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울과 다윗 Ⅴ (삼상 21:1-9)
영적적용 : 영적승리론
요약
사울을 피하던 다윗이 저지른 실수는 죄의 문제에서 성도가 자주 격는 시행착오를 보여준다. 홀로 다가 온 다윗을 보고 제사장이 두려워 함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사울의 이름으로 도움받았다가 후에 낭패를 당함은 오직 예수 복음으로만이 가능함을,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은 은혜도 큰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에봇만 있는 성막은 하나님께 물어야 함을, 그리고 성막의 주 임무가보여주는 것은 나를 제물 삼는 것이 곧 영성의 길임을 보여준다.
설명
본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첫 도피 장소로 놉의 성막에서 있던 일로 우리가 의를 사모할 때 참고할 사항이 본문에 나타난다.
☆ 죄에서의 승리론
1. 내 힘으로는 안된다.
1절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1) 홀로 있고 -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된다.
2) 함께 하는 자 - 성령을 입어야 한다.
2. 예수의 복음에 서야 한다.
2절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1) 왕이 - 예수 이름이여야지 율법은 진노의 후환이 따른다.
2) 그러므로 - 오직 예수의 복음에 서야 한다.
3.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구해야 한다.
3-4절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내 손에 주소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1) 떡 - 성막은 떡 구하는 장소가 아니다.
2) 에봇만 있는 성막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3) 도엑 - 인간의 불온한 사상과 생각을 예표한다.
4. 나를 내려놓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
9절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1) 칼 - 성막은 무기 구하는 장소가 아니다.
2) 골리앗의 칼 - 능력을 예표한다.
3) 성막이 둘째 임무 - 제물을 드림이듯 나를 죽이는 것이 영성이다.
강해
오늘도 계속하여 사울과 다윗에 관하여 성경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사울의 의중을 파악하는 요나단과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서 성경론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고 나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떠나듯 우리의 믿음이 육신적인 방향에서 떠나고자 하는 의를 사모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영육간의 대립은 더 강해집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죄에서 이미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설 뿐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하며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 묻고 자기를 내려놓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점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은 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합니다. 그 착오로 자기 생명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많은 생명이 위험한 위기에 처하고 놉 땅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까지 죽는 비극을 맞이 했습니다. 이처럼 죄와 결별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넘어지는 신앙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했습니다.
여기 사울을 피하여 도피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초라한 모습입니까? 그를 따르는 숨겨둔 소수가 있음이 암시되어 있지만 여기 그가 홀로 나타난 그 모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홀로 다가 온 다윗을 본 아히멜렉 제사장은 심히 두려워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기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왕명을 갖고 왔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랜드종합주석).
여기서 보여주는 영적 교훈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 홀로 나타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아히멜렉이 두려워 한 것처럼 율법은 진노만 이룰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신 의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의를 지키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1-4) 교훈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의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입어야 합니다. 제가 복음과 함께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령은 복음을 우리에게 실재가 되게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어 성령으로 생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타락했으나 우리가 그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막강한 죄의 생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 원리대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셨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그 막강한 새 생명을 입어야 만이 실재적인 거룩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입어서 주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화생활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2. 진실한 예수의 복음에 서야 합니다.
2절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다윗의 실수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몸임을 숨기고 사울 왕의 특사인 양 거짓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울이 보복이 두려워 아히멜렉이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름으로 배고픔 등 약간의 도움은 면했지만 무서운 피의 보복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나가야지 율법의 이름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는 무서운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롬 4:15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했고 롬 3:19-22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다윗이 사울의 이름으로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이듯 나와 하나님 앞에서 기만이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며 전전부패하여서 의를 행하거나 구원과 영생얻기에 합당치 않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수의 복음을 수납하게 됩니다.
그럼 예수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롬 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점은 이 예수 안에 우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엡 2:4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이 진리에 얼마나 서느냐에 따라 칭의와 아울러 계속적인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1-2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3-4절에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내 손에 주소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했습니다.
