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개혁) 원문보기 글쓴이: Songdan
신사참배란 무엇인가요?
일제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상징조작에서 나온 국민의식통제책.
특히 1930년대에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기만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실시하면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천황제 국가를 확립시킨 일본은 초기 신도(神道) 국교정책을 거쳐 1882년부터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했다. 즉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하에 전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로서 출발한 국가신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고 이를 전국민적인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관료로서 국가기구 내에 포섭하고 이들이 종교로서 신도행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신도의 모든 시설과 모든 국가신도 종사자들의 활동을 제사집행에 한정했다. 이는 1889년의 제국헌법에 의해 명문화되었다. 이에 따라 1890년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1891년에는 교육칙어 낭독,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행사로서 제도화되었다. 나아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화, 신직제도(神職制度)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국가통합이념으로서의 신사제도가 확립되어,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가의 정치원리,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행사로 정착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 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력히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했다(→ 개신교). 같은 달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된 윤치호(尹致昊) 등도 석방의 대가로 기독교를 통해 내선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조선감리교회의 일본감리교회로의 합동을 결의했다. 7월에는 신사참배에 협력한 각 교회와 단체들의 전국대회가 개최되었고, 9월 장로교 총회에서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의 찬성으로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의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를 전후하여 기독교계열 각종 연합단체의 해산, 세계조직에서의 탈퇴, 조선기독교의 일본기독교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황민화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학생들이 노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여, 9월 20일 학교가 무기휴교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이주원(李朱元),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로부터의 탈퇴, 신노회 결성, 참배 불참자들간의 상호부조와 이들을 중심으로 가정예배와 기도회 확산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40년 2월에는 각 지역의 참배반대 운동가들을 모아 신사참배불참운동자연합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6월부터 주기철 목사 등 운동관련자들을 대규모 검거하여 운동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비록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나마 계속되었다.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http://myhome.naver.com/bominkim/tho21.htm
한국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가장 참혹한 수난의 시기를 들라면, 신사참배 강요의 시기일 것이다.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는 '기독교 박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한국민족말살전략의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1) 신사참배 강요는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근대 천황제 국가론과 직결된다. 메이지유신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절대주의 천황제를 실시하고, 천황을 중심으로한 일본 제국의건설을 도모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일본의 이러한 통치 전략의 하나로서 사상통제의 한 방안이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의 천황제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겠는데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 신성 천황 개념이다. 신성천황론은 정치·군사·종교 면에서 절대주의적 특성을 유지하였는데, 특히 메이지 시대에는 황실을 중심으로 국가 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2)
I. 신도와 군국주의 일본의 통치전략
1. 신도의 기원과 성격
일본의 각종 문헌들에 나타난 신도의 역사는 장구하다. 신도는 일본의 정신을 지키며,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원천으로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 민족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민족 종교이다.3) 신도는 일본인의 심성 한 가운데 자리잡은 다신교로서, 일본의 민속종교이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과 함께 발전하여 신사 신도와 국가 신도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절대주의 천황제론의 확립을 위한 하나의 전략적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2. 신도 국교화 정책
지방 봉건제도에 의하여 통치되었던 일본이 메이지 정부에 의하여 강력한 통일적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 정권을 위하여 왕정보고와 제정일치를 정치적 이상으로 내세원 그들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여 나갔다. 1868년에 관직을 일대 ?냔灼臼? 삼직, 칠과를 두었는데, 칠과 가운데 대표적 위치에 신기사무과를 두었다. 이것은 제정일치의 원칙을 그들의 정체 제도에 구체화한 표현이기도 하다.4) 메이지 시대의 이러한 일들은 신도국교화와 근대화라는 두 주장을 이루려는 시도였으며, 일본 정치의 정신적 지주를 신도에서 찾으려는 복고주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5)
3. 신도 비종교화 정책
메이지 정부의 교부성은 기독교를 방지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1877년에 이 교부성이 폐지됨으로 신도국교화 정책은 사실상 막을 내리었다. 그러나 일본의 위정자들은 직접적인 국교화 정책을 단념하고, 간접적인 국가 신도 정책, 즉 신사 비종교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일본 정부가 왜 신사 비종교화 정책을 실시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 정부는 기독교 금지 정책을 시행해 왔으며, 이러한 정책은 주일외국공사관 등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 그들의 대기독교 정책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여론에 따라 신교자유를 허용하였으나 '신민으로서의 의무'수행이라는 전제를 준비하였고, 이러한 태도가 '신사 비종교화' 전략으로 연결되어 지금까지의 신도국교화 전략을 수정하는 고도의 정치술로 나타났다. 이것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방안이며, 신사는 종교의 범주밖에 있는 것으로 '정교분리' 원칙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이들의 논리는, 비록 신사란 종교가 아니지만 '국가의 종사' 이므로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며, 천황의 제사대권에 직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했다.6)
II. 신사참배강요와 한국교회의 훼절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을 그들의 병참 기지화 하였고, 사상적 통제를 위하여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을 사용하였다.7) 일본을 '신사 비종교화 정책'을 내세워 신사란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국민의례라고 강조하면서, 국민된 자의 충성심의 표현으로서 신사참배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한국민족 말살정책과도 직결되는 것으로서, 신사참배를 통하여 사상적 통일을 구형하였다.
