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8-11
기 우(杞憂)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가을이 되면 잎의 생장과 생명 활동이 둔화되고, 잎으로의 수분과 양분의 공급이 여의치 않게 되어 새로운 엽록소의 생성은 억제되고, 대신에 잎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엽록소의 분해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식물의 잎은 차츰 원래의 푸른 색깔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몇 날이 못 되어 누렇게 색 바랜 낙엽은 무심결에 부는 바람결에 흩날리며 땅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누렇게 색 바랜 낙엽은 그 싱그러운 푸르름을 소진(消盡)해가며 까지 살아왔건만 나는 일관(一貫)되지못하고 천태만상(千態萬象)으로 산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면서 지는 낙엽을 보면서 삶의 영속성이 걱정이 된다. 옛날 중국의 기(杞)나라에 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앞일에 대하여 지나친 걱정을 달고 살아가고 있었단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일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하면 좋을까?”하며 식음을 전패하고 걱정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앞일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뜻하는 말인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약한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장래사(將來事)를 걱정한다. 생각되어지는 것은 나에게 팔년, 구년 동안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과 같은 목사님은 장래의 일을 대비(對備)해 가면서 살아가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그 어른은 매사에 늘 상 검소하면서도 그렇다고 저금이니 보험이니 하는 것들을 회피하며 사셨다. 그 가름침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에 가서 염려할 것이요. 오늘 괴로움은 그저 오늘 한날 괴로워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라 라는 지나친 걱정의 기우(杞憂)는 말아라. 필요 없는 걱정대신 너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 하였다(마태복음 6:33-34).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생활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주의 성령(聖靈)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삶이라고 말하였다(누가복음 4:18).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라는 말인 것 같다.
올해에도 가을은 지나간다. 시월 마지막 주간에 경기도 속초에 있는 추양하우스에서 교육과 쉼의 기회를 가졌다. 추양(秋陽)은 여러해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한경직 목사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곳에 가서 알게 되었다. 함께 가신 목사님은 추양(秋陽)이라는 가을볕에 매료된듯하다. 그러면서 목사님하시는 말씀에 한없이 따뜻한 어느 한가한 날의 가을볕은 그 어느 영양제나 그 무슨 보약보다도 더 났다는 말씀이셨다. 우리들은 생의 화창했던 봄날과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하나님 앞에 가서 둘째 막의 하늘나라의 생이 시작될 것이다. 그 삶은 영속적으로 계속 되는 삶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나는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죤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이 있게 된 것은 낙원의 여유로움과 한가함 속에서 느끼는 사람의 권태로움이 가져다가준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엉뚱한 자문을 언뜻 언뜻 해본 때가 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다들 다른 세계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추양하우스에서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마음에 많은 와다은 이야기 가운데서 빌리그레헴 목사님은 젊어서는 흰바지에 그저 백구두를 신고 다니는 큰 한량이었단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된 루이스그레헴은 젊은 날에 평양에 와서 선교사의 일을 하리만큼 각고의 삶을 살았단다. 하루는 루이스그레헴이 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는 중에 차량이동에 불편함을 주는 도로 공사장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옆 안내판에 “공사 끝, 불편을 끼쳐 그동안 죄송합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그 루이스그레헴이 이다음에 내가 죽으면 묘비명(墓碑名)에 바로 저 말 “공사 끝, 불편을 끼쳐 그동안 죄송합니다”라고 써 달라고 말하였단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다음의 말씀을 하신다. 시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랐을 때, 형체가 변형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 졌는데(마태복음17:1-8), 이런 상황은 미리 보여 진 하늘나라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차원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을 탈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선생님의 얘기를 잘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는 시공을 초월한 삶이다.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시간에서 벗어난 그 무슨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 이틀 연령을 헤아려 가며 사는 것은 현세의 삶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고, 이후의 삶은 시간을 벗어난 삶이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사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의 계수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삶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를 노릇의 삶일 것이다. 그래서 이생의 짧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시간을 아깝게 여겨가며 분초를 질적으로 고화질과 같은 양질의 삶을 살아야 될 것 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기우(杞憂) 같은 죽음을 당했을 때, 우리 옛날 사람들은 세상에서 떠나가신 그 분의 길을 다음과 같이 열어주었다고 한다. 테레비 같은 역사극에서도 보여 지듯이 임금이 승하(昇遐)했을 때 크고 흰 천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흔들어가며 무엇이라고 여러 차래 크게 외쳐대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통 장례 절차 중 초혼(招魂)이라고 하는데, 이미 떠난 혼(魂)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고 싶은 소망을 나타낸 것이다. 초혼은 사람이 죽은 직후 평소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망자(亡者)가 즐겨 입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망자의 이름과 함께 돌아올 복(復)자를 세 번 외치는 행위란다. 여기서 망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떠나간 혼이 다시 몸과 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복(復)자를 외치는 것은 하늘과 땅과 공간에서 회귀(回歸)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돌아올 복(復)자가 우연히도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復活)’이라 할 때 쓰는 다시 부(復)자와 같은 자를 사용하는 것이 큰 뜻이 있어 보인다.그러므로 교회의 얘기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6-17).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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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08년 11월 15일 추부 마전 만인산농협 강당에세 대한적십자사금산군추부봉사회(회장:성삼순)에서 주최한 이웃사랑노인결연효잔치에 새터공공체 식구들이 초대을 받아 참여하였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이원교회.신평교회.김기홍.정무래.최영애.라홍채.박종만.진영택.최성재.김정화.양오석.수영교회.채윤기(박현실).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최선희.남부중앙교회(박용태외8인).대전성남교회중등부(김영균외14인).대전충남지방통계청.진명구.추부제일교회.금성교회.세광교회.향림원푸드뱅크.대성교회(정영협외6인).신건태.대덕교회.주식회사EG(이광형).금산주부클럽(3인).금영훈.대전성남교회.동춘교회6여전도회.도원교회(정길채외1인).임영호.금산군모란회(3인).학산교회(최철용외2인).대전노회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