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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수필의 구심력과 원심력
- 정차현의 수필집 <바람각시> 발간에 부쳐 -
권대근
문학박사, 비평가
I. 열며
하버드대학의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여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견문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이다. 삶은 벅찰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정차현은 수필반 문우들과의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문필과 자신을 하나로 묶고, 열정적으로 수필 창작에 몰두해왔다. 정차현 수필은 온고이지신 사상을 담고 있다. 설리와 교설을 통한 과거와 현재의 인연맺기다. 이는 풍부한 독서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현재라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과거의 동양사상을 끝없이 연구한다. 그 둥지의 실체는 한국적 수필에의 천착이다. 무엇인가에 열렬히 집착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정차현에게 그 대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선비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것이다. 작가가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견고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정차현이 문단에 들어온 지 십여 년 만에 세상에 내어 놓는 ‘첫수필집’은 아마도 예의 실천을 강조하는 전통사상을 돈독히 하는 한국적 수필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동양정신의 구현과 한학의 접맥이라는 나름의 학문적 성과가 있어서 그의 수필은 남다르다고 하겠다. 수필은 제한된 지면 안에 주제를 내면화하고, 문장을 형상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수필에서 교훈성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차현의 수필은 박학다식한 그의 앎을 통해 일정한 교훈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타 수필집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는 정차현의 수필세계, ‘한국적 수필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빠져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II. 왜 한국적 수필인가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정차현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수필가이다. 정차현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무엇보다도 효친의 한국정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정차현의 인문학적 사유가 원심력을 가질 대 나타나는 현상은 계몽의식의 발현이다.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고전의 현장을 누비며 열정을 바치는 사람이다. 세상을 타악기처럼 두드리는 그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은 문학적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무엇인가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한다. 정차현이 한학이나 동양학, 한국학, 민속학 등에 심취하는 것은 구심력이며, 온고이지신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안으로써의 글쓰기는 원심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의 첫수필집인 <바람각시>에는 30여 편의 수필이 실려 있으며, 각 수필마다 작가의 전통에 대한 이해와 민족적 삶의 의식이 담긴 주옥같은 작품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지성적인 마음이다. 그의 글은 삶에 대해 진정한 가치와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며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먼저 내리고 싶다. 수필가 정차현은 한국적인 정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수필가로서의 삶을 긍정하고 삶에 만족하며 산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 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수필다운 수필쓰기가 어렵다고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정차현의 <바람각시>에는 포용력을 가지고, 의젓하게, 배우면서 배운 그대로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모든 후배 작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차현의 수필은 한학 민속학 동양학 등 다양한 영역을 두루 포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한국적 수필로 규정할 수 있는 수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작품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작가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정차현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며 우리 인간들이 각자 전통을 이어받고 민족 얼을 떠받들며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집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여러 작품을 통해 자기 성찰과 만족한 삶의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해박한 지식이 번득임이 따뜻한 서정과 맞물려 감동을 준다.
III. 정차현의 수필세계
1. 한국적 수필의 다채로운 전개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바람각시>는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차현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인간의 문화, 신체적 지각, 개체적으로 독특함이 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한 지각이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와 이상향, 더 나아가서는 공간을 조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온고이지신 사상을 인생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집은 우리 조상의 정신문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여러 수필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어 감동을 준다.
모든 걸 이분법으로만 접근하는 일부 젊은이들이, 사회 원로들을 ‘꼰대’라고 폄하를 한다. 이는 천박한 소인배의 극치가 아닐까. 물론 일부 자기 중심적으로 고집스러운 이들도 있겠다. 그 일부는 아마도 1~2%에 불과하지 않을까 여겨본다. 나는 그 일부에게 논어의 글을 인용하여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즉 “배워야 고루하지 아니 한다.”이다. 비록 몸은 노쇠하나 정신만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드려 유연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래야 변화에서 완급의 방향제시가 가능하지 않을까.
