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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0 장
행 20: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 여기 "작별하고"란 말(*
)은 "작별 인사하고"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 당시의 작별 인사는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20:37)(Thayer's Greek-Englich Lexicon, 1962,p.81).
"권한 후에"란 말(* )은 권면한다는 뜻(exhortation)이다. 바울
은 가는 곳마다 신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권면하였다. 인간의 권면이
성령님의 감동하시는 은혜와 동반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권면과 동일시 되어야 한
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을 통하여서 하실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행 20:3
거기 석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
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바울이 "석달"동안 헬라에
머물었는데 그곳은 고린도였을 것이다. 거기서 그가 로마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후
에 그가 거기서 떠나 배 타고 "수리아"(안디옥)로 가려고 했으나 그를 해치려는 유대
인의 음모 때문에 노정을 변경하여 "마게도냐"를 경유하기로 하였다. 우리 본문에 "공
모"로 번역된 헬라어(* )는 그저 "음모"(a plan against some one)라
고 개역해야 된다. 바울은 자기를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 그것을 피하였다.
그는 이렇게 위험을 피하는 처세도 하였다. 하나님의 종이 일부러 악도들의 수중에 자
기의 몸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신자가 환란을 구차스러이 면하고자 함도 불가하지만,
일부러 위험한 자리로 들어가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행 20:4
이 귀절에 기록된 일곱 사람, 곧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는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한 금액을 맡아 가
지고 가는 사명을 받았다(롬 15:25-26;고후 8:1-2,9:1-2). 바울이 친히 이 금전을 관
할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에 준하여 행한
것이다(6:1-6). 위의 일곱 사람 가운데 여섯 사람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들을 각각 참
조하라. "소바더"(롬 16:21), "아리스다고"(행 19:29), "가이오"(행 19:29), "디모데"
(행 16:1), "드로비모"(행 21:29;딤후 4:20), "두기고"(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세군도"에 대한 기록이 다른 데는 없다. 이 일곱 사람은 그 때 이방 교회들을
대표하였으니,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는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고, "가
이오"와 "디모데"는 갈라디아 교회를,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아시아 교회를 각각
대표한다(F.F.Bruce). 이들이 바울과 동행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금을 가지고 간것이다(고후 8:6). 이렇게 그 때에 공적인 일을 위하여는 공평하게
여러 교회의 인사들이 가담하여 함께 움직였다. 고후 8:16-23 참조. 어떤 학서러에 의
하면, 이 사람들이 바울과 동행한 목적은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3절)
그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행 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 일곱 사람이 왜 먼저 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어떤 학서러에서 말한 대로 외국에 분산된 유대인들은 여행 중에
도 절기를 지키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그렇게 절기(무교절)를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리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행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 "우리"라는 말이 여기 또 나옴(한 번은 16:10-17)을 보아서 사도
행전 저자(누가)가 빌립보에서 다시 바울의 선교 여행에 가담한 듯하다. 그가 일찌기
5년 전에(16:40) 자기 고향인 이곳(빌립보)에 남아서 의사(醫師)의 영업을 하다가 이
제 바울을 돕기 위하여 다시 고향을 떠난 듯하다(Lenski). "닷새만에" 빌립보에서 드
로아까지 배로 이틀 걸리면 도착하는데, 이 때에 바울이 닷새만에야 도착한 원인은 아
마도 풍세가 좋지 못했던 까닭인 듯하다.
행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
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 여기 "안식 후 첫날"(*
)이라고 한 것은 주일을 말한다. 마 28:1;눅 24:1;요 20:1,19;고전
16:2참조. 이 날에 신자들이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초대 교회
의 풍속대로 신자들이 가지던 애연(愛宴) 겸 성찬이었을 것이다(Alford). 이것을 보면
벌써 사도 시대부터 일요일을 주일(主日), 곧 예배일로 정한 것이 분명하다.
행 20:8,9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
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심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윗다락"(* )은 3층에 있는 다락
을 말한다(9절). "등불을 많이 켰는데." 여기 이른 바 "많이"란 말(* )은
"넉넉히"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렇게 "등불을 많이 켜" 놓은 목적은 누구나 그 높은
다락에서 사방을 잘 보도록 하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잘 방비
되었는데도 사람이 그 다락에서 떨어진 데 대하여는 그 다락의 소유자 측에 책임이 없
을 것이다.
