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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국미술대를 졸업하고 북종화의 대가로 일본 화단에서 명성을 쌓은후, 14년 전 불교에 귀의, `일당`이란 법명을 받고 어머니 일엽 스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 김태신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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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鍾汝는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으로 李碩鎬와 더불어 북한 미술의 기본기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가 평소에 즐겨 그린 ‘외로운 참새 한 마리’는 鄭鍾汝 자신이다. 화폭의 한쪽에 다섯 마리를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금단의 울타리 저편에 외로운 참새 한 마리를 배치한 것을 볼 때마다 월북작가 鄭鍾汝의 모습이 떠오른다.
⊙ 自由를 찾아 월남한 화가보다 思想을 좇아간 화가가 절대적으로 많아
⊙ 일엽 스님의 아들 金泰伸, 황해도 가족 만나러 갔다 붙잡혀 스탈린과 金日成 초상화 그려
⊙ 미술사학자 金瑢俊, 6·25전쟁 때 교사들 이끌고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세워
⊙ 金學洙, 스승 卞寬植이 남기고 간 밑그림에 채색 그려 넣어 生計 어려웠던 스승의 유족을 도와
⊙ 李快大,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남녘 가족에게 눈물 겨운 편지… 포로 교환 때 北行을 선택
⊙ 林群鴻, 전주에서 월북한 鄭昌模를 지도하다 청진으로 쫓겨가
梁國柱
⊙ 1949년 출생. 경신고, 연세대 철학과 및 同대학원 졸업.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현재 분쟁지역과 재난지역을 돕는 국제 NGO Serving the Nations 대표
1988년 10월, 한국 정부가 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解禁)을 발표하자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은 “월북 작가들은 광복과 6·25전쟁을 맞아 남쪽에 넘쳐나는 작가들 사이에서 출세하기가 어렵다 보니 먹고살기 위해 월북을 감행했던 ‘생계형 작가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운보의 생각대로 과연 이들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월북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이들 가운데 의용군에 강제 편성돼 끌려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이끌려 서울 제작소에서 강제적으로 김일성(金日成)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부역을 했던 사실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건너간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황해도 가족을 만나러 들어갔다 붙잡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던 김태신(金泰伸·일엽 스님의 아들)의 기록, <라훌라의 사모곡>에도 불가피한 대목이 엿보인다. 당시의 정세가 밤낮이 다르다 보니 화가들 역시 어느 편에 줄을 서야 할지 막막한 형편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친일(親日) 인사 척결과 관련해 이러한 원칙을 적용한다면 운보 자신이나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역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친일 행위를 한 게 아니라 출세를 위해 화업(畵業)을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 미술사>와 <근원수필>을 집필한 미술사학자 김용준(金瑢俊)이 북한군이 퇴각할 때 교사들을 단체로 인솔해 월북했다가 이들을 모체로 ‘평양미술대학’을 세웠다.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 길진섭(吉鎭燮)이나 김용준, 최초로 서양조각을 한국에 도입한 김복진(金復鎭) 같이 프롤레타리아 조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사람들에게는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과감히 북을 선택했던 리쾌대(李快大)와 함창연(咸昌然)은 진심으로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화가들로 보인다.
김주경(金周經)과 리석호(李碩鎬), 정종여(鄭鍾汝), 리순종(李純鍾)이 평양미술대학에서 오랫동안 후진을 양성하면서 외풍(外風)에 덜 시달린 반면, 창작 작가들은 아무래도 자신의 창작활동을 표현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두드러지게 칭찬도 비판도 받았다.
후일 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위원장을 지낸 구본영(具本英)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지리산에서 암약(暗躍)하던 남부군 빨치산을 위해 출판 일을 거들었던 오지호(吳之湖·예술원 원로회원 역임)는 1937년 경기중학 교사 시절 도쿄미술학교 동창인 김주경과 함께 ‘2인 화집(畵集)’을 냈고, 1946년 광복 직후 남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그해 10월 입북(入北)해 평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대학으로 승격되자 1958년도까지 초대 학장을 맡았다. 그는 1947년에 열린 첫 번째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전적’이라는 유화(油畵)로 1등상을 받았다.