- <꼰대> 중에서 -
정차현은 원래 보여주기 식의 치장과 분식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렇게 정차현은 고매한 인품과 세련된 지성을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한 복판에 서서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를 작품 속에 담아내려고 늘상 노력한다. 좋은 수필은 관조의 눈으로 발견한 것을 인식의 체로 걸러낸 산문으로 쓴 시라고 여기고, 한 알의 보리나 밀에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해 내려고 했다. 이 수필은 제재인 ‘소’를 근대 산업화시대에 있어서 인재 수급의 원인으로 보고, 우리 조상들이 소를 아꼈듯이, 사회원로와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지금은 ‘꼰대’라 부를 때가 아니라 지식과 경륜을 가진 노인을 보배로 여겨야 한다는 논리가 상당히 설득적으로 전개되어 있어 문학성을 견인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항상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제 지향성으로 삼아 인간 탐구라는 큰 틀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등불이 되는 수필 창작에 천착했다. 이 수필은 삶의 근본에 대한 탁월한 사유와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강한 저항의 몸짓을 변치 않는 인생의 궁극적 진리와 좌표로 연결시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작가의 지성이 번득인다고 하겠다.
우리 조선의 역사를 폄하 내지 부정하고자 하던, 일본의 그 야만적 역사 왜곡을 지금도 우리가, 왜 그들 표현대로 받아드려야 하는가. 어찌 ‘이조’란 말인가. ‘조선’이고, ‘조선왕조실록’이겠다. 아직도 우리 역사를 폄하하고자 하는 니들에게 묻겠다. ‘고려’를 ‘왕씨 고려’ 또는 ‘왕고’라 하겠는가. 또한 일본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을 그들은 지금도 욱일기를 내세워‘대동아전쟁’이라 한다. 이는 ‘제이차세계대전’이다. 지금 우리가 일본의 말을 따라야 되겠는가.
- <바로 잡아야 할 명칭들> 중에서 -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다. 작가는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지적 수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는 일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었다. 작가는 글로써 지켜야 할 진실이 있다. 작가는 이런 차원에서 소수자의 길을 택했다고 본다. 언제나 정의 편에 서고, 약자의 편에 서고, 서민의 편에 서고, 지배집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모든 권력에는 항상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오염된 권력을 겨냥하고 부패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조준하는 글을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져 옴을 느낀다. 문학인에게는 이런 역사의 오류를 감시 감독해야 하고, 그늘진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잘못된 풍토를 비판으로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세련된 지성으로 수필에 극일의 메시지를 담아 민족정신을 바른 길을 제시해왔다. 개인의식에서 사회의식으로 승화하는 차원에서 생성되는 수필은 지적 에세이에 접근하기 마련이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지금의 사회현상은, 대체로 우리 예절문화의 근본정신은 혼돈스러워졌다.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먼저 사회의 물질 우선주의 팽배와 기성세대들 모두의 무관심이라 여기며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이 글에서 남의 실수들을 지적질만 많이 했다. 나의 미천한 역량에 한없이 부끄럽기도 하다. 우물 안 개구리도 못되면서 무례한 남취가 아니었나. “사람의 잘못된 버릇은 남의 스승되기를 좋아한다.”라 한 글을 생각해 보았다. 민망스러운 마음이다.