바울의 놀랍고 참된 전도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도 유두고는 졸고 있었으니, 그는
삼층 다락에서 떨어져 마땅하다. 그가 졸다가 떨어졌으니 그 책임이 그 자신에게만 있
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호가 복음의 등불을 이 땅에 어디든지 밝히 켰는데도 사람들이
어가움으로 떨어진다면 그 책임이 교회에 있지 않다. 교회들이여! 진리의 빛을 유감없
이 비취고 있는가?
행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 바울이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음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한
것과 같은 행동이다. 그것은 유두고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위한 간절한 기도 행위였다.
왕상 17:2;왕하 4:34 참조. 이 행동은 물론 그 청년을 위한 바울의 사랑이 뜨거움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권능은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나타난다. 마 14:14,15:32-38 참
조.
"떠들지 말라." 이 말(* )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
지만 역시 우리 한역과 같이 떠들지 말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걱정으로 떠드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다. 일이 중대한 시기에 쓸데 없이 떠드는 것은 금물이다. 출
14:13 참조. 전쟁의 대에도 백성들 측에서 안정함이 필요하다(Bengel). "생명이 저에
게 있다." 이것은 유두고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죽었던 그에게
생명이 회복되어 있다는 뜻이다. 12절 참조. 하나님께서 이런 이적을 나타내신 목적
은,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영적 위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행 20:11,12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은 피곤을 잊은 채 말씀
전파에 집중하였었다. "이야기하고"란 말(* )은 서로 친밀하고 또 서
로 신뢰하는 사이에 담화함을 의미한다(H.H.Wendt, * wird von der
vertraulichen unterhaltung gebraucht.-Apotelgeschichte, 1913,p.286). 그가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였으니, 영혼을 사랑하는 신령한 선생은 어떤 때에는 시간에 매이
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적 생명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취급하는 자가 역
시 그 활동에 있어서 때로는 기계적인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행 20:13-16
"앗소"는 드로아의 항구인데 드로아에서 24마일쯤 되고, "미둘레네"는 레스보스
(Lesfos)란 섬의 수도(首都)이다. "기오"와 "사모"는 섬 들이고, "밀레도"는 에베소에
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항구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도보로" 간 이유는 우리
로서 알기 어렵다. 그가 그 전날 밤에 자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걷는 수고를 한 목적이
아마도 홀로 걸어가는 중 한적한 기회를 얻어 주님과 교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행 20:17,1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
을 너희도 아는 바니 - 바울이 에베소에서 그의 목회 생활을 어떻게 잘 한 것에 대하
여 말한 것은 아무런 장벽 없이 피차간 사랑하는 처지에서 사실 그대로를 실토한 것이
다. 이만큼 심령이 서로 통하는 사이는 부모 자식 사이와 같다. 이것이야말로 교역자
와 양 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관계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행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 바
울은 여기서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섬긴 사실을 보여준다. 곧, 그가 주님을 섬김은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통하여 되어지는 일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겸손을 첫째로 힘썼던 것이다. 기독자, 특히 사역자는 자기가 주님의 종인
것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된다. 그리할 때에 그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지킬
덕으로서 겸손은 처음이요 나중이다. 우리가 겸손을 소유하지 못하면 우선 주님의 종
된 자격을 상실한다. 종된 자로서야 그 어느 순간인들 자신을 높일 수 있으랴! 그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도 겸손에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도 겸
손에 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의 눈물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
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끓는 표현이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며 배척하
는 사실로 인하여 눈물은 흘렸을 것이다. 롬 9:1-3참조. 그리고 신자들의 영적 형편이
병들었을 때에 그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 이
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던 간계를 말함이다. 성도가 받는 시험 중에도 특
별히 사람들의 모해를 당하는 시험은 그 괴롬이 심하다. 그것을 당하는 자는 고독의
쓴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독이야말로 그 당하는 자로 하여금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며, 주님만 믿도록 해 주는 양약(良藥)이다
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 여기 이른 바 "유익한 것"(* )은 구원에 유익한
것을 가리킨다(Haenchen:* Meint hier das zum Heil
notige). 프로이쉔(Preuschen)이란 학자는 이것이 세속적으로 유익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것을 잘못된 해석이다. 바울은 이것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르치기를 힘썼
다. 그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딤후 4:2에 말하기를, "너는 말씀을 잔파하라 때를 얻든
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다.