오지호는 오늘 북한이 사용하는 국기(國旗)와 휘장(徽章)도 도안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북한 내에서 전남 화순 출신의 오지호에 대한 반응도 고암 이응로(顧菴 李應魯)처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응로는 1987년 부인 박인경(朴仁景)과 평양에서 전시를 하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가 죽기 한 해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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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모, 항일 유격대를 그린 <북만의 봄>, 1962년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말에 물을 먹이는 여성유격대원은 정창모의 여동생을 모델로 했다. |
越北화가 숫자 훨씬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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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용이 그린 <김용준 초상>, 1953년작. 필자 소장. |
북(北)에서 남(南)으로 내려와 활동했던 이들은 권옥연(權玉淵·함남 함흥) 전 서울대 교수, 고(故) 김영주(金榮注·강원 회양) 출판미술가협회장, 김창열(金昌烈·평남 맹산) 판화가, 김흥수(金興洙·함남 함흥) 전 서울대 교수, 고 도상봉(都相鳳·함남 홍원) 숙명여대 교수, 고 박고석(朴古石·평양) 세종대 교수 등이 있다.
김기창 화백의 부인으로 ‘신사임당’ 초상을 그린 고 박래현(朴崍賢·평양) 성신여사대 교수, 고 박영선(朴泳善·평양) 중앙대 교수, 고 박항섭(朴恒燮·황해 장연) 서라벌예대 교수, 고 손응성(孫應星·강원 평강) 홍익대 교수, 고 이달주(李達周·황해 연백) 화백, 고 이중섭(李仲燮·평양) 화백, 유경채(柳景埰·황해 해주) 서울대 교수, 고 윤중식(尹重植·평양) 홍익대 교수, 장리석(張利錫·평양) 한국미술협회 고문, 고 최영림(崔榮林·평양) 중앙대 명예교수, 한묵(韓默·강원 고성) 전 홍익대 교수, 고 함대정(咸大正·평북 박천) 재불화가, ‘장미의 화가’로 불린 고 황염수(黃廉秀) 화백, 황유엽(黃瑜燁·평남 대동) 전 중앙대 교수, 홍종명(洪鍾鳴·평양) 전 숭의여대 학장도 월남한 작가들이다.
반면 남쪽 출신으로 월북(越北)한 작가들은 구본영(서울), 김규동(공주), 김기만(서울), 김만형(개성), 김복진(부산, 조각), 김삼록(경기 이천), 김순영(전남 장성), 김용준(경북 선산), 김종렬(의정부), 김종수(서울, 조각), 김주경(진천) 등이 있다.
또 김규동의 아들인 김주현(서울)을 비롯해 김장한(공주), 김재흥(광주), 리국전(조각, 충남 당진), 리석호(안성), 리순종(대구), 리지원(청원), 리팔찬(공주), 리쾌대(칠곡), 리한복(충남 전의), 리한조(서울), 박경희(평택), 박래천(충남 금산), 박문원(서울), 박상락(경북 청도), 박승구(수원, 조각), 배운성(서울), 서돈학(대구), 송영백(서울, 조각가), 안상목(경남 창원), 엄도만(서울), 이건영(서울), 임군홍(서울), 윤좌선(서울), 조규봉(인천, 조각), 조정구(서울, 조각), 지달승(단양), 정종여(거창), 정창모(전주), 정현웅(서울), 장만희(거창), 장성민(강화), 장재식(대구), 최남택(충주), 최재덕(산청), 최창식(홍성), 최도렬(울진), 표세종(목포), 한명렬(전북 익산), 황영준(옥천), 황태년(제주), 홍종원(인천), 현규명(서울), 현충섭(경기 포천) 등도 월북 화가들이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화가보다는 사상(思想)을 좇아간 화가가 절대적으로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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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순종의 <타향살이>, 1960년작. 필자 소장. |
裵雲成, 홍익대 미술부장 시절 사회주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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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15일 북한의 인민화가인 오빠 정창모(왼쪽)씨를 만난 춘희, 남희씨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1900년 서울 명륜동에서 출생한 배운성(裵雲成)은 파리가 히틀러에 의해 강점당하자 19년간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자신의 회화연구소를 비밀 아지트로 제공하고 홍익대학 미술학부장 자리를 합법적인 사회주의 투쟁의 방패로 삼았다.
