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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 5 아니하며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또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하다’는 원어(아스케모네오)는 ‘보기 흉하게 행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킨다. 사랑을 가진 자는 그 인격이 아름답다.
(1) 무례
"무례"란 말(* )은 합당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막무가내로 행함이다. 그것은,
①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와 함께 살 줄을 알아야 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
* 요일 4: 21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
* 마 15: 5-6 –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 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②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 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맵시가 없다. 교양이 없다. 오만불손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다.’라는 뜻의 낱말입니다. 중요한 말씀인데요.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사람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구체적인 예절에 대한 예를 많이 준비했는데 말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는 그 예절에 있는 건데 의복 예절, 인사 예절, 방문 예절, 위문 예절, 호칭 예절, 지칭 예절, 대화 예절, 예배 예절, 심방 예절, 전도 예절, 교인 예절, 사역자 예절 등 교회부터라도 예절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롬 16: 2에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 한 예절은 문맥으로 볼 때 사역자에 대한 성도의 예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수록 교양과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거친 말 잘한다고 카리스마가 있고 능력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권위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 있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면 양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권위입니다.
예절을 무시하고 전도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사에 어느 누가 예수 천당 했다고 그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반화하여 아무데서나 소리를 지른다면 큰 낭패입니다. 예절 없이 전도해서 얻은 이익보다 전도 길을 막는 손해가 더 클 것입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유익을 위한다.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 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 35).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의 유익보다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살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탐한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명 감당하면서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직분과 은사로 자기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권력자 중에는 부정 축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그렇게 하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합법적으로 준다 해도 교회 재정이라면 성도들의 헌금이므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오래된 고대 문헌으로 ‘디다케’라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교훈집을 보면 제 3부 11장에 순회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한 접대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 몇 부분만 발췌하여 잠시 읽어 드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식탁을 (마련하라고) 영으로 명하는 예언자가 그 식탁에서는 먹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어느 누가 영으로 말한다면서 "내게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주시오" 하거든 여러분은 그의 말을 듣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하여 달라고 하거든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마시오.”
제13장 붙박이(시무) 예언자들과 교사들 공양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여러분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참 예언자는 누구나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같은 모양으로, 참 교사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꾼이 먹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포도나 곡식이나 소와 양들의 소출 중 맏물을 모두 거두어 그 예언자들에게 드리시오. 그들이 바로 여러분의 대제관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예언자가 없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오. 돈과 의복과 모든 재산 중에서 맏물을 거두어 계명에 따라 주시오.”
설명하자면 가르치기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자기가 그 대접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머물러라 어떻게 하라 당시 상황으로 이 시대에 꼭 그대로 적용할 수 없지만 그 흐르는 중심사상만큼은 취해야 할 교훈들입니다.
사람이 능력 있고 인기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여러 문제가 생겨나기 쉽습니다. 내가 이만큼 수고해서 이루었는데 이 정도 대접받는 건 당연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사로운 문제로 하나님의 일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교회에서는 정당해도 사회에 부덕이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비량하는 것이 좋고, 교회는 목회자에게 맡기고 불신자 전도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3]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또한 쉽게 성내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기뻐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화를 내는 경향이 있지만, 참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물론 사람이 진리와 의를 위해 정당하게 성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조심해야 한다. 성내지 아니하며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이 두 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 운동을 방해한다.
* 요일 3: 15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는다.
* 요일 3: 17 -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
* 요일 3: 14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 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4)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①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② 분노를 이기는 또 한 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
* 엡 5: 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성내지 아니하며
성낸다는 의미는 ‘성깔 있고 쉽게 예민해지는 기질’이라는 뜻입니다. 성품이 원만해야 합니다. 작은 문제 가지고도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성품이 무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에 충만하면 그렇게 됩니다.
성경에 여성 사역자가 있을지라도 지도자는 그 모습은 언제나 강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 두 배 반 정도 예민하다고 합니다. 감정처리를 잘 못합니다. 순식간에 아줌마로 변신하면 예의고 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문제해결의 답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딤전 2: 15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 구원은 사역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안 된다. 그러나 거룩한 여성은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여성 지도자 상입니다. 성령 받아 거룩하고 덕성 있고 마음이 강건한 여성만 쓰십니다. 예수 안에서 남자든 여자든 구별이 없지만 자기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삼국지에 장비 같은 기질보다 유비, 현덕 같은 성품이 좋습니다. 유비는 덕으로 온 나라의 존경을 받으며 다스립니다. 그러나 장비는 형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부하들에게 심하게 굴다가 칼에 맞아 죽습니다.
부흥사 무디가 미국 중서부의 한 도시에 큰 전도 집회를 위해 미리 도착했는데 어느 날 아침 조간신문에 일제히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고 헤드라인 타이틀로 나왔습니다. 무디가 바쁘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더니 기자들이 화가 나서 악평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무디의 참모들이 분노하자 무디는 "이 사람들 사람 잘못 봤구만, 나는 이 신문기사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해. 나는 훨씬 더 교만하다고. 이 정도면 잘 썼구만."이라고 웃어넘겼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더 겸손하라고 준 신호이니 더 충성하자고 했습니다.
일하다 보면 화낼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 겸손한 모세도 화를 낼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온 교회까지 목회 생활을 뒤돌아보면 교인들이 일 못하겠다고 장부를 가지고 온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려면 진짜 무던해야 합니다. 교회에도 별 사람 다 있습니다.
4]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또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남을 위한 선한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도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 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
* 롬 5: 10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리차드 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랑하면 당연히 대상에게 악한 생각을 할 수 없겠지요. 어떤 사람이 6. 25 때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찾아서 복수하려고 무술을 연마하고 수십 년간 찾아다니다 결국 원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복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6. 25 때는 그가 공산당이었지만 지금은 회개하여 예수 믿고 있었고 그 원수의 아들이 목회자까지 되어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복수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는 이미 자신 역시 하나님을 만난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처가 남아있다면 어떤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사역은 안으로 감당하며 참아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게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를 받고 사역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같은 말을 해도 상처 받지 않게 예쁘게 하세요.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더욱 근신하고 겸손하며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상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이용할 생각 하지 말고 그를 돕고 키워주고 그의 앞날을 인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