행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을 증거한 것이라 -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태도를 의미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 대상이 되
시기에 합당하다. 그 이유는, (1)그는 게시되신 하나님이신 까닭이며, (2)그는 하나님
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이신 까닭이며, (3)그는 언약의 성취자로서 아멘이시니
(고후 1:20), 곧 진리이신 까닭이며, (4)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신 까닭이며, (5)그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
함이 되신 까닭이다(고전 1:30).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
지 알지 못하노라 - "심령에 매임을 받아." 이것은 바울이 성령의 인도로 인하여 그의
심령의 태도가 확정 불변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는 앞으로 위험한 일들을 만나게
될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심령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시 57:7 참조.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성
령"의 지시가 바울에게 어떤 때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각 성에서...증거"하셨다고
한다. 예컨대 가이사랴에서 아가보가 예언한 것처럼(21:10-14) 있었거나, 혹은 바울이
친히 이런 일에 대하여 성령의 지시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바울이 그의 가는 길에
"결박과 환란"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
은 확신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그에게 이런 고난이 있을 것을 예언해 주셨
으니만큼, 그가 실제로 선교 도상에서 그런 고난을 당할 때에 놀랄 것 없었겠고, 또한
그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 잘 견디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고생이
첩첩이 쌓인 길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인 줄 알려질 때에는 서슴치 않
고 가야 한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
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 바울은, (1)
복음을 전하가 자기의 사역을 달음질(* )로 비유하였다. 이 비유의 요점은
달음질 하는 자가 단 하나의 목표만 가지고 전력함과 같이, 그도 일편담심 주님만 위
하여 전심 전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이라고 하였
다. 여기 "사명"으로 번역된 말(* )은 수종든다는 뜻이다. 복음 사
역자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 그 일은 주님과 그 말씀을
수종드는 일이다.
"은혜의 복음"이란 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만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말한다(고후 5:21-6:2). 바울의 사명은 이와 같
은 복음을 전함이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은
혜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언제든지 죽기를 예비하고 있었다(21:13;빌 1:20-21).
행 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왈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1:3에 있는 같은 말 해
석을 참조하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되기 시작하여 복음 운동을 그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천국 운동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바울은 이 때에 에베
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는 것이 이번이 최후라고 하면서 피차간 석별의 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장로들로 하여금 그의 마지막 교훈을 한층 명심하도록 한
것이다.
행 20: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모
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깨끗하다"함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책임껏 증
거했으므로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자기로서는 책임 질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만큼
책임을 다한 바울은 만고에 모본이다.
행 20:27
이는 내가 거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 여기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은 인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리스
도 사건(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을 전파함이다.
행 23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는니라 - "너희"란 말은 장
로들을 가리킨다. 그들 자신이 성직자로서 더러운 자가 되면 양 떼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삼가야 된다. 부흥사 촬스 피니
(C.Finney)가 교역자들을 주의시킨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장로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을 열거해 본다. (1)너는 죄인들의 위험성을 느끼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는가 ?
(2)너는 그 죄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려는 사랑을 가졌는가? (3)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쓰는가? (4)너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없는가? (5)너는 너의 혀에
재갈 먹여 헛된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가? (6)너는 특별히 이성 교제(異性交際)에 극
력 조심하는가? (7)너는 네 자가을 쳐서 복종시키는가?
행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
여기 "떠난다"는 말(* )은 사도 바울의 죽음을 가리킨다(Grosheide). 바울
이 그의 죽은 후에 교회 밖에서 거짓 스승들이 양의 옷을 입고(양 같이 유순한 태도
로) 교회 안으로 침투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예언이다. 언제나 거짓된 자들
은 교회의 허약한 틈을 타서 들어온다. 요 10:12 참조.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리와 양 사이에는 공통성이 전연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짐승은 양을 해치되 끝까지 해친다. 그와 같이 거짓 스승은 그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들을 끝까지 대적하며
해친다.