여기 다윗이 여호와의 성막을 찾아간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는 피신 길에 양식과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양식과 무기를 위하여 성막을 찾은 것은 잘못입니다. 그곳 성막은 당시 법궤는 아직 본처로 돌아오지 못하고 에봇만이 있는 성막입니다. 에봇이란 여호와의 뜻을 묻는데 쓰이는 대제사장의 옷인데 그 에봇 안 주머니에는 우림과 둠밈(출28:6-14)이 있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그 성막의 가장 핵심은 에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여쭈기 위한 목적으로 와야 함이 당연한 대도 겨우 성막과 관계가 없는 식량과 무기를 구하러 왔던 것입니다.
다윗의 도피생활을 대략 3기로 나누는데 제 1기는 기브아 자택에서 헤렛 수풀까지(19:9-22:23), 제 2기는 그일라에서 십 황무기까지(23:1-26:25), 제 3기는 가드에서 헤브론까지(27:1-삼하2:1) 입니다. 그런데 다윗 초기 도피생활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신앙보다 인간적인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에봇이 가장 특징인 당시 성막에 와서도 여호와의 뜻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구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그 곳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리라고 가정하지만 당장 그가 블레셋으로 도피하고 모압으로 도피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더구나 일반 떡이 없으니까 제사장 외에는 그것도 성막 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 진설병을 요구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도 인정은 하셨지만 겸손의 측면에서 볼 때 어쩐지 무리한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행하는 소년들이 성적으로 부정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다윗의 말만 믿고 진설병을 내 주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큰 범주에서 볼 때는 율법의 정신에는 위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넓은 범주에서 다윗의 행사를 볼 때 성막을 찾은 목적이 여호와의 뜻을 물음과 관련성이 있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뜻을 묻지 않는 곳에 인간의 악한사상과 생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에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성막에 도엑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 도엑이 무엇입니까? 그는 에돔 사람인데 에돔은 붉다는 뜻의 불온한 사상입니다. 거기다 도엑이란 '겁 많은, 소심한, 불안'이라는 뜻으로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마음을 뜻합니다.
그는 사울의 목자장으로 짐승을 길렀는데 영적으로 짐승은 적그리스도에게 쓰였듯 악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그 일에 충성을 다하여 사울에게 인정을 받아 상당한 군인을 거느렸고 나중 다윗의 일을 사울에게 밀고했으며 또한 칼날을 들어 놉의 제사장 무리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악한 사상과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뜻을 묻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걸려들면 끝장이 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사장의 무리까지 죽였듯이 우리들의 신앙까지 다 죽여버립니다. 그래서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다윗은 그 살육 중에서 에봇을 가지고 도망쳐 나온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에게 그 소식을 듣고 22:22에 보면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하면서 탄식했습니다.
그런 후부터 즉 삼상 23장부터는 다윗이 여호와께 철저하게 여쭙는 사람을 살아갑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기에 크나큰 실패의 쓴 잔을 체험했습니다. 그의 실수로 이스라엘의 가장 귀한 곳인 성막 본부가 피로 물들였고, 블레셋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모압에서는 자기와 자기의 가족과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 거기다 그들의 가족까지 그러니까 수천 명인데 그들의 생명이 하마터면 모압에서 몰사할 뻔 했습니다.
그런 일을 경험한 23장부터는 모든 일을 여호와께 묻는 신앙으로 변합니다. 여기서 묻는 신앙이 생겨납니다. 묻지 않는 결과에는 실패 밖에는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화를 냈어도 "하나님 제가 왜 그랬어요" 물으시기 바랍니다. 길에 나가 눈으로 범죄했어도 꼭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우울하고 낙심하고 원망할 때도 여쭈시기 바랍니다. 혹은 기도가 안나옵니까? 혹은 설교가 잘 안됩니까? 자녀들이 실망을 줍니까? 역시 여쭈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본격적으로 대적하는 도피기에 물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가 죄 속에서 방황하고 넘어질 때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일은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면 용서만 구하지 묻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시장하다고 다윗처럼 은혜의 떡만 구합니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골리앗의 큰 칼만 구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히멜렉도 허락하고 인정하신 것처럼 은혜의 진설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부터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엄청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유아기를 탈피하지 못하는 이유가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1-5세 이전에 인일의 필요한 지식들을 상당 부분 정복합니다. 대학교까지 이수해도 1개 국어 회화하기도 어려운데 어린이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일을 해 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자연스런 질문법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힘겨울만큼 계속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이 질문의 열정이 초등 중고등까지 이어진다면 그 효과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른들이 나서서 그 열정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좀 엉뚱한 질문을 해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의 뇌가 장차 아예 탐구형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결코 책망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시기에 우리의 눈 높이로 잘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지식 충족을 위해서만 물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의 뜻대로 하기 위한 목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몇 년만 하나님께 묻는 삶이 되면 우리의 영성은 상상할 수 없이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남을 가르치는 영성의 지도자도 될 것입니다.
