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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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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영양남씨 괴시파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17 13.07.11 23: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영양남씨괴시파종택(英陽南氏槐市派宗宅)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33
건 축 주 :  남병철(南秉哲)
건축시기 :  17세기 말 경 건립
중건시기 :  1916년 중수
소 유 자 :  남병철
문 화 재 :  시도민속자료 제75호, 1987.12.29 지정

건축 이야기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로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1916년경에 전체적인 부재(部材)와 기와를 교체한 바가 있고, 1984년에도 일부 낡은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사당은 약 80년 전에 지은 것이다.

건축 특징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ㅁ’자형의 안채 오른쪽 앞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사랑채가 돌출해 있는데 흔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윗방, 사랑방,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윗방은 재청방(齋廳房)으로 부른다.
안채는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 및 도장이 있으며, 우측에 상방과 작은 부엌이 있는데 상방은 원래 마루 반 칸이 있던 것을 1984년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또 도장방과 상방 상부에는 각각 유산고를 설치하여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내부에 약간의 개조가 있으나 조선 후기의 주택구조가 잘 보전되어있는 건물이다.

건축 구성
호지마을의 가장 중심 위치에 있으며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의 사랑방 앞쪽으로 원래 각 1칸 규모의 작은 사랑방과 대문간, 하인방 등으로 구성된 행랑 부분이 길게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입천 남붕익 선생

성명 : 남붕익(南鵬翼) , 1641년 ~ 1687년
본관 : 영양(英陽)
: 자거(子擧)
: 입천, 회수(卄川, 晦?)
출생지 : 영덕(盈德) 영해(寧海) 괴시(槐市)
출신지 : 영덕(盈德) 영해(寧海) 괴시(槐市)
분묘지 : 영덕 영해 탄동(炭洞)
입사경로 : 1673년 식년문과 합격
내관직 : 예조좌랑(禮曹佐郞)
외관직 : 영산현감(靈山縣監)
태생
공의 이름은 붕익(鵬翼)이요 자는 자거(子擧)이다. 성은 남씨인데 당나라 안렴사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이다. 공은 1641년 8월 22일에 괴시리 집에서 첫 번째 어머니인 오씨가 낳았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상이 있고 온화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으로 모부인을 섬길 때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음식을 제공하며 언제라도 그 뜻을 적합하게 하려고 하였다. 형제간에 지낼 때 굶거나 실컷 먹거나 걱정이나 즐거움이나 언제라도 함께 나누고 친족 간에는 언제라도 정성스럽게 하여 사람들이 감복하는 것이 많았다.
경력
숭정 1672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1674년에 참봉공의 상을 당하였다. 1679년 4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5월에는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고 6월에는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禮曹住郞 兼 春秋館記事館)이 되었다. 1680년에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어 자리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조금도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폐단을 고쳐서 한 지역이 모두 편안하게 되도록 하였다.
영덕 괴시파의 뿌리를 내리다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써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毆陽博士, 毆陽玄)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地形)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이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入住)하였고, 그 후 조선 명종(明宗, 1545~1567) 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인조(仁祖) 8년(1630년)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시거(始居)하였다. 그 후 3성(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괴시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축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傳承)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 경북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 문화재와 고가옥 30여 호가 밀집되어 있어 조상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문화마을이다.
괴시촌의 북쪽은 어대(魚臺)와 붙어 있고 남쪽은 경악(鯨嶽)을 마주하고 있으며, 큰 들판을 당기는 듯한 모습이고 떨어지는 노을과 비구름이 아침저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해동(海東)에서 제일 빼어나고 기이한 곳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기거하시던 곳 옆에 작은 연못을 하나 파서 이름을 ‘침향(沈香)’이라고 하고, 못 위에 작은 집을 하나 짓고서 ‘침향정(沈香亭)’이라고 했다. 침향정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정사(精舍)를 하나 짓고는 이름 하여 ‘무가정(務稼亭)’이라고 했다. 무가정에서 조금 북쪽에 흙으로 향부자풀을 덮고서 이름 하여 ‘소요대(逍遙臺)’라고 했다.