행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
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 "너희 중에서도"란 말(* )은 앞절에
말한 바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원수와 대조된다. "자기를 좇게 하려고." 거짓 스승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그들의 특징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게 함보다 오
히려 그들 자신을 좇으며 지지하여 주기를 원한다. "어그러진 말"(*
)은 참과 거짓을 섞어 말함을 가리킨다. 바울의 예언과 같이 과연 후메내오
와 알렉산더(딤전 1:20), 부겔로와 헤모게네(딤후 1:15), 또한 데마(딤후 4:10)와 같
은 자들이 일어났다.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
던 것을 기억하라 - 바울의 이와 같은 목회는 만고에 모본이다. (1)"일깨는"것은 양
떼를 해롭게 할 무엇이 생기지 않는가 하여 파수함이고, (2)"밤낮 쉬지 않음"은 참 목
자의 근명이고, (3)"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함"은 참 목자로서 가져야 할 사랑이다. 사
랑이 없으면 무엇에든지 유익이 없다(고전 13:1-3). 사도 바울이 "각 사람"(*
)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의 사람 취급이 자세하고 개별적
이어서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억하라." 곧, 에베소 장로들도 바울의 목회 생활을 모본하여 양떼를 돌보라는
뜻이다.
행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
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바울은 에베
소를 떠나지만 주님과 그의 말씀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과 그의
말씀께 그들을 부탁한다.
(1)"그 은혜의 말씀"(* )은 죽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가지시고 일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하지 않음에 대하여
이사야는 말하기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
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
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였고(사 55:10-11),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딤후 2:9). 역사가 리챠드 그린(John
Richard Green)은 말하기를, "가장 큰 도덕적 변화가 영국에 생긴 때는 영국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속하였던 때이다."고 하였고, 소경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말하기를, "나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왔는데, 그것은 나의 걸음을 인
도하는 지팡이와 같다."고 하였다.
(2)"은혜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하늘 기업(영생의 분깃)을 획득시키기 위하여 그들
을 신앙에 든든히 세운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깃은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
다. 1)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만 기업 얻을 믿음이 생기고(롬 10:17), 2)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먹어야 그 믿음이 자라나며(벧전 2:2), 히 5:11-14 참조. 3)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화합하는 자는 안식(기업)에 들어간다(히 4:2-3).
행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
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주님의 종된 자로서 재물을 탐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성경이 역설(力說)한다(딤전 3:3 끝;딛 1:7 끝). 바울은 손으로 수고하여 물질적
으로 그의 동행들까지 도와주었다. 그것은 전도자로서 부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
나 그는 그렇게 자급 전도를 힘썼다. 그가 여기서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을 진술함은,
모든 다른 교역자들도 자기와 같이 해야 된다고 명령함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교역자
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가르쳤다(고전 9:14;고후 9:8;갈 6:6;빌
4:10,16;딤전 5:18;딤후 2:6). 주님께서도 전도자가 물질적 보수를 받을 수 있음을 말
씀하셨다(마 10:10). 그럴지라도 교역자로서 명심할 것은, 자기는 그 보수를 사람들에
게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받는 줄 알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교역을 바
로 해야 될 일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해야 혹시 대우가 부족한 대에도 사람을 원망하
지 않고 다만 자기의 사역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것을 찾아 회개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레 교역자가 생활비를 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부득이 하여 자급 전도할 수
도 있다. 그렇게 할 때에 그가 조심할 것은 복음 전도보다 그 사업에 치우치지 말 것
이다. 그가 만일 사업을 전도보다 시급하게 생각하여 사업에 치우친다면 사람들이 그
에게서 복음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될 터이나, 그렇게 되면 그는 전도자의 위신을 잃
는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복음서에
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 말씀(*
)은 아마도 구전(口傳)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주기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는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으며, 독생자와 함께 만물을 신자
들에게 주신다(롬 8:3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주시기만 하신 복된 분이시다.
그의 이 세상에서의 성역은 인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었고, 나중에는 그의 생명까지
주셨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도 남에게 주기를 힘써야 된다. 바울은 가난한 자 같았
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였다(고후 6:10).
행 20: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무릎을 굻은"것은 깊은 겸손과 깊은 간절과 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깊이 느끼는 태도이다. 예수님도 이런 태도로 기도하셨다(마
26:39).
벴겔(Bengel)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장 부드러운 정서가 여기서 주장한
다. 이렇게 눈물을 귀히 여기는 점에서도 성경을 당할 책이 없다. 눈물이 점점 없어지
는 것도 그 후 시대들이 부패한 증거이다. 전 세대에는 남녀, 심지어 영웅들도 쉽게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눈물 흘리는 것이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만 남아 있다."고 하였
다(抄譯)(Gnomon II,p.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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