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09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비웃지 말라
(莫笑生涯薄)
침굉 현변(枕肱懸辯) 선사
막소생애박 莫笑生涯薄
요현일소도 腰懸一小刀
등등천지내 騰騰天地內
처처진오가 處處盡吾家
내 생애 박복하다
웃으며 비웃지 말라
허리에 둘러 차고 있는
아주 작은 칼(刀) 하나로도
오르고 오를 수 있는 곳
하늘과 땅 사이 늠름하니
처처에 발길 닿는 이 세상
모든 곳들이 나의 집이라네.
"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8~1686) 선사(禪師)
스님(僧, 沙門)의
시(禪詩)이다.
침굉 현변(枕肱懸辯) 선사
스님(禪僧, 승려, 沙門)은
조선조
숙종 때(時代)의
불교 스님(僧侶)이다.
속세(俗世)를 버리고
출가(出家) 한
수도자(修道者)의
씩씩하고 굳센 기상(氣想)과
진취성(進就性)이
있는 올곧은 정신(精神)
즉,
어떤 난관(難關)에도
절대로 굴(屈)하지 않는
기백(氣魄)이 넘치는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
한 편(一編)이
침굉 현변(枕肱懸辯)
선사 스님(禪僧, 沙門)의
살아 온 생애(生涯)를 돌아보고
한 껏 돋보이게 한다.
부처님(如來佛尊)께
의지(依支), 의탁(依托)하여
받은 이름
법명(法名)이
현변(懸辯)이었던
그(침굉)는
아주 어린 나이
9살에 출가(9歲 出家)하여
스님(僧, 沙門)이 되었으나
10년이 지난
19살(十九歲) 때
침굉 현변(枕肱懸辯)을
눈여겨 보고 매우 아껴주었던
고산(孤山)
해옹 윤선도((海翁 尹善道,
1587-167)가
양자(養子)로 삼아
환속(還俗)시키려 하였으나
울면서 애원(哀願)하여
끝까지 승려(僧侶)로 남았던
사람(人物)이다.
그런 뒤
1545년(명종 즉위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고산(孤山)
해옹 윤선도((海翁 尹善道)가
전라도 광양에 유배되었을 때
찾아가
창랑가(滄浪歌)를 지어
위로(慰勞)한 일도 있었다.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
스님의 법(정통법맥)을 이어서
순천 승주
조계산(曹溪山) 동쪽
선암사(仙巖寺)
조계산(曹溪山) 북쪽
송광사(松廣寺)
등(等)
호남(湖南)의
여러 사찰(寺刹, 승가람)에
주석(住席)하면서
부처님의 법(佛法)을
두루 널리 펼쳤다.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탐(貪)하지 않으며 멀리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허리에 패도(작은 칼) 하나를
만들어 차고서
천지(天地) 안에
그 무엇, 어떤 것에도
굴(屈)하지 아니하며
올곧게 살았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여러 곳을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천하(天下)를 떠도니
어디든지
발길(인연) 닿는 곳
내가 서거나
앉아 있는 모든 곳(處處所所)이
바로 곧 내 집(安住處)이요
도량(道場)이 된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에서
말(언급)하는
작은 칼(一小刀)은
지혜(智慧,
반야 보리 광명 바라밀)의
칼(刀, 劍)이요
수행자(修行者)의
취모검(吹毛劍, 지혜의 칼)
이라고 할 수 있다.
탐진치(貪嗔痴)
세상(娑婆世上, 세속)을
똑 바로 직시(直視)하여
똑 바로 보고,
듣고, 느끼며 바라보는
안목(眼目)
우주의 눈(視線)
하늘의 눈(天眼)이요
부처의 눈(佛眼)이며
지혜(智慧,
반야, 보리, 광명, 바라밀)의
눈(慧眼)이다.
그러므로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에서
말(언급)하는
작은 칼(一小刀)은
수행자(修行者)의
안목(天眼, 佛眼, 慧眼)을
비유하여 표현하는
말이요
본래의
전하고자하는 뜻과
의미(意味 本意)는
바로 곧 지혜의 칼(취모검)을
상징하는 것이다.
※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8~1686) 선사(禪師)
윤현변(尹懸辯,
1616~1684) 스님(僧)은
8세에 부친을 여의고
9세(13세)에 출가(出家)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수제자 소요화상(逍遙和尙)을
지리산으로 찾아가
스스로
그(소요화상)의
제자(門下 弟子)가
되었으며
그 뒤
수많은 명성(名聲)을 얻고
《오도(悟道)의 선승(禪僧)》
이라는 칭호(稱號)를 들은
사람(人物)이다.
그(침굉 현변)의
죽음(死後, 열반, 해탈) 후에
제자(門下 弟子)였던
약휴(若休)가 기록해 둔
스승의 글(文章)과
구비(口碑) 상태의 글들을 모아
문집(文集)을 만들면서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8~1686) 스님이 짓은(作)
가사(歌詞 또는 歌辭)
조선시대
시조(詩調)와 함께 유행했던
문학 양식으로, 가사문학))들
가운데
《귀산가(歸山歌)》
《태평곡(太平曲)》
《청학동가(靑鶴洞歌)》
등(etc)
3편의 작품(歌辭 3編)을
기록(記錄)해 넣었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8~1686) 선사(禪師)의
문집(文集)
『침굉집(枕肱集)』에
수록(隨錄)된 불교가사(歌辭)
가운데 한편(一編)이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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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