1. 한국 에서의 신사제도
한국에서 신사제도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신사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임진왜란이 끝이 난 수 한일 양국이 무역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그들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1696년에 그들의 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을 부산진으로 옮길 때 대마도 번주 종의진이 금도비라신사를 건립하여 운영하였고,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개칭하였으며,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한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원산, 인천, 서울 등지에 소사 요배소 등을 세워 일본의 신들을 제사지냈고, 1910년의 한일합병시에 31개의 신사가 설치되었다.8) 군국주의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였고, 신사를 그들의 사상의 중심에다 두었다. 전국적으로 애국반을 두어 가정마다 가미다나를 두어 신사참배를 생활화 하도록 강요와 감시를 하였다. 또 1면 1신사원칙을 세워 면사무소와 지서가 소재한 곳의 언덕에 신사를 강제로 세우게 하는 등 그들의 통치전략을 신도 사상에 집약하여 실천하려 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전략은 한국인의 기존 종교에 대한 박해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그중 기독교가 가장 격심한 피해와 수난을 당하게 되었으며, 1945년 8.15해방까지 어둠의 계곡에서 수난 당하여야만 했다.
2. 신사 참배의 강요
신사참배 문제가 한국의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이다. 그러나 1910년대에부터 신사참배문제가 등장 하였다. 정주신안학교의 한 교원에게 신사에 최경례를 하라고 하는데서 문제가 발단되어9) 1915년 5월 24일에 조선총독부는 축제일 향일 양립 종립학교 제식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국가의 대축제일에 기독교적 의식에 의하여 식을 하지 말도록 지시하게 되었다.
(1) 기독교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총독부의 태도가 1930년대에 와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변화와 더불어 함께 참배 강요 쪽으로 방향이 설정되어졌다. 이것은 신사비종교화라는 그들의 명분 아래 황국신민교욱의 궁극적 목표요 이상인 구체명징을 위하여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특히 기독교 학교에서부터 강요를 시작하였다.10) 기독교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는 1932년 평야에서 거행된 춘기황령제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이 제례는 평양 서기산에 있는 충혼탑 앞에서 거행되었던 것으로, 1932년의 제례는 만주사변 전몰장병 위령제는 겸하는 행사로서, 기독교 계통 학교의 참여를 강요하였다. 기독교 학교 책임자들은 교리에 위반된 것이기에 제례에 참여랄 수 없다고 하자,11) 당국은 제례 직후에 잇는 국민의례에만 참석하여도 좋다는 것으로 낙착되어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의여학교 학생 일동이 참석 하였다. ]
(2)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학교의 폐쇄까지 하였던 일제는 교회에 대해서도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1936년 8월에 새 총독으로 미나미이 부임하여 강권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가 1936년 8월 26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27일에 총독취임에 즈음한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현재 세계의 형세는 매우 약화되고 제국의 형편 역시 쉽지 않아, 안으로 크게는 국민 정신의 도야, 경제 실질의 강화를 …그와 함께 일만일체의 위엄을 당성하고 양국 공통의 실질을 기르는 것은 필수적이며 중요한 과업으로 즉 인적 물적 양 요소에 걸쳐 내선일여, 선만상의의 경제를 통찰하여 그 현상으로 향하는 길은 다 시금 위대한 황제국가의 본연을 인식하고… 이로써 물심양면에 완전을 기하는 데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2) 총독부는 이른바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여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다. 1면 1신사 정책을 강력히 실시하였고, 매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국기게양, 국가 봉창, 조서 봉독, 동방 요배, 신사 참배?? 실시 하였고, 가종 황민화 정책을 펴나갔다.13)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도 그 열기를 더하여 갔는데 평양 기독교 친목회라는 친일 단체를 통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회유하고 신사참배에 앞장서도록 하는 전략을 펴 나갔다. 이 단체의 회장 오문환, 장운경 등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본 교회들을 순방시킨후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도록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4) 회유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강압적 태도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강요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나오는가 하면, 천주교와 감리교 등이 차례로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는 모습이 나타났고, 장로교 안에서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지방 교회들에 대한 탄압의 끈을 더욱 조여 나갔다.