특히 그는 수차례에 걸친 전시회를 통해 조성한 자금 50만환을 ‘혁명 투쟁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50년 화력(畵歷) 기간 제작한 작품이 무려 3000여 점에 이르렀음에도 말년에는 신의주로 쫓겨가 1978년 고단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가 신의주로 쫓겨간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독일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때문이다. 배운성의 딸은 아버지가 북한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유럽의 북한 공관을 찾아다니며 “아버지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북한 당국은 배운성을 지방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답변한 것이다.
배재중학을 다니다 그림 공부를 위해 중퇴하고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던 정관 김복진(井觀 金復鎭)은 1925년에 창설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예술동맹(KAPF)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그는 이 나라 조각가의 효시(嚆矢)가 되었던 사람으로 소설가 김팔봉(金八峰)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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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홍명희)와 근원(김용준)>, 1948년작. 밀알 갤러리 소장. 벽초는 1948년 4월 19일에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했으나, 김두봉과 함께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그림은 벽초가 평양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을 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
이제창(李濟昶), 이서구(李瑞求), 박승목(朴勝木), 조택원(趙澤元)과 더불어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기도 했고, 저항하는 인민들의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그의 조각 작품에 담기도 했다. 속리산 법주사의 입상(立像) 대(大)석불을 제작하던 중에도 누드 모델을 소재로 인체 조각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미술인들을 위해 옷 벗어줄 모델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당시 조선사회 분위기로 누드 모델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더러는 요정(料亭)에 매파(媒婆)를 넣거나 권번(券番) 기생을 유혹해 모델로 삼았지만, 김복진은 러시아 모델을 구하거나 도쿄의 소개소를 통해 모델을 조달해 오기까지 했다. 배고픈 인민의 밑바닥 삶과 작가의 욕망은 다른 것일까?
프롤레타리아 전위 조각가로 이름 날리던 그의 파격과 배부른 씀씀이는 부르주아 못지않았다. 김복진은 광복을 네 해 앞두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의 흉상을 제작했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소설가로 활약하던 벽초는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1948년 38선을 넘었다. 그가 저술했던 소설 <임꺽정>이 한국에서 다시 출판되고 보니 좌우를 뛰어넘어 폭넓게 존경받던 벽초의 인물됨이 새삼 크게 느껴진다.
김복진이나 김용준 모두가 흠모했던 벽초. 1948년 5월 23일, 벽초를 방문했던 감동을 김용준은 그림으로 남겨 두 사람의 맛깔스런 해후(邂逅)를 통해 민족사의 아픔을 귀동냥으로나마 엿듣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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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촌 김학수가 1900년 초 평양 대동강 모습을 그린 그림. 필자 소장. |
金學洙, 평생 獨身으로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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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 김유택이 1956년 82세 때 그린 작품. 필자 소장. |
정현웅(鄭玄雄)은 1935년 <동아일보>에 취직했으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폐간되자 <조선일보>로 옮겨 광복할 때까지 근 10년 동안 삽화 그리는 일을 맡았다. 그는 북에서 1952년부터 1963년까지 10년이 넘도록 <물질문화 유물보존 위원회>의 제작사업부를 총괄했다.
