 허무한 생각을 해 봤다. 나의 참을성을 최대한으로 시험하며 보낸 세월이었지만 어느 순간 떠밀리는 듯 이사는 금방 결정되어 버렸다. 파는 것도 어렵지만 갈 곳을 구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느껴질 즈음, 나는 추리 소설 속의 ‘환상의 여인’을 떠올렸다.
“오월의 이 초저녁은 데이트하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윌리엄 아이리쉬 (William Irish)의 『환상의 여인 (Phantom lady)』의 시작 부분이다. 아내를 죽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남자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수수께끼의 여자를 찾지만, 찾았다고 생각하면 그 실마리가 차례차례 없어지고 마는 내용이다.
그 남자는 아내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마지막 데이트를 청하였으나 냉정하게 거절을 당했다. 남자는 집을 뛰쳐나와 복잡한 인파 속을 헤매다가 술집에 들어가 특이한 모자를 쓴 여자와 저녁을 함께 보냈다.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살해당한 것을 목격했고 곧바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집에서 아내가 죽던 시간에 그가 다른 여인과 함께 있었던 일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녀가 누구인지 꼭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잊을만하면 다시 읽어보고 다시 읽으면 늘 새롭다. 나의 일상이 꼬일 때마다 추리 소설 속에서 해결점을 향한 전환점을 발견하듯 내 문제도 풀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되고 더 찬찬히 다시 읽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 내가 떠나 온 집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잔디를 다 벗겨 내고 마당을 파 놓았으니 사진 속에서나 원래의 집 모습을 만난다. 나의 추억에서만 떠올려 볼 수 있는 오래된 나의 집도 무성하게 자라 지붕으로 뻗어오던 양로원 큰 나무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뒷마당에서 빨래를 널며 개들과 놀던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잔디를 깎으며 앞으로 뒤로 분주히 움직였던 생전의 남편의 뒷모습은 더 아련하다.
앞 길가의 나무 위치를 가늠해 본다.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세 집 터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공사장으로 변한 빈 땅만 보인다. 보라 색 꽃을 피워 나를 즐겁게 했던 할아버지 집의 ‘티보치나’ 와 ‘포인세티아’ 나무들은 키가 하늘로 치솟을 듯 컸지만 사라져 버렸다.
꿈속의 집에서 나는 지난 세월을 건져 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살던 기억을 따라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고 부엌과 럼퍼스를 거쳐 마당으로 내려가지만 얼킨 실타래처럼 감정만 북받치고 이내 과거는 끊어지고 만다. 전에는 과수원이었다던 이 동네에 무슨 인연이 있어 애틋하게 살다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질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힘을 얻는다. 말러의 교향곡 5번 중 4악장 아다지오를 들으며 애절함 속에 잠기다 보면 순화되는 자신을 느낀다. 말러가 ‘알마’라는 여인을 만나고 느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는 사랑의 감정이 전해져 한참 동안 울고 난 뒤끝처럼 새 힘을 얻는다.
뒷마당에 내려가 먼저 주인이 이사를 갈 때 데리고 갈 수 없었던 개 ‘수쿠비’에게 말을 건네며 쓰다듬자 수쿠비는 내 눈을 보았다. ‘주인님, 사라지고 없는 꿈속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슬프고 허망한 일이예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곳이 주인님의 집이 아닌가요?’
마치 내 마음을 위로 해 주는 듯, 슬픈 눈으로 수쿠비가 내 손을 한참 핥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