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신자들이 교회 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이 이루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갈 5:16)은 거룩한 삶을 위해 성령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신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엡 5:18). 왜냐하면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충만한 삶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교제(엡 5:19), 감사의 마음(엡 5:20), 서로 복종하는 마음(엡 5:21)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기적이 일어나거나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이 곧 성령충만한 삶의 표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성령충만의 한 현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런 일들이 성령충만의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의 이유가 초자연적 은사를 행사하기 위한 것이거나 초자연적 능력을 경험하는 데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성령충만의 궁극적 목적과 그 결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있다. 이 열매들은 신자들이 삶에서 나타내야 할 중요한 신앙의 덕목들이다(갈 5:22-23). 이 덕목은 하나님과 나와 이웃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 열매를 얻기 위해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이나 기적 등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자질도 마찬가지다. 교회지도자의 자격조건은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성화된 삶의 질이요 태도다(딤전 3:1-13; 딛 1:5-9). 바울의 목회서신에 나타난 교회지도자의 자격은 예언이나 방언, 이적과 같은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후서에서 말하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교훈은 성도들의 삶을 주관적인 능력 행함이나 사사로운 예언보다 객관적 말씀에 의존하라는 당부로 새겨들어야 한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love)이다. 이것은 “희생적 사랑”인 아가페(agape)를 의미한다.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인 것은 그것이 모든 열매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첫 번째 열매가 없이는 다른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 그 점에서 사랑은 가장 중요한 열매다. 그러므로 모든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사랑의 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사랑이 결여된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두 번째 열매는 희락(joy)이다. 이 희락은 하박국 기자의 고백처럼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다(합 3:17-18). 세 번째는 화평(peace)이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화평이요, 성도와 성도 사이의 화평이다. 성경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마 5:9). 이 화평은 세상의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화평이 아니다. 네 번째는 오래 참음(patience)이다. 오래 참음은 모든 성도들의 미덕이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시험을 이기는 힘이다. 이것은 믿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일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자비(kindness)다.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또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마 9:13). 여섯 번째는 양선(goodness)이다. 양선은 사랑의 실천이다.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 번째는 충성(faithfulness)이다. 이것은 진실과 같은 말로써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진리를 향한 마음이 변치 않는 것이 충성이다. 여덟 번째는 온유(gentleness)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절제(self-control)다. 이 절제는 금욕주의와는 무관하다. 홀로 있을 때 삼가라(愼獨)는 말처럼, 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 앞에서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믿음을 통해 사랑으로 출발하여 절제로 끝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은 불신을 통해 증오로 출발하여 탐욕으로 끝난다.
성령론은 신론이나 구원론의 부속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나 현상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어떠한 논리와 근거를 제시한다 하더라도 성령이 수단화되는 것은 개인의 신앙뿐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령의 사역을 수단화하지 않으려면 먼저 성령의 실체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성령의 다양한 역할에 대한 안목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 어떤 현상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뜻(롬 12:2), 예언(고전 14:29), 하나님의 말씀(딤후 2:15), 선악(히 5:14) 등을 분별하라고 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영들과 영적인 것(고전 2:13; 12:10), 그리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해있는지를 분별하라고 당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이 말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악한 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사랑하는 자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거짓선지자들의 말과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삶과 결실이다. 신명기 18장 22절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경고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약시대의 성령은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내주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생각하고 감동하고 동고동락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 안에서 성령은 나를 변화시켜 내가 더 그리스도인다워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의 명령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능력으로 행하도록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차적으로 성령이 가장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방향성을 잃어버린 성령의 은사는 위험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보혜사로 오신 분이다. 그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성령의 은사와 현상은 비판적으로 분별해야 할 대상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가 초기에 성령운동을 통해서 세상의 빛과 등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체험이 가시적, 감각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에너지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으로 성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령의 은사와 충만을 “소유하는 것”(to have)에 목표를 두지 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to be)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는 중생과 성령침례의 고질화된 논쟁에서 벗어나 좀 더 포용적 차원에서 성령충만을 추구하며 실추된 교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5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