옛 그림을 모사(模寫)하는 사업으로, 그는 안악(安岳)고분, 강서(江西)고분, 개성 공민왕릉의 벽화를 모사했다. 무덤 벽화 보존 작업으로 북한 내에는 역사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정현웅이 고구려 벽화 재현에 기울인 경험을 살려 훗날 ‘거란전쟁’ 같은 대형 그림도 남길 수 있었다.
2009년 혜촌 김학수(惠村 金學洙)가 타계한 이후 화단에는 안타깝게도 역사화를 이을 재목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혜촌은 평양에서 수암 김유택(守巖 金有澤)에게 문인화를 배우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당으로부터 채색화를, 소정(小亭) 변관식에게는 산수화를 배웠다.
소정이 죽고 난 후, 사람 좋은 혜촌이 소정이 남기고 간 밑그림에 채색을 넣어 생계(生計)가 어려웠던 유족을 도왔던 일은 ‘비밀’에 속한다. 그러나 평생 역사화를 그려온 혜촌의 삶은 더 이상 그와 같은 열정과 사명을 가진 화가를 길러내지 못했다.
세상이 그런 ‘박물관적’인 그림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거니와 역사화가 시속(時俗)의 명예와 거리가 멀었던 탓이다. 돈 되는 곳에 몰리는 젊은 작가들을 탓할 수야 없지만 나라로 보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타고난 성품이 올곧았던 혜촌은 북에 두고 온 부인과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에 평생을 독신(獨身)으로 살았다. 특히 이북에서 내려와 홀로 된 젊은이들을 제 자식인 양 키워냈고, 그 숫자만 30여 명에 이르렀다.
남편이 월남하자 백두산 아랫마을 혜산(惠山)으로 쫓겨가 망부가(亡夫歌)를 부르며 60여 년을 살던 아내가 죽었다는 비보(悲報)를 자신의 91세 생일날 전해 들은 혜촌은 혼절했다. 그는 쓰러진 지 사흘 만에 부인 곁으로 갔다. 무릇 남과 북으로 갈려 산 이들의 삶에는 냉기 서린 백두산 폭포보다 길고 긴 대동강 물이 서러운 눈물인 양 흘러내린 셈이다.
평양에서 혜촌을 가르쳤던 수암의 문인화를 발견했을 때, 필자는 큰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고고함과 농염(濃艶)하게 무르익은 철학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실은 혜촌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필자의 속내가 더 컸다. 어른과 나눈 온정을 수암의 그림으로 나누려 했던 내 작은 소망조차 혜촌의 죽음으로 덧없이 끝나고 말았다.
6·25 이전 9만 점의 스탈린·김일성 초상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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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자화상>. 1978년작. 필자 소장. |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북녘땅을 재건해야 했던 북한은 인민들을 독려할 ‘선전화(宣傳畵)’가 필요했다. 6·25전쟁 전에도 민족 해방의 은인이라며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무려 9만 점이나 그렸고, 1946년 한 해에만 25만 점의 선전화를 그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건설 노동자와 집단 농장의 생산성 확대를 위해 ‘건설적 혁명 투쟁’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고, 보다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화가를 광산이나 농어촌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평양 출신의 문학수(文學洙)나 길진섭, 한상익(韓相益), 라찬근 등 일본에서 화려한 그림 수업과 좌익활동에 스스로 몸을 던졌던 이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방으로 유배되는 유랑의 삶을 살았다.
이중섭의 2년 선배였던 라찬근은 1961년 이후 개성에 있다가 다시 양강도 등 변방으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됐다. ‘창작(創作)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인민대중의 감정과 정서에 맞도록 사실주의 묘사 방법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지 못했다’는 죄목(罪目)도 붙었다.
가와바타와 문화학원 두 곳에서 미술수업을 받았던 탓일까? 흔치 않은 학력을 가졌던 문학수는 머릿속에 들어 있던 부르주아 낭만적 사고를 개조하는 데 오랜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는 광복 후 15년 가까이 고통받는 인민들의 모순된 사회 현실과 거리가 먼 풍속적이거나 동물적인 주제의 내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당시 유럽 등지에서 유행하던 추상주의 미술 경향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문학수의 시도는 현실도피적이며 환상적인 형상으로 몰리고, 부르주아 형식주의의 잔재(殘滓)로 비판받았다.