4. 나를 내려놓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8-9절에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골리앗이 칼은 권능의 상징입니다. 이 권능은 성령께서 주시지만 경험적으로는 사단의 권세와 싸울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능력을 받는 것을 보면 큰 시험을 당해 악의 세력과 강력한 접전을 벌인 후에 받는 것을 봅니다. 물론 사단에게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수의 세력을 대항하는 믿음을 가질 때 입혀진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특별한 시험이 없어도 이런 강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능력이 옵니다. 이것이 바로 빼앗은 골리앗의 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구했다가 도엑의 고발로 제사장들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성막에 와서 구할 것이 있다면 먼저는 여호와의 뜻 다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의 문제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성막과 제사장과 부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죽이는 것이요 내려놓는 것입니다. 즉 영성이란 무엇을 받는 것이라기 보다 도리어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한 두 번째는 칼이었습니다.
그것도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보자기에 싸여 있었는데 학자들은 그 칼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장군이 가진 크고 광채나는 칼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잘못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했습니다.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악 속에서 방황할 때 능력을 구하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알지만 진정한 능력은 받는 능력이라기 보다 내려놓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받는 능력이 옵니다. 많은 성도들의 실패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받는 능력이 옵니다. 많은 성도들의 실패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성이란 죽어지는 것이요 내려놓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시아 칠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 3:8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그들은 큰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면 그들은 주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열린 문과 성전의 기둥과 시험도 면제해 주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시고 심지어는 이단의 괴수들까지 무릎을 꿇는 등의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합격증입니다. 즉 그들은 죄악의 사울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기 위해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인내였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 죽음 속에서 참으면 즉 계속하여 머무르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합니다. 그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계 3:10을 보면 이미 면류관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미국 알레스카 주립대학 교수인 김춘근교수가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데 1976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간암에 걸려 배가 퉁퉁부어 죽어갈 때 흰 눈이 덮인 땅에 엎드려 썩은 고목나무 그루터기를 붙잡고 회개하며 부르짖다가 고침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때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악을 내어놓고 회개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은 신앙생활도 그만하면 됐고, 교사다 성가대다 청년회장이다 기독학생회 회장이다. 회계집사다 충성했다면 더 이상 충성할 수 없었고, 누구보다 학문적인 노력을 더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영적 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제쳐놓고 자기 혼자 발버등쳤으며 각종 세속과 성장과정에서 많은 내적 상처로 악한 이기심 열등감 고집 미움 한과 교만 등이 가득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부짖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나타나 그를 꼭 껴안아 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시면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는 용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죄악의 속성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기사회생하였고 믿음으로만 산 결과 미국에서 알아주는 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능력을 구해야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능력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것 아닙니다. 큰 능력 구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구할수록 큰 능력은 멀리 떠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죽어지고 내려놓고 비켜드리고 겸손할 때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고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십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잘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엘라 골짜기를 공포로 몰아넣고 산천마저 그의 음성으로 울리던 세상을 뒤흔드는 골리앗의 그 빛나는 능력의 칼이 아니라 응당 제사장에게 구할 것은 나의 죄와 심령의 문제여야 했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신적인 좌와의 싸움은 내 힘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의 복음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을 찾아가서 무엇을 구합니까?
떡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천하를 휘두를 능력입니까? 그보다 내가 죽어지고 제물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악을 온전히 이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