- <상가에서> 중에서 -
정차현의 수필은 한국적 수필에 근접하면서 사회 수필이라는 새로운 분자를 낳고 있다. 정차현의 수필을 읽으면 현대성이 희미해지면서 그의 수필은 클래식한 언어의 문양이 비집고 나옴을 알 수 있다. 어떤 글에서든 한국적 '예절' 정신이 그림자 형상으로 투영되어져 나온다. 공자가 ‘지미’를 통해 중용의 실천을 강조했듯이 작가도 ‘시중’과 ‘능구’ 정신으로 문화시민의 품격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의 일상은 한시도 예를 벗어나 살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대부분 수필에는 무례와 본분을 망각하는 실례가 등장한다. 이럴 테면, ‘부군의 천붕지상을 당해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부인을 타인이 미망인 운운 등이 있다. 혹 상을 당한 부인이 자칭 미망인이라 했다면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등등이다. 사회지도층의 책무', 즉 부나 권력 또는 명예를 갖고 있는 지도층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수신’을 강조하는 것은 정차현의 수필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많은 작품에서 바른 용어 쓰기를 강조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곧 수신을 갖춤은 개인의 인격이며 우리 정신문화의 근본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은 정차현의 줄곧 삶에서 견지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이다.
사우디 건설현장의 검은 면이다. 모 항만 현장에서 근로자들 소요 때 사무실 숙소를 불타게 해 조기 귀국된 일, 작업 중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 몇 몇 순직한 이들, 서울에서 아내 춤바람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경우 등, 모두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우디 건설현장의 일원이었음에 큰 애착심을 갖고 있다. 먼저 우리 사남매 모두 74학년 과정을 마치게 했고, 지금은 사회 일원으로의 몫을 잘 하며 박사도 하나 있다. 이외 내 작은 책방 하나가 곁들인 아늑한 이 집도 사우디의 땀이다. 이때 안내에게 고생시킨 점이 늘 미안할뿐더러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편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작지만 일익을 했다는 자부심과, 35년의 직장을 마친 후 사회에 작게라도 보답하고자, 긍지를 갖고 2002 월드컵대회와 인천 아세안게임의 ‘자원봉사’에 임했다.
- <할라스> 중에서 -
사회 지도층 인사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검소한 삶을 살고 과소비를 하지 않으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지 않고,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작가는 <할라스>에서, “35년의 직장을 마친 후 사회에 작게라도 보답하고자, 긍지를 갖고 2002 월드컵대회와 인천 아세안게임의 ‘자원봉사’에 임했다.”고 적고 있다. 사회 지도층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진다. 작가라면 공인이고 사회 지도층에 속한다. 이처럼 지도층이 포근한 일상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사회를 위해 봉사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정차현 수필이 내세우는 핵심 가치이다. 정차현은 이를 언행일치로 보여주셨다는 데서 독자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스승이다. 그러고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사회지도층의 행동철학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변하면서 사회지도층의 의미도 달라져 왔고 그들의 책무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귀족의 존재가 사라진 지금 노블레스의 자리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왕족의 책무가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책무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스스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세우기 쉽지 않다. 언명과 실천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할라스>란 수필에서 정차현은 “누구든 주어진 일에 깊은 애정을 갖고 근면과 성실을 다 한다면, 자신과 자손의 영광이 함께 할 것이고, 국가발전에 바탕이 된다.‘고 하며 자기 교만의 이기심을 경계해야 함을 내비쳤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불우한 의식을 가진 자’로 규정한다. 지배계급은 지식인을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 다시 말해 불편하더라도 없으면 안 되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반면 피지배계층은 지식인을 지배계층의 앞잡이로 볼 따름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작가는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명예 지상주의를 경계했다. 엘리트라면, 공자의 말씀처럼, 명예란 공기처럼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소동’에서 나를 돌이켜 본다. 90%의 찬성일지라도 반대 입장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역에서 나의 두 번째 말,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야지요.”는 적절하지 못한 큰 말실수다. 나는 요즘 다수결의식에 휩쓸려진 건 아닌지 모른다. 물론 그 분의 액션도 합리적일 수는 없겠다. 이는 오래 전부터 먹어온 우리 토속의 ‘전통음식’이 아닌가. 어떤 사안도 ‘호불호와 찬성과 반대’는 있을 수 있다. 하나 그 표출은 사고와 행동에 ‘균형’을 가져야 하겠다. 현하 우리 사회의 의식현상도 이와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편가르는 모습이 그렇다. 삶의 구조와 의식이 아무리 다변화라 하지만, 공공의 의식이 너무나 희박하다. 우리가 함께 뛸 운동장은 평평함이 같아야 하고, 같이 걸어야 할 길, 또한 다 같은 길을 걷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특히 제도적으로 공정한 기회의 부여는 후세를 위해서도 그렇다 하겠다.