3. 공교회의 회절
(1) 장로교의 훼절
1938년 봄, 전국의 각 노회가 소집되었을 대, 회유와 협박 등의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전향시키려는 노력을 하엿다. 평북노회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노회 외에도 이른바 '전향자'들이 늘어갔다. 4월 28일에는 신태인의 교도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남의 80여 교회, 군산, 나주, 원주, 청주 등지의 교회들이 '전향' 하였고, 6월 8일에는 전북노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고, 8월에는 평양장로회가 신사가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였고, 총회 직전까지 이러한 공작을 계속하였다.15)
(2) 감리교회의 대응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당한 어려움에 비하면 감리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큰 고통을 겪지 아니하였다. 감리교회와 선교부는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 양주삼 등이 초청되어 "신사란 종교가 아닌 국민의식"이라는 총독부의 주장을 듣고, 이 주장을 따르기로 하였다. 총독부에서 감리교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의를 요청하였을 때 양주삼 총리사는 "국민의 의무일진대 누구나 다 참배할 것이니 구태여 총회에서 결정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감리교회의 이러한 자진 극복은 큰 수난을 겪지 않으면서 치욕의 걸음을 걸었다.16) 일본 통치자들의 신사에 대한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큰 고난을 겪지 않았고, 그 계통의 학교들은 폐쇄되지 아니하고 해방 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17)
(3)천주교회의 태도
천주교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반대를 하였으나 후에 용인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 천주교 장정에 의하여 1918년과 1931년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 신도는 종교 행위라고 반대하였으나, 1938년 5월 23일에 로마 교황청은 Congregation of Propaganda Fide를 발표하여 신사참배는 황실 존경과 애국 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문화인으로서의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인 노기남 대주교는 "신앙 상으로 아무런 가책이 없이 참가하고 민족감정으로는 분명히 꺼림칙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피하려고 하였다"고 회고 하였다.18) 로마 교황청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대결을 적게 하려는 태도였으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로 35명의 신부 등이 수난을 당하였다.