그는 1959년 북한 전역의 혁명전적지 등을 돌며 보다 영웅적이고 전투적인 주제를 학습해야 했다. 5개월간의 고행길에 그가 그려낸 작품이 무려 400여 점의 유화, 수채화, 연필화로 남았다.
이 ‘고난의 행군’으로 얻어진 작품들을 모아 정관철(鄭寬徹)과 1962년에 ‘2인전’을 열었다. 문학수가 허허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생존을 위한 위기에서 구제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쪽에서 올라온 작가들은 노동당에 대한 충성도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열망에 미치지 못했던지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방으로 보내 혁명화 학습을 하도록 했다. 일종의 유배(流配)인 셈이다.
李快大의 눈물겨운 포로수용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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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쾌대, <사과 따는 처녀>, 1963년작. 본갤러리 소장. |
1940년대 인물화로 가장 주목받았던 사람은 단연 리쾌대였다. 이중섭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수근(朴壽根)보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던 리쾌대. 가난한 시대 이중섭이 세간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불행한 삶을 마감할 무렵, 북행(北行)을 감행했던 리쾌대는 어떠했던가?
경북 칠곡 태생인 그는 광복 직후부터 조규봉(曺圭奉, 조각가), 리석호 등과 좌익 활동을 해왔다. 리쾌대가 의용군에 입대하고 국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에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는 오늘까지도 읽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수용소에 있습니다.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없소이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내 맘은 지금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현란한 채색화가의 꿈같은 열망도 굶주린 가족의 신음 앞에는 무력했던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제도에서 북행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더 강했던 것일까?
리쾌대는 자강도 지방에서 현역 미술가로 활동하던 1957년, 서울에서 가르쳤던 제자 이병효의 중매로 재혼했다. 리쾌대는 철직(유배)을 당해 지방에 머무를 때 영화 촬영을 위해 자강도 지역을 방문한 여배우를 모델로 <사과 따는 처녀>를 그렸다.
1963년 작품이니 그가 죽기 2년 전이다. 화구(畵具)나 채색이 변변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1961년에 남겼던 작품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이후에 남긴 리쾌대의 또 다른 흔적을 볼 수 있다.
林群鴻, 월북한 鄭昌模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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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화가 리쾌대.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남쪽의 가족을 애타게 그렸으나, 그는 결국 북행을 하고 말았다. |
워낙 그의 작품은 과작(寡作)이었다. 그나마도 유물로 남은 것은 힘깨나 쓰던 작가들이 “연구용으로 가져간다”며 권력자들에게 바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평양 권력층 인사들이 앞다투어 리쾌대의 작품을 선호한 것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한때 리쾌대는 북한 내에서 ‘기피인물’이었다. 운봉 리재현이 펴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의 첫 번째 책에는 리쾌대에 대한 언급이 전무했다. 리쾌대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두 번째 발간본에 나타난 기록에도 아무런 미사여구(美辭麗句)나 당에 대해 기여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리쾌대가 전후(戰後) 건설 시기 당의 강령(綱領)이나 문예(文藝) 방침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듯싶다. 조선 최고의 작가 리쾌대는 죽어서도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보다.
평양미술대학을 세우고 학장직에서 물러난 김주경도 강원도 평강 국영농장에서 수년간 농촌현실을 체험하는 혹독한 연단을 받았다. 오랫동안 관리직에 있으면서 책상머리에서 굳어진 김주경의 ‘형식주의적 사고’를 개조시키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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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형, <작품명 미상> 1978년작. 본갤러리 소장. |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미술제작소 소장을 맡았던 김만형(金晩炯)은 북으로 들어가 조선미술제작소의 회화조각부장을 지냈다. 1958년 이후 함흥과 청진 등 변방을 돌며 함경도 내 미술과 창작 조직을 담당하는 명목으로 떠돌이 생활를 해야 했다.