- <홍어소동> 중에서 -
이 글은 인간관계에 대한 내면의식을 지성적인 문장으로 기술했다. 지금은 결과보다도 과정을 중시하는 시대다. 내로남불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는 시대다. 이런 시대적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는 글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차현은 지성인은 깨어 있어야 함을 작품을 통해서 설파한다. 우리 전통 지식인은 선비다. 선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자 하는 말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양산되는 지식인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은 찾기 힘는 게 현실이다. 지배계급에 충성하는 지식인은 많지만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려는 지식인은 몹시 보기 어렵다. 자신이 연마한 지식의 깊이에 자만하며 도전에 몸서리치는 지식인은 흔하지만 타인의 지적이나 충고에 귀 기울이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의 아젠다는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회의하지 못할 정도로 엄정한 정의로움의 기준이 설정되어 있다. ‘우리가 함께 뛸 운동장은 평평함이 같아야 하고, 같이 걸어야 할 길, 또한 다 같은 길을 걷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쾌한 논리의 프로펠러를 달고 정합성의 세계로 질주한다.
매미에게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이 있다고 한, 진나라 시인 ‘육운’의 말이다. 그는 매미를 문, 청, 염, 검, 신 등의 덕이 있다고 말했다. 곧 매미의 곧게 뻗은 긴 입 모양은, 마치 선비가 갓을 맸을 때의 그 끈과 같다 해서 ‘문덕’이라 하였고, 이슬이나 수액만 먹는다 해서 맑음의 ‘청덕’이고, 곡식을 축내지 않아 염치가 있다 하여 ‘염덕’이라 했으며, 저 살 집도 마련하지 않는 검서함의 ‘검덕’이고, 하물을 벗고 죽을 때를 알고 지킴의 ‘신덕’이라 했다.
- <매미의 오덕> 중에서 -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걷잡을 수 없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오늘의 현대만큼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도처의 여러 요인들이 이러한 대격변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과학과 인간 생활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경제적 활동은 자연에의 도전으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거대한 조직망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화려하게 보이나 그 이면은 빈부의 격차로 소외 계층이 늘어 가고 있다. 사회의 모순된 제도와 위장된 주의와 부패한 정치가 활개치고 왜곡된 정의와 타락한 윤리가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작가는 매미의 오덕을 상기하고자 한다. ‘사람도 다섯 가지의 덕을 갖추고 있는 매미를 본받아야 하겠다.’라 하며, 그는 ‘익선관’과 ‘오사모’를 왜 매미의 날개로 형상화했는지 살펴보길 권한다. 정차현의 한국적 수필은 이러한 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판독할 수 있는 시대적 좌표를 제시한다는 데서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때 오늘날 문학의 위치와 작가의 임무, 나아가서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단순히 이상의 세계를 그리는 창작에만 몰두하기에는 오늘의 현대 문명은 급격한 가속과 중압감을 느끼게끔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역사적 바탕을 기반으로 미래를 응시하고 자기 자신과 겨레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차현은 작가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한편 두 아들에게 “부자간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즐겁지 않겠느냐”한다. 혹독한 유배의 고난에서도 두 아들과 제자에게 배움의 그 요체를, 매우 확고하며 자상하게 짚어 이끌러준 존경스러운 아버지이고 스승이다. 아들에게 사안별 간곡한 주문과 칭찬도 하며 때론 주마가편의 준엄한 힐책도 한다. 이는 자식 교육의 전범이 아닐까. 이 글에세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구체성 없는 가훈 하나만 써 걸었다. 또 자식들 크게 거슬림 없이 무탈한 성장과 대과없는 현상에 만족하는 허송세월이었다. 이는 애비의 책무를 등한한 불초지부이었음을 자인하며, 몹시 부끄러웁다.