가족이야기

: 남벌(南?)
생부 : 남두원(南斗遠)
: 낙안오씨(樂安吳氏) 오경직(吳敬直)의 딸
형제 : 남붕한(南鵬翰), 남붕구(南鵬九)
영양남씨 시조 이야기
영양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은 중국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충(忠)이었으며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에 안렴사(按廉使)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동ㆍ남해에서 풍랑을 만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훼손된 배에 의지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지(有隣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명당산(明堂山) 죽도(竹島)에 표착하게 됐다.
그 당시 당(唐)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이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경덕왕이 그 일을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니 헌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기를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을 신하에 대한 예로서 불러올 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신라에서 살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 후 신라 경덕왕이 공(公)을 불러 이르되 “군(君)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사성(賜姓)함이 마땅하리라. 성(姓)은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고,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법(法)다운지라.” 이름은 민(敏)으로 개명(改名)하게 한 후 고은현(古隱縣)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란 시호를 내리니 이때 나이 40세이었다.
가족관계
조부는 이름이 발(?)인데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이름이 두원(斗遠)인데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지냈다. 어머니는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현감 오시준(吳時俊)의 손녀이자 주부(主簿) 오경직(吳敬直)의 따님이다.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아주 모범이 되는 분이었다. 계비(繼?)는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응청(應淸)의 손녀이자 처사인 중미(中美)의 따님이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지복(知復)의 딸인데 공이 돌아가신 뒤 27년 만에 돌아가셨다. 묘는 영해부의 북쪽인 병곡(柄谷)의 자좌(子坐)에 있다. 아들 2명이 있는데 첫째는 여흠(汝欽)이다.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지만 일찍 죽었다. 명흠(明欽)은 진사를 지냈는데 중부(仲父)에게 양자를 갔다.
여흠의 아들은 기형(紀衡)인데 생원을 지냈고 증직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받았다. 준형은 생원을 지냈다. 딸은 황세태, 김상덕에게 시집을 갔다. 기형의 아들은 육만(育萬)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택만(澤萬)은 증직으로 좌승지(左承旨)를 받았으며, 득만(得萬)이 있다. 딸은 권용해와 이제신, 조준도에게 시집을 갔다. 준형의 아들은 식만(式萬), 극만(極萬)이고 딸은 김상동과 조정복, 안명윤에게 시집을 갔다.
후손
영양남씨 괴시문중은 두원공의 장남 붕익(鵬翼, 1641~1687)공이 현종 1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영산 현령을 지낸 이후 마을은 문한(文翰)으로 이어져 영남 유림에서도 뛰어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문집, 저술, 일기, 유고, 서화 등과 판목(版木)들이 전하고 있으며, 근대에는 기미년(1919) 영해 3?18 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南啓炳 : 신돌석 의병 후원, 협창학교 설립, 항일사상 고취, 만주망명 독립군모집, 건국훈장 애족장), 남진두(南鎭斗), 남효직(南孝直), 남응하(南應夏) 등이 구국과 항일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영덕 괴시파 종중의 여러 유적
괴시남문은 영해부(寧海府)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적 관혼상제의 예절이 근래에까지 전승 되어 온다.
학문을 위해 건립하였던 입천정(卄川亭), 괴정(槐亭), 만서헌(晩棲軒), 침수정(枕漱亭),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문중 선조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齋舍: 덕후재(德厚齋), 태창재(態倉齋), 추모재(追慕齋), 추원재(追遠齋), 영모재(永慕齋), 양걸재(洋乞齋)]에서 해마다 정해진 날에 제사를 모신다. 전통 민속놀이로서 윷놀이, 줄다리기 등과 농사와 관련한 세시풍속이 전래되어 왔으며, 유가(儒家)의 규범(規範)과 행의(行誼)를 엄수하는 문화와 예절이 이어지고 있다.

