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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에서
성경본문: 잠언 25: 6-11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8.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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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 1-8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자기도 함께 갇힌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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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일평생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함이 마땅함을 배웠습니다. 이어서 주어지는 오늘의 말씀은 그 충성의 삶의 내용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충성의 모습이 들어 나는 현장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일상 삶에서입니다.
우리가 주인으로 모시고 충성을 맹세한 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에게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보이지 않기에 마음으로만, 영적으로만 섬기면 되는 것인가요?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충성을 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마음속으로 만의 사모로서 충성을 보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오로지 산 속이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만을 하면 참된 청지기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은 전혀 관심의 밖이고 오로지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만을 사랑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청지기라고 믿었습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6·25의 전쟁의 환경 속에서 엮어졌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피난시절 14, 5세 때부터 모친의 손에 이끌려서 새벽기도회에 나갔습니다. 그 피난의 삶 속에서 내가 의지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물론이고 학교도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피폐된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의지할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거기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사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뜨거운 통곡의 참회의 체험도 했습니다. 실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그의 청지기로서 일생을 살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것입니다. 20대에 들어와서는 산 기도를 가기도 했습니다. 산 속에서의 기도생활은 엑스타시스의 감격을 맛보게 했습니다. 일종의 신비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이후 오랜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민족의 역사도 그 아픔도 전혀 관심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마음에 모시고 그분께 만 충성하는 청지기로서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한 사건은 대학시절에 겪은 4. 19혁명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을 보게되었습니다. 민족의 역사를 보게되었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알게되었습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서양의 관념철학에 깊숙하게 빠져서 지냈습니다. 영적 신앙 안에 안주했던 나에게 관념철학은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 19의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 민족의 뒤틀린 현실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의 청지기 사명의 내용들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 생활운동에 앞장을 설 수 있을 정도로까지 민족의 문제에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던 내가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개혁과 변혁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개혁에 전 생애를 바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나에게 있었던 신비적인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나에게 줄을 대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게 새롭게 다가온 이 세상에 나를 전폭적으로 던질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 이후, 보이는 이 세상과 아니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간의 가교를 어떻게 이어야 하는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민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한 쉬지 않을 것입니다.
한 때는 매우 단순하게 나의 삶을 정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크리스마스와 그의 재림 중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요 생의 모토입니다. 4. 19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 살았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무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명은 사람들을 일깨워서 이런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미래 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 이 생의 목표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전도란 오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차원에서 해석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구원이 아니라 내일의 구원을 향하여 외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도 개념에는 종말론적인 냄새가 물신 풍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찌되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기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열망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가 재림의 주님의 영접을 받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내가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로지 재림하시는 주 님 뿐입니다.
그가 내게 명령하였기에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재림의 주님을 영접하도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 하기로 하고 신학의 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을 우리들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저주하고 불로 심판 받을 땅으로 해석하면서 오로지 저쪽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살도록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50년간 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유혹되어 교회의 문에 들어 선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박태선, 용문산의 나장로파, 얼마 전까지도 기세 당당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외침이 다 그런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세상은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니 다시 오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가족도 희생하고 물질도 다 교회에 바치고 학업도 중단하게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멸망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재산을 헌납하게 하여 많은 액수의 헌금을 받아 가지고는 자기네들의 호주머니에 넣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구속된 여자 교주의 "아가동산" 사건도 그 일종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70, 80년대 한국의 교회가 급성장했는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온통 교회를 많이 만들어 가는 것에 정신을 팔았을 뿐 이 세상의 썩고 있는 현실에는 무감각했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별개라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가 달린 교회당은 이웃 주민들의 구체적인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저들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외치기만 하였습니다. 교회 밖에서 어떻게 살아야 충성된 하나님의 청지기인가에 대하여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충성된 종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들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보이는 교회를 많이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아 드리는 사람이 최고의 충성된 하나님의 종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교회 밖의 구체적인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기독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세상은 더욱 썩어갔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 현실은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교회는 급성장을 하고있는데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였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는 성도가 아니라 악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추하고 못된 짓들을 마구잡이로 하다가 감옥의 신세도 지곤 했습니다. 이 세상을 밝게 만들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데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이토록 세상 속에서 막 나가니까 어떤 신학자는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교회 안에 하나님이 없다" 라는 자조적인 말도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네 지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힐 바에는 교인이라는 이름 없이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 혹은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옷 로비 사건 때 보신대로 "권사님, 권사님" 하면서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떠들던 모습이 방송의 화면을 타고 전국에 생방송될 때 얼마나 낯이 뜨거웠습니까? 그 때 성도라는 이름 없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지 말고 전 우주 에 확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교회 안에만 제한하지 말고 확대하여 세상의 한 복판에서 효력을 발휘하게 하여야 합니다.
요10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이 양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는 기도에서 밝혔듯이 교회의 울타리 밖에 있는 백성들을 위하여 청지기의 사명을 성도들은 감당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적을 가진 교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칼 롸너(Karl Rahner)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 이란 개념을 써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현존함을 역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란 말씀은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알려줍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입니다. 즉 온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그는 가르칩니다.
오랜 에큐메니칼 논의를 거쳐서 정립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잘 정리한 회켄다이크(Hoekendijk)는 보다 더 적극적인 청지기적 삶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청지기 사명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거두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할 일들은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평화의 다양한 표식들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 즉 샬롬은 하나님 나라의 구체화입니다. 종교적인 술어인 "구원"이란 말을 구체화시킨 개념입니다. 구원은 영과 육의 치유상태를 말합니다. 의와 진리와 평강과 화평과 기쁨 등을 총칭하여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샬롬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사건들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회켄다이크가 예로 든 샬롬의 표식들은 말틴 루터 킹목사의 인권운동, 독일에서의 동서독 화해운동, 불란서에서 노동자 신부들의 노동운동 등등입니다. 우리들의 경우 남북의 화해와 평화운동, 환경운동들도 거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들이 주장하는 형제사랑, 손님대접, 갇힌 자를 돕는 것, 온당한 결혼생활(히13;1이하)과 경우에 합당한 말(잠25;11)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샬롬을 엮어 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청지기 사명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물론 교회의 선교는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믿게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밖의 세상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이원론적 위험성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재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과 같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는 더 더욱 주님의 나라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괴롭다고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어둡고 답답하기에 더더욱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바꿔볼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교회밖에 사는 저 수많은 생명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샬롬을 이 땅에 심어주는 일을 할 때 교회밖에는 평화가 깃들고 그것은 곧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길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와 세상 전체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결과를 얻습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도 추수감사절을 기하여 총동원전도주일로 정하고 전도운동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도학교 교수를 모시고 효과적인 전도운동을 위한 자세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총동원 전도" 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즉 "오라의 구조"(come structure)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교회로 모시고 오는 운동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전도운동은 "가라의 구조"(go structure)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의 교인이 됨에서 이들이 교회의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들어내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청지기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심어 가는 성도들을 많이 만들어 가는 운동에 모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