- <다산의 의방지훈> 중에서 -
이 수필은 다산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시작한다. “학문의 목적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리를 알고 실천하며, 사물의 진실을 옳게 판단함이지 과거급제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편지를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깊은 학문의 바탕에서 분출한 문장만이 문채가 드러나며, 그 글의 한 구절 한 문장 모두는 많은 이들이 아끼고 애호할 것이다.’는 문장이다. 작가가 다산의 ‘의방지훈’을 수필화하고, 다시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것은 바로 지식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라 하겠다. 작가는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통찰하며, 또한 격변하는 현대를 곰곰이 반추하고 미래를 응시하고 분석하려는 문명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창작에 임해야 될 것이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역할은 오늘에 있어 중차대하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기에 수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정차현 수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다산의 사상과 시대를 꿰뚫는 학문정신을 탐색할 수 있다. 다산은 역사의 흐름을 좌시하지 않고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의 눈을 가졌기에 아들은 물론 제자들을 감동토록 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 글의 쾌미는 작가의 뼈아픈 자성이겠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목련 한 그루를 안산 단원고에 보내와 교정에 심게 함으로써 부활의 의미를 되살렸다. 2014년 4월 세월호의 참사로 희생된 학생드을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목련을 보내면서 그 의미의 메시지를, “봄마다 새로 피는 목련은 ‘부활’을 나타낸다.”라 하였다. 그는 이처럼 이 목련꽃에 부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한 그루 목련의 의미는 한국과 미국간 돈독한 선린우방의 징표와 또 인류애를 포현함이라 하겠다.
- <목련의 꽃말> 중에서 -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기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소중한 조언을 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 세계가 아무리 속화되고 물화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의식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 내고 아울러 세계가 아무리 혼탁해진다 해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케 하고 모순의 흔적을 쫓아 초월하며 피안의 세계를 사유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향성에 키를 틀고 있는 정차현은 오바마 대통형이 세월호 피해를 입은 안산고에 목련 한 그루를 보냈다는 데 착안하여 이를 한미간 선린우호의 시그널로 의미화했다. 세월호는 우리의 아픈 상처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된 역사의식이나 현실 인식의 형상을 표현한 좋은 글이 사람의 마음을 고요의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다. 아주 잘 쓴 글, 풍부한 감성과 질 높은 사상이 담겨진 좋은 글을 읽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다. 그가 이 수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목련’의 꽃말에서 찾을 수 있다.목련의 의미는 동서양에 따라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동양은 ‘충절’이고, 서양은 ‘부활’이지만, 작가가 이 지점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바는 서양적 관점이다. 하나는 물 속에 잠긴 아이들의 부활이고, 삶의 의미를 잃은 학부모들의 생명의지 부활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한미동맹의 부활인 것이다.
이를 왜 부인이라 호칭했을까. 부인이란 칭호는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의 외명부 품계가 아닌가.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등처럼 말이다. 혹시 이를 처음 사용했던 이가, 당상의 품계이었던가 짐작을 해보게도 한다. 웃어른들은 ‘죽부인’을 한번 장만하면 오래토록 곱게 다루며 애지중지하기를, 마치 ‘곁마누라’처럼 여긴다. 한편 이뿐만이 아니고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대를 이어 물려주는 일이 없다. 이처럼 혼자만 사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그 주인이 고인이 되면, 혹자의 후손들은 혼백상 아래에 모셨다고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는 ‘피서용품’일 분이지만 이처럼 의인화해서, 부인이란 호칭을 한 것 아니었나 여겨보게 된다.