III. 신사불참배 운동의 전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더하여 갈수록 한국 교회 안에서는 비록 '적은 무리'일지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를 파수하기로 결심한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다. 평양 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 시위와 아울러 선교사들의 강경한 자세는 신사불참배 운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보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지키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1938년 9월 28일에 광주에서 선교사들의 모임을 갖고,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각지 스테이션(Station)은 각기 소속 노회에서 탈퇴하고, 앞으로는 비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전도 전략을 수립하기로 하엿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에서 비록 탈퇴하기는 하였으나 교회로부터 전도 사업에 관한 협조의뢰가 있으면 이 사역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엿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행동이 모두 이와 같지는 아니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 학교운영을 계속하였고, 특히 1938년 10월 21일에는 카나다 선교부가 신사 참배를 할 것과 학교를 계속하여 연 상태에 이르고 행동통일을 기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세의 차이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직결된다. 즉 신사참배에 대한 찬반은 선교사가 받은 신학교육 내지 현재의 신학 사상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19)
1. 합법적 신사 불참배 운동
한국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일본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통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철회 또는 약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한 사람들이 있다. 장로회 증경총회장이며 봉천 신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던 김선두 목사는 신사참배 결의 총회(제27회 총회)가 보이기 4개월 전에 평양에 와서 신사참배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활약 중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어 동경 유학생 김두영의 안내로 일본에 가서 일본정부 요인들을 만나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개하였었다. 김선두 목사와는 다른 형태의 합법적 저항운동이 평북 영변의 박관준 장로에 의하여 전개 되었다. 의사이며 평신도 지도자인 박관준은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전국 교회가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수난의 징조를 보이자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정부 요인들에게 진정키로 하였다. 박관준은 신사참배란 철두철미한 종교 행위이며, 신사참배의 강요는 신교 자유를 허락한 일본 헌법의 위반이며, 신의를 불복종하는 오만한 행위이므로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형벌을 받아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장문의 진정서20)를 작성하여 니시모도 평남지사, 우가끼 총독, 그 후임인 미나미 총독, 아라기 문부 대신에게 보내고, 또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2. 적극적 신사불참배 운동
적극적인 신사불참배 운동은 경향 각지에서 일어난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말한다. 1938년 2월의 평북노회를 시작으로 하여 9월의 장로교 총회 시까지 한국 교회의 공적 기관들의 대부분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하거나 의사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1939년 봄부터 평북, 평남, 경남, 만주 등에서 조직적이며 적극적인 신사불참배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평양신학교의 교내 부흥회에서 "일사각오"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신앙적 자세를 천명한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 학생들에게 신앙적 열의를 더하게 하였고, 신학생들의 신사불참배 운동의 촉진제 구실을 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나 그 대표적인 곳이 평안도 지방과 경남 지방이었다. 평북 지방의 지도자인 이기선 목사는 신사불참배 운동을 위하여 그가 시무하던 의주 북하동 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저항운동을 지도 하였다. 남한에서의 운동 특히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한 남부 지방은 한상동 목사에 의하여 주도 되고, 추진 되었다. 그는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설교를 하였고,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1939년 8월말 경, 부산 수영 해수욕장에서 10여명의 동지들이 모여 한국 교회 앞날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이것이 경남 지방에서의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21) 신사불참배 운동이 표면으로 노출되자 일본 경찰은 1940년 7월부터 전국적으로 신사 불참배 운동자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45년 5월 18일에야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벌이 내려졌으나 이미 순교의 면류관을 쓴 사람도 있었다. 한국 교회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의 하나였었다.
3. 소극적 불참배 운동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소극적으로 목회자가 교직에서 떠나고, 교회가 학교를 폐교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한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소극적인 신사불참배 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선교사들의 교육 은퇴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선교사들은 신앙의 원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학교를 경영치 아니하고, 교육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소극적 신사불참배 운동이기도 하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사참배를 피하여 교역에서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신앙적 도피처도 여러 곳에 생겼으며, 그 대표적 사례가 이만집 목사가 세운 금강산 수양관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소극적 저항운동은 교역자들이 지하로 숨어 산야의 고독을 겪으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는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 졌다. 또 해외로 망명하거나 사회와 관련을 끊고 산 속에서 신앙생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다.22)
IV 신사불참배 운동자들의 민족주의적 민족주의적 배경
일제는 신사불참배 운동자들을 기소할 때 그들이 국체변혁과 천황에 대해 불경죄를 범하엿다고 하였다. 일제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종교를 앞세우고 배일운동을 하는 자들로 보았다.23)
1.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가 행동적인 애국운동을 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민족주의적 배경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기철은 정치 문제에 대하여 정교분리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견해를 취하였다. 그러나 주기철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으니 이는 그의 교육 배경과 직결된다. 주기철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 청빙을 받게 된 배경 중의 하나가 그의 민족주의적 신앙사상일 것이다. 주기철은 교회 안에서의 정치 활동을 배격하였으나 한국인이 한국을 사랑하는 민족애를 배격한 것은 아니다. 주기철은 다만 성경적 진리에 순종 하였다. 기독교 진리는 불의자에게 스스로 도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24)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 이것이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었다.