개성 출신인 그가 경기고를 졸업하고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리쾌대, 최재덕(崔載德)과 동인활동을 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북으로 전향했다.
1948년 길진섭이 월북한 이후 길진섭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길진섭에게 경고함’이라는 글까지 발표했던 김만형은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을 돕다 본인이 월북행 열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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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군홍, <겨울>. 밀알갤러리 소장. |
서울 출신 구본영이 1963년 이후 평안북도 미술가동맹위원장을 맡았던 10년 동안 배운성과 최연해(崔淵海), 김평국(金平國)이 이 지역으로 쫓겨와 몸을 의탁했다. 최도열(崔道烈)도 흥남 비료공장에 들어가 어려운 체험을 했다. 1960년 이래 그는 자강도에 머물며 자신의 슬픈 영혼을 그림에 담았다.
6·25 이후 개성에 정착했던 림군홍(林群鴻) 역시 개성 미술가동맹위원장을 지내면서 전주에서 월북한 정창모를 지도하다 1962년에 함경북도 청진으로 쫓겨갔다.
‘낡고 고루한 관습에 매달려 조국 해방의 엄연한 현실을 올바로 그려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를 함경도 최북단으로 쫓아냈던 것은 ‘인민의 투쟁적 삶을 깊이 있게 체험하라’는 의도인 셈이다. 온성군의 ‘왕재산혁명박물관’과 ‘조국해방 전승기념관’에 있는 전쟁 주제화가 림군홍의 작품이다.
노동자 삶을 살았던 화가들
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맡아 작가들을 독려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길진섭은 ‘현실 침투 조직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강선제강소와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동일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952년 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을 맡았던 김익성(서울) 역시 1955년부터 4년 동안 황해도 제철소에서 사상 개조 훈련을 받았다. 서울 마포 태생으로 중국 심양에서 국숫집 배달부로 일하면서 자란 김익성이 ‘현실은 사색(思索)도 열정도 안겨주는 창작의 무궁한 원천’이라고 외친 그의 말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1963년에 다시 함경북도로 좌천됐다.
충주 출신의 조각가 최남택은 전후 복구 사업의 명분으로 희천(熙川)과 명간(明澗)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 남로당 출신의 북행 인사들이나 정치 투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삶 이상으로 북으로 옮겨 살았던 작가들 역시 부침(浮沈)도 많았고, 사상 개조 작업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탁원길과 조인규, 림백, 리운사와 황태년 등이 공장과 기업소를 돌며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려야 했던 지난날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
鄭昌模의 남녘 나들이
전주 출신 정창모는 2000년 이산가족 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여동생들을 만났다. 6·25전쟁 기간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던 그의 나들이는 여러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북한에서 ‘인민 예술가’라는 독보적인 영예를 누리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던 터라 그의 귀환은 이래저래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그의 작품 여백(餘白)에 북한 당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화제(畵題)를 적어넣었던 것이다.
“철새는 자유로이 이 강산을 날아다닌다/핏줄도 하나 조국도 하나인 우리/힘모아 장벽을 깨뜨릴 제/자유로이 마음 놓고 오고갈 날 있으리.”
화제로 써 붙였던 시구가 인터넷상에 떠오르며 그가 ‘반동작가’라도 된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정창모는 인민군에서 제대한 후 개성의 미술가동맹 야간 연구소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1961년 개성시 지부장을 맡았던 림군홍이 정창모를 가르쳤다.
서울 출신인 림군홍이 남쪽 출신의 청년에게 도화지와 연필, 수채화 도구를 챙겨주는 등 각별히 보살펴 주었다. 정창모가 평안북도 용천(龍川)에 있던 평양미술대학에 뒤늦은 나이에 진학해 담임이었던 김장한과 정종여에게서 아주 특별한 고임을 받았던 것은 이미 본인의 술회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공주 출신 김장한이나 거창 출신 정종여, 안성 출신 리석호가 정창모를 좋은 재목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정종여는 남포 바닷가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 정창모에게 아끼느라 숨겨두었던 벽지를 꺼내 그에 대한 ‘속정’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떠난 이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동토(凍土)의 땅에서 정창모 같은 작가를 배출한 셈이다.
