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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1장 1-14절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대상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리고 사도로 부르신 자신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오늘 본문까지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나타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없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부활하셔서 그 날 저녁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날을 포함하여 여드레를 지나서 다시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복음 사역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복음 사역의 핵심은 죄 사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던 겁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그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포함합니다. 사도들의 사명은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가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고 그를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 이것이 사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성경의 기록 목적이기도 합니다. 왜 성경이 기록되었는가?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지만 왜 사도 요한은 이것만을 기록했는가? 사도 요한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네 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왜 많은 내용들 가운데 일부만을 기록했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는 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는데, 그리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구약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할 때 구약 자체만으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시가 다 기록의 형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기록된 그 말씀만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는 데 충분하고, 그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는데(14),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마치 자신의 본업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일단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이셨지만, 장소를 옮겨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신 일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이때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 모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만 있었습니다. 특히 도마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이미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다른 제자들이 주를 보았다고 할 때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한 사람입니다(요20:25).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요20:27). 그리고 그렇게 주를 보고 확인했을 때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바 있습니다(요20:28). 이것은 단지 그의 고백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나아가기보다는 일부 제자들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본업인 어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물론 사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정확하게 인식했는가? 그렇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지상 나라에 대한 회복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3).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있었습니다(행1:6).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인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지만, 여전히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자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의 가시적인 역사가 나타나 깨닫게 하시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상태에서 결국 자신들이 해 오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셨지만, 주님을 배반한 그 사실이 그들 마음에 너무나도 크게 자리하고 있어서 감히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어서 결국 자신들이 해 오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가? 그들은 어부 출신입니다. 언제 물고기를 잡으러 가야 잘 잡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항상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부르시는 사건과 흡사합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에 채웠을 때 잠기게 될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는 일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누가복음 5장의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일이라면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연단하기도 하십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평소 잡히던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도 하십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 가운데 뭔가 막히는 듯한 일을 주기도 하십니다. 평탄함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탄함 가운데 어떤 어려움을 주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어려움, 막히는 일들을 왜 허락하시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한 예이지만 만약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성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자신의 일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열심, 자신의 근면성, 자신의 실력에 돌리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은 늘 자기를 향합니다. 오죽하면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가 무죄의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겠습니까? 그만큼 자기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에게 하나님은 모든 복이, 모든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늘 성공으로만 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공하다가도 실패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물론 인간의 완악함이란 한번의 실패에 대하여 실수라고만 생각하는 버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한번의 실패가 우리의 실수가 아니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즉 실패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모든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자신의 섭리 안에 두셨다고 할 때 왜 교회 역사 안에 수없이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 자체는 늘 한결같습니다. 진리가 변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진리라도 이단의 가르침을 반박하면서 진리가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 결과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평탄하게만 하시지 않고, 어렵고 힘들게도 하시며, 오늘 본문처럼 허탕을 치게도 만드십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4절 이하 6절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날이 새어갈 때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결국 밤새도록 그물을 올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기를 있는지를 물으셨고, 없다고 했을 때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습니다.
일단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면에서 낯선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이런 내용은 신기한 일입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쳤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던져 보고 저기도 던져 보았지만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잡는다고 할 때 누가 낯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낯선 사람의 말에 따라 그물을 던졌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누가복음 5장에서 경험한 일을 떠올리게 만들고자 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그들 마음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마음으로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던져보자는 마음으로 던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서 던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던지 결과 그들은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고,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할 때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난 뒤 디베랴 호수, 유대인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그곳에 뛰어 내리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사도 요한이 주님이라고 하는 말에 주님을 좀 더 빨리 뵙기 위해 그나마 복장을 갖추고서 배에서 뛰어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서를 통해 종종 확인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체가 없다고 하자 곧바로 달려갔던 것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잡아가지 못하도록 칼을 빼 들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린 것도 베드로입니다. 어떤 면에서 열정만큼은 베드로를 따라 올 사람이 없습니다. 행동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다혈질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도 요한이 주님이라고 하자마자 주님을 뵙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던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배와 육지의 거리가 불과 오십 칸쯤 된다는 것은 100m가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베드로는 헤엄을 쳐서 온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온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목적으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10절과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을 때 낯선 사람의 말,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을 때 놀라울 정도로 많이 잡았던 겁니다. 결국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로 하자면 예수님의 표적 중 하나인 것이고,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을 위해 이 내용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12절 이하 1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9절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다는 것이고, 그들이 잡은 생선을 조금 가지고 오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떡을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임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떡을 주시고 생선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떠올리게 합니까? 생선을 잡는 일을 통해 우리는 누가복음 5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면, 떡을 주시고 생선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는 요한복음 6장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 전체가 다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오병이어만이 아니라 칠병이어 사건도 기록하고 있는데, 모든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6장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가? 오병이어 사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여차여차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지난 시간에 살핀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언한 그리스도가 예수시라는 것,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 표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오병이어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통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는데, 왜 찾아다녔는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병이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경험한바 되었지만 그것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먹고 배부른 까닭에,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고,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는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체의 모든 일을 금하시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양식을 위하여 정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을 세상 임금으로 삼고 단지 육체의 필요만을 위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 치신 것이고, 그런 만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만을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럼 그 양식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모세를 통해 주신 만나에 대한 내용도 나오지만 만나든, 오병이어든 주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즉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침을 받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40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한때 성찬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식인종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실제로 그의 몸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먹고 마신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 사람에게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성찬이라고 알려진 내용을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게 되는데, 47절 이하를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47-51)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52절에 보면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3-58)
결국 오병이어의 핵심은 어디 있는가? 단지 육체의 필요만 채우신다는 것에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3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주린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만나 사건의 핵심도 동일합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먹이시는 것은 만나입니다. 광야 40년을 살면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떡을 분명히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산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만나를 먹어서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무엇이 없으면 살았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지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떡과 생선을 준비하여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이런 요한복음 6장의 가르침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고, 그 떡을 먹지 않으면, 그 떡을 취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를 참되게 믿지 않으면 결코 영생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오늘 본문이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와 그의 동료를 부르시는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5:10)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5:11).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부터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주를 버렸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금 나타나셨고, 또한 그들에게 사명까지 주셨지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은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처음 부르실 때의 그 부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이 단지 어부로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취하는 것임을 상기시키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임을 오병이어 사건을 상기시킴으로 다시금 저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사명이라고 할 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의 모든 소명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썩을 양식을 위한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성도와 교회의 소명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먹을 것 없다고, 마실 것 없다고, 먹을 것과 마실 것 주면 더 좋은 것 없다고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 아닙니까? 예수님 시대 표적을 본 다수가 그러했던 것 아닙니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그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떡을 안 주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입을 것도 주십니다. 주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착각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는 것은 그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신명기 8장 3절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역으로 욥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주신 것을 거두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실 때도 주신 분을 기억하도록 할 목적을 주신 것이라면, 거두실 때도 거두시는 분을 기억하도록 할 목적으로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사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 그가 신자요 성도인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성실함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 없이, 말씀 없이 사는 것은 결국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기에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새해 첫 주일이 시작되었는데, 다시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사도들의 사명을 따로 교회가 주께서 주신 소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주의 소명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살아가고 있는가? 신명기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고 마시는 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 해의 시작만이 아니라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이러한 주의 말씀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