- <바람각시> 중에서 -
좋은 글에는 좋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처럼 향기가 묻어나고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른 미술이나 음악 작품처럼 감미롭고 선홍빛 아름다움이 넘친다. 그리고 싱싱한 생명력을 영혼의 혈맥으로 휘돌게 해 삶에 대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위대함이 내재되어 있다. 죽부인을 의미화한 것이 바람각시다. 작가의 말대로 기계적 냉방기구가 없었던 시기 시원한 촉감이 있는 죽부인이 함께한다면, 이는 여름나기의 금상첨화이고 화룡점정일 것이다. 사유의 깊음이 없이, 좁은 견문과 평이한 지식만으로는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차현의 수필 속에서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 자료가 다루어져 있어 이 글 전체가 인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님이 죽부인을 인격체로 대접한 사실들을 고증을 통해 조목조목 설명하는 데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식견을 통해 죽부인의 본질을 관조하고, 바람각시에 대한 끝없는 고찰과 새로운 이해로 선인들의 생활지혜를 넓혀 가려는 노력이 문학의 옷을 입고 있어 이 수필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수탉의 절대적인 임무가 있다. 이는 알을 낳을 수 있는 모든 암탉들에게 골고루 수정을 위한 자미다. 이 또한 모든 생물의 생식본능이겠다. 수탉과 암탉간의 시그널 역시 재미있다. 시간을 알리는 울음소리는 ‘꼭꼬 교요’이고, 위험을 알릴 때는 ‘꼬꼬댁 꼬꼬’하며, 암탉을 부를 대는 ‘꾸욱 꾸꾸꾸’라고 처연스럽게 부른다. 옛 선인들이 예찬한 “수탉의 오덕”이 있다. 문(수탉의 벼슬}, 무(날카로운 발톱), 용(싸움에서의 임전무태), 인(먹이가 있으면 꾸욱 꾸욱 꾸꾸꾸 가족을 모이게 함),신(때맞추어 새벽을 알림)이다.
- <서초의 오덕> 중에서-
닭에 관한 글은 간혹 시나 수필에서 많이 등장한다. 특히 수탉의 가장적인 역할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수탉은 거느리는 많은 암탉들과 그 새끼들의 먹이와 안위를 책임지니 사람들이 본받을 점이 많은 상서로운 서조라 하겠다. 작가는 우리나라 전통혼례에는 기러기와 닭이 등장하는데, 기러기나 닭의 특징이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짝을 바꾸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질서’의 가치를 주창하고 있다. 기러기나 닭의 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니, 이 글은 참으로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서조’가 혼례의 의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퇴직 이후에도 작가는 독서와 학문 연구의 줄을 놓지 않은 까닭으로 학문적 성과를 창작을 통해 질서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곧 인생 그 자체이다. 풍부한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자기만의 개성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작품 소재에 대한 철저한 몰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상회의 날 저녁 그 시작이다. 나의 거동만 유심히 살피던 아내가, ‘지금 반상회 가려는 거죠’라며 내 앞을 딱 가로 막아선다. 그러면서 ‘내가 말리면 들어주어요.’하며 극구 말린다. 결국 내 계획은 실패한다. 나는 아내가 내 오랜 생각을 묵살했다는 생각이 에르니, 마치 권투시합에서 KO패를 당한 기분이다. 그때 우리 부부의 냉전을, 지금도 나는 태극기를 볼 때면 그 일이 생각나 혼자 웃곤 한다. 한편 왜 태극기를 등한시할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태극기가 싫어서일까 아니면 나라가 싫은가.혹 무관심일까, 별별 공상을 해보았다. 나의 결론은 학교나 사회에서 태극기에 대한 교육의 부재가 아닌가 여겨보게 되었다.