정창모가 정종여의 배려로 1962년에 그린 그림 <북만의 봄>은 이후 ‘9차 국가 미술 전람회’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고, 북한에서는 보기 드물게 20전짜리 우표로 제작되기도 했다. 항일 유격대의 애잔한 삶을 그린 <북만의 봄>에는 고향 전주에 남았던 여동생의 모습을 유격대원으로 그려 넣어 이산의 아픔을 달래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리석호와 정종여, 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조선화의 혈맥(血脈)을 대물림한 정창모의 탁월한 예술 혼이 느껴진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역을 연고로 피어난 애절한 꽃이 정창모다.
1988년에 그린 <장벽을 넘는 철새들>마냥 외로웠던 자신의 신세를 북한으로 들어와 누리는 행복과 비교해 ‘창몽’으로 호를 지었다. 정창모의 아호처럼 인생사 모든 게 뜬구름 같은 것일까?
‘선전(鮮展)’에서 여러 차례 특선했던 향당 백윤문(香塘 白潤文)이 원인 모를 정신질환에 시달려 35년 동안 어려움을 겪게 됐고, 운보는 난청(難聽)으로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지만, 이순신 초상화를 그린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은 사사건건 스승인 이당과 경쟁심을 보였다.
李碩鎬와 鄭鍾汝
리석호는 안성 출신으로 이당 문하의 ‘후소회(後素會)’ 회원이면서도 심전 안중식(心田 安仲植)과 춘곡 고희동(春谷 高熙東)이 조직한 ‘서화협회’에 출품도 하곤 했다. 서화협회는 조선 최초의 미술 관련 단체다. 리석호는 이당 김은호에게 있어 언제나 변함없는 제자이면서 든든한 원군(援軍)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하던 때, 이당은 “리석호가 공산당 활동에 깊이 연루됐다”는 말로 애제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당의 <서화백년>이란 글이 일간지에 연재되던 1976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월북한 일관에 대한 속내를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일관 리석호는 실제 사상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한 것뿐 아니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보화각에 수장돼 있던 골동품과 고서화를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공화당 의원 역임)과 최순우(崔淳雨·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의 기지(機智)로 북으로 가져가지 못한 일화도 있다.
스승 이당의 친일적 행위에 비판적이었던 리석호는 스승과 절교(絶交)를 했던 상황이었다. 광복 후 북으로 가기 전 정종여와 이응로 등과 함께 전시를 했다. 북으로 간 이래, 그는 조선국가미술전람회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고,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전람회’에서도 1등상을 받았다.
김일성은 정관철과 리석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남쪽 출신으로 김일성의 고임을 받았던 화가는 리석호가 유일무이(唯一無二)했던 것 같다. 북으로 건너간 리석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가 함남 함주(咸州) 출신의 김병희를 제자 삼아 그에게 화업을 계승토록 했다.
리석호는 김병희를 4년간 직접 가르치고 키웠다. 노(老) 화가가 젊은 김병희의 자질을 높게 산 것이다. 김병희는 어머니가 군대 가는 것을 막을까 봐 자신의 초상 그림 한 점을 남기고 군대로 떠났다. 자식이 군대 가는 것을 말리는 것은 북이나 남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경상도 거창 출신으로 배재중학 선생으로 있으면서 월북하기 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이가 청계 정종여(靑谿 鄭鍾汝)다. 한때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으로 리석호와 더불어 북한 미술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계는 월북하기 전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 그도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은 숨길 수 없었던가 보다.