학문이야기

스승 : 대은(臺隱) 권경(權璟) 
학파 : 기타 학파
교유인물
갈암 이현일, 항재 이숭일, 이몽암, 김노주
대은(臺隱) 권경(權璟)을 스승으로 모시다
9세에 참봉공께서 대은(臺隱) 권경(權璟) 선생께 공부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대은 선생은 공을 아주 기이하게 여기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는데 읽는 소리가 아주 낭랑하고 책 속의 내용을 해독하는 것이 아주 정밀하고 자세하였으며, 물러나고 나아갈 때 그리고 사물을 응대할 때 모두 성인처럼 하니 사람들이 앞으로 아주 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교유인물
일찍 벼슬을 한 것은 집이 가난하여 양친을 봉양할 수 없어서인데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으면 이로써 군수의 자리에 있어도 일찍이 조금도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또 바닷가 산이 있는 적막한 물가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평생을 마치며 교유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유명한 분들이니 그분들을 보면 갈암 선생, 항재 선생, 괴애 선생, 이몽암, 김노주 등 여러분이니 전부 도의로 서로 애쓴 경우이다.
약관의 나이에 시를 쓰는 분야에서 뛰어나 과거시험장에서 명성을 날렸지만 경서를 공부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입천정에서의 생활
경신년에 영산현(靈山縣) 현감이 되어 자리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조금도 스스로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폐단을 고쳐서 한 지역이 모두 편안하게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계비(繼?)를 임소에 모시고 갔으나 풍토(風土)가 좋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동쪽으로 먼 길을 되돌아와 오직 경서 몇 권에만 전념하였다. 경신년 이후로 세상사를 잊고 두문불출하며 한가하게 지내며 다만 사서(四書)와 역사서를 가지고 스스로 즐길거리로 삼으며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산수 간에 다니면서 이십천(二十川)에 작은 정자를 하나 짓고 이름을 ‘입천(卄川)’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이곳에서 그저 만년을 보내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입천정의 유래
지난 숙종 때 우리 고을의 선생 좌랑동공(佐郞東公)은 묘년(妙年)부터 영명을 날렸으나 세속과는 취향이 달라서 관계(官界)에는 부앙(俯仰)하지 않고 좌랑현관(佐郞縣官)의 사이에서 저회(低徊)하다가 경신년에 사변을 보고는 그만 낭관(郎官)의 직에 염증이 나서 그 본 집의 뒤 입천(卄川)의 위에다가 두어 칸 집을 짓고 그 방명에 의해서 입천정이라고 제명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공이 산림에 높은 은사라는 이름을 표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미의(微意)를 속어(俗語)의 이치에다가 부치어서 그것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만 쌓아서 세상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유유(悠悠)하게 자적하셨으니 그의 무위(無爲)한 데서 위하는 뜻을 이에서 가히 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정년이 단촉(短促)해서 그중에서 끝내 수양하지도 못하고 만년에 지은 정자도 또한 따라서 퇴폐해서 빈터만 남은 지가 지금에 200년이나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 실전된 유지를 일찍이 괴서(槐西)의 구장(舊庄)으로 이전해서 입천정(卄川亭)이라고 써서 걸려고도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해서 수의(遂意) 하지 못한 지도 또한 수 세대가 지나왔다.
그런데 내손(來孫)에 흥수(興壽)가 입천을 돌아보고 비탄해서 여러 친족과 합의하고 모의하여 그곳에 가 상하로 수색(搜索)하여 마계(磨溪)란 곳을 찾아내니 밖은 좁아도 안은 넓어 회합(回合)하고도 통망(通望)한 곳에 사람 사는 집이 멀지 않아도 또한 진세(塵世)를 격절(隔絶)해서 심울한 마음을 펴서 펼칠 만하니 비록 구지(舊址)를 적확(的確)하게는 알 수가 없어도 요는 춘산(春山)의 사초(莎草)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금을 모아 건축을 하여 이년 만에 준공하니 창헌(窓軒)이 명상(明爽)하고 주방(廚房)도 실비(悉備)해서 구제보다는 조금 큰 것이다. 그러니 족히 여러 종친의 거업(居業)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삼은 것이다.

저작이야기

『괴장세고』
『괴장세고』는 영양남씨 12명의 유고를 모아놓은 것이다. 후손 남곤수(南崑壽)가 편집하였다. 김도화(金道和)의 서문과 호조(澔朝)의 발문이 있다. 저자는 남붕익, 명흠, 기형, 준형, 택만, 극만, 일운, 상운, 경악, 화수, 기수, 곤수 등이다.
『입천정유고』의 체제
『괴장세고』의 첫 부분에 있다. 그다음에는 만사 및 시, 서, 제문의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부록에는 행장과 묘갈명이 실려 있고 그 외에 공이 돌아가셨을 때 주위에서 지어준 만사 20편과 입천정 관련 상량문과 중수기문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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