- <태극기의 날> 중에서
정차현의 많은 수필 중에서 가장 사회의식이 잘 드러난 수필이 ‘태극기의 날’이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문학인 이상, 수필도 사회 문제를 눈 감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태극기’라는 제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태극기를 등한시하는 문제를 겨눈다. ‘태극기 사랑은 애국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언설에서 우리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이슈를 제재로 해서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곳에 대한 ‘이해’와 ‘관심’ 촉구하는 주제를 무난하게 잘 소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보지 않는다’의 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의 눈이다. 작가는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불편한 심사를 수필에 담아 우리로 하여금 태극기 사랑이 바른 애국의 길임을 되짚어 보게 한다. ‘태극기 사랑 없이 말로만의 애국은 거짓애국이 아닐까’하는 작가의 말이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1949년 10월 15일 정부가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제정 공표한 날이기 때문에 이 날을 ‘태극기의 날’로 지정하기를 제안한다. 작가의 시선이 '나'보다는 '우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필은 일단 의식의 측면에서 성공적이다. 문학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발아될 수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작가는 글 속에 시대의 울음을 담아야 한다. ‘우리’를 지향하는 시선은 응당 현실의 문제를 문학 속에 여과하게 된다. 수필은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비평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러 숙명으로 볼 때 진실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본질적 과제다. 따라서 정차현의 수필은 진정한 애국시민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묻는 질문지로서 사회 비평적 성격을 띤다. 잘못된 관행에 저항하는 정신은 아름답다. 작가의 용기가 이 수필을 이끄는 힘이라면, 비판적 정신은 이 작품의 쾌미다.
때론 내가 큰 납덩이를 진 것처럼 힘겨워할 때면, 소리 없는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듯 내 마음을 보드랍게 감싸주면서도 원망 한 번 안 한 청화심이다. 올곧은 마음자리에 체화된 근검으로, ‘좀도리 쌀’의 실천은 가세 일흥에 기여한 바도 매우 컸다. 더욱이 노환의 시어른을 오래도록 정성스레 봉양하여, 대소가로부터 경찬을 받아왔다. 이러한 부덕을 보고 자란 녹엽성음의 사남매 모두 심성이 바르니, 모두 누구의 공이고 덕이겠는가. 내 어찌 과목침용한 내조의 그 공을 필설로 다 표할 수 있을까. 청화심의 묵묵한 인고의 헌신에 나는 늘 고마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 <흑진주> 중에서 -
정차현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사랑하는 이에로의 지향성이다. 그 귀착지는 아내와 함께한 만남의 길이고, 아내와 함께하면서 겪은 아픔이다. 그는 만남의 길에서 행복을 얻는 데는 고통이 동반되는데, 이를 ‘황금도 불에 의해 정금이 되고, 바다 속 조개의 상처로 조개가 만들어’지는 이치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순리를 그는 “만남은 고통이 있고 이를 이기면 행복”이란 등식으로 표현한다. ‘청화심‘이란 당호 해설에는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묻어 있다. ’그의 임하풍기한 자용은 눈처럼 흰 배꽃과 같고, 은은한 향기는 해가 더 할수록 그윽하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절절한 연모곡이 수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고 해야겠다. 존재의 근원과 필연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흑진주가 입증한다.
이 수필은 화목한 가정이 있기까지 아내의 ‘과목침용’한 내조의 덕이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작가는 아내의 당호인 ‘청화심’의 가슴 속 까만 옹이를 조개의 상처에 견주었다. 그리고 그 배나무 마디마디의 까만 옹이를 ‘흑진주’로 치환하였다. 그리고는 ‘임자의 가슴에 그 흑진주는 자신의 부끄러운 현주소’라고 자책한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함께하고 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내의 내조를 행복의 씨앗으로 수용하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이제부터 ’나는 임자의 지팡이가 되어 주리라‘는 이 순응의 자세는 그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부부가 역할을 나누어 가지며 행복을 찾아가는 상황 제시를 통해 우리 시대 부부상을 다시 반추한다.