그가 평소에 즐겨 그린 ‘외로운 참새 한 마리’는 정종여 그 자신이다. 화폭의 한쪽에 다섯 마리를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금단의 울타리 저편에 외로운 참새 한 마리를 배치한 것을 볼 때마다 월북작가 정종여의 모습이 떠오른다.
평소 고향인 거창 인근 해인사 풍경을 즐겨 그렸던 그는 겉으로 활달한 모양새와는 달리 내성적인 구석도 많았던 듯싶다. 그는 이미 북으로 떠날 생각을 굳혔던지, 1947년 해인사를 찾아 한 달간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여관 주인이 한 달간의 숙식비로 100호짜리 그림을 받았던 모양이다. 화가를 귀히 여기던 여관 주인도 고맙지만 청계 정종여의 넉넉함이 묻어 나온다. 월북하기 전의 일이다.
6·25 때 총살당한 金振宇의 행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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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석호, <소나무>. 필자 소장. |
북행 작가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김진우(金振宇)가 행방불명된 이후의 행적을 발견한 것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김진우는 금강산인(金剛山人) 혹은 일주(一洲)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1883년생인 그는 제천탄광에서 일하다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 무렵, 30세를 전후한 나이에 그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으로부터 글과 그림을 배웠다.
1921년 상해와 중국 지역을 여행한 후 신의주에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본인은 정치나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하면서 재판에 대한 이의 신청을 했으나 기각당했다.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정(臨政)의 강원도 대표로 잠시 이름을 올린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묵죽(墨竹·먹으로 그린 대나무) 가운데 흩날리는 바람결에 흐트러지지 않는 풍죽(風竹)을 즐겨 그렸던 그는 감옥에서 참대나무를 그렸고, 김복진은 불상(佛像)을 제작했다.
일주 김진우는 15회 서화협회전이 열린 1936년에 작품을 출품한 기록이 보인다.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평전에는 광복 직후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을 도와 건국준비위원회 일을 보던 일주가 몽양과 심산의 합작을 위해 애썼던 기록이 나온다.
몽양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자금 조달을 돕기도 했던 일주는 결국 정부 수립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6·25전쟁이 터지자 이내 총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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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여, 1957년작. 필자 소장. |
그런 이유에서인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일주의 대나무 그림 80여 점이 수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학사(東鶴寺) 조실(祖室)을 지낸 옥봉(玉峰) 비구니가 유일한 제자로 여전히 왕죽(王竹)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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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 김진우의 수묵화 작품.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독의 양녀였던 배정자(裵貞子)는 일제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던 밀정(密偵)이었다. 한때 그녀가 정동에 살면서 일주를 회유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마침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간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에게 봉변을 당했지만, ㅋ일주와 만해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됐던 것 같다.
일주는 나이 30에 그림을 공부했으나, 그의 직관(直觀)과 필묵(筆墨)은 예리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이당의 <서화백년>을 보면, 일주는 배정자 같은 여자와 속 모를 교제도 했고, 신의주 ‘우신여관’ 주인이었던 강계(江界) 여자와의 농염한 러브스토리도 있다.
38세의 강계 미인(美人)이 새벽마다 이당의 방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담가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당은 자신의 <서화백년>에서 “그 여관 주인의 유혹을 3개월이나 버텨냈다”고 강변하곤 했다.
이당은 짓궂게도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면서도, “일주는 이 여자의 술책(術策)에 놀아나 몸은 물론, 열심히 그림까지 그려 바쳤다”며 치기(稚氣) 어린 고발을 하고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일주가 이당의 친일행각을 못마땅히 여긴 것을, 이당이 여자 문제로 일주에게 ‘복수’한 셈이다.
일주의 주색잡기(酒色雜技)를 훗날 조선미술 야사(野史)에 넣은 이당의 단견(短見)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당은 여자의 뇌쇄적 몸매에서 욕구를 느끼지 못했지만, 일주는 이성과의 농염한 욕정 때문에 자신의 그림 세계를 그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는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와 일주의 그림만이 고즈넉한 만해의 너그러운 마음을 대신 전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