사랑하는 아내는 질곡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짓눌리는 그 아픔을 한 땀 한 땀의 침선과 자수로 자위하며, 참고 또 참아주었다. 아마도 바늘 끝은 아내로 하여금 괴로움, 슬픔, 아픔을 참아내게 하는 보인제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아내의 힘든 시절을 ‘숫덩이처럼 시커먼 옹이’로 잘 표현하고 있다. 고생한 안사람의 위로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말해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부부간의 연대가 아니겠는가.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부부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 작품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정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현대의 남편들은 아내에게 월급봉투 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편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부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정차현은 이런 진리를 ‘흑진주’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배나무의 석과는 주렁주렁이라 나는 한없이 행복해요,’라는 고백은 부부애의 무한한 확장이다. ‘지팡이’가 되겠다는 다짐 또한 감동을 준다. ‘흑진주’의 상징성에 뭉클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부부간의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필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부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대춘지수를 기원할께요.’라는 진술에는 아내를 지극히 모시겠다는 한 남자의 진한 다짐이 들어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이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사랑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하였다. 혹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모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를 저버릴 수야 있겠는가. 우리의 광복은 지금 세대의 역사이다. 식자들이면 광복을 표현할 때 올바른 어휘를 써야하지 않겠는가.
- <광복절 회상> 중에서 -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급급한 문학은 일시적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문학을 자기 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해왔다. 그러나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리얼리즘 문학으로서 수필의 의식은 개인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에서 개회의식의 형이상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해방’과 ‘광복’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고, 올바른 어휘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정차현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발자취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흔적을 보였다. 작가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개념 정립을 통해 광복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광복절이 단순히 ‘노는 날’로 인식되고 청소년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광복을 해방이라고 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국어학자도 아닌 그의 국어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차현의 사회수필은 무엇보다도 푹 찌르는 맛이 있고, 톡 쏘는 맛이 있다. 정보적 가치가 있고, 지적 욕구도 충족시켜 준다.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야 할 요건을 갖고 있는 점도 크나큰 장점이다.
정차현의 수필은 위에서 말한 대로 사회수필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준다. 그의 책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는 현실에 대한 강한 직시와 적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다양한 문헌과 자료는 시사하는 바가 너무 많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아내리라 확신한다. 이 책의 출간 효과는 설득이나 감동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수필가나 고급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짧은 지식에 자괴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을 통해서 부조리한 점을 파헤치되 자신의 철학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들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지성적 에세이에 역사적 고전적 향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어떤 수필가에게서 이처럼 치열한 역사의식을 찾을 수 있었던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칼날과도 같이 번쩍임을 볼 수 있다. 사료에 대한 작가의 높은 식견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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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닫으며
정차현의 「바람각시」는 한국적 소재를 저자의 인품이 감싸 안으면서 고차원의 품위를 지니고 있어, 일반 시중에 나도는 수필집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소재, 문체, 주제 등에서 다른 차별성을 가지지만 시원시원하게 읽힌다.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떤 수필도 근본과 질서를 배우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러. 콕 스테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의 날카로운 인식은 인생에 돋아나 있는 천태만상의 부조리를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쓴 글들이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인생의 본질, 시대정신 역사의식 의례 등을 관통하고 있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 글들은 여느 책과도 차별화된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서 인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지성인의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라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정서적 감화까지 맛보게 한다는 데서 다른 수필집과는 나란히 세울 수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수필집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본인은 겸손하게도 이 졸고를 세상에 내어놓으면서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부유감수’라는 말을 자신의 경우로 받아들였지만, 이번 수필집은 오늘날 불투명한 한국 사회 일면과 절차와 과정에 길들여지지 않아 갈팡질팡하는 진로를 명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한국적 수필의 맛을 보여주는 이 수필집은 세련된 지성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잘 어우러져 ‘이것이 한국적 수필이다’라는 명제에 답하는 글이라는 데서 한 마디로 가치있는 수필”이라는 점을 다시 부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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