2. 이기선 목사
북부 지방에서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불참배 운동을 전개한 이기선 목사에게서도 민족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그의 설교와 강론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표출되고 있는데, 예심종결서에 나타나는 그의 국가관은, "또 일제의 천황 이라도 여호와 신께로 부터통치권을 부여 되어서 일본을 통치하도록 명령을 받고 잇는 것에 불과 하므로 신의를 전해서 이것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 필경 일본제국의 전망도 한갓 여호와 신의 뜻대로 된다.25)
3. 한상동 목사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도 민족주의적 요소가 있다. 그는 사립 실용학교와 동래고보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고, 3·1운동 때 다대포에서 만세 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 되기도 하였으며,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할 때 40일간이나 마산경찰서를 드나들며 고생한 바 있다.26)
4. 손양원 목사
손양원의 경우, 일본의 천황 통치가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이것은 종국에 가서 멸망한고 만다는 사상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결과론에 있어서 이들은 신앙을 통하여 민족주의 의식을 나타내었다.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사례들에서 공통된 것은, 신사불참배 운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애국 운동을 하지 아니 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키려는 의지 속에서 신사참배를 반대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결론: 신학의 양극화와 신사의 말로
1. 신학의 양극화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두 가지의 다른 견해들이 생겨 충돌과 마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평양신학교수들 사이에도 찬반이 나뉘었고, 일부 선교사들도 국가 시책으로 수용하였다.27) 이미 한국 장로회는 보수와 자유라는 두가지 신학조류로 인하여 1930년대 중반에서부터 심한 진통을 겪어 왔다. 이들의 관계는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로 인하여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폐교하자 서울에서 1939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김재준, 송창근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자거나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이었다. 조선 신학교는 "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설립의의로 삼았다.28) 또한 평양에서는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39년 11월에 평양에 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제 당국의 인가를 받아 교육하였으나 일본화의 길을 갔다.29) 위의 두 신학교의 공통된 점은 신사참배의 수용과 자유주의 신학경험이란 점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수난 당하는 사람들이 감옥으로, 지하로, 해외로 나갔으며,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한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공동현상을 자유주의자들이 메꾸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 장로교 신학의 양극화를 더욱 자극하였다.
2. 신사의 말로
이른바 현인 신 으로 군림하던 일본 천황도 8.15 종전과 함께 '인간'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종전과 동시에 각 도청을 통하여 "종전조서봉재봉고제"를 극비로 거행하라는 명령을 신속히 하달하였고, 각 신사에서는 계속 승신의식을 거행하라고 하였다. 또 조선신궁의 어령대는 재빨리 비행기로 일본 궁내성에 보내졌고, 각 신사들은 계속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많은 신사들은 해방의 날과 그 다음날인 8월 16일에 파괴되거나 소각되었다. 해방후 8일간에 소각된 것만도 136건에 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진주한 미군장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철수 시킬 때, 군인, 신궁, 그리고 창기의 철수 날짜를 지적하였으니, 이 세 가지가 군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도구였고, 그들의 사상을 구현시키는 방안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였고,30) 또 한국 장로교회의 사상적 양극화를 통한 분열의 요인과 함께 일본 자체의 패망을 촉진시킨 결과를 낳았다.
1 김남직, 일제의 사상체제와 한국교회의 변절, 신학지남 제54권 2집, Vol. 212, 1987. 여름호, pp. 184-185.
2 이것은 국가신도와 직접적 관계가 있다. 유럽의 헌법제도를 시찰하고 난 후 1888년 6월 추밀원의 헌법 제정 황의 석상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가 종교의 특성을 나타내었다. "구라파에서는 헌법 정치가 1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백성들이 그것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사회의 기축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종교가 미약하며, 굳이 기축 삼을 만한 것을 찾는다면 황실이 있을 따름이다."고 하였다.
3 Raymond Hammern Japan's Religious Ferment (New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pp. 31.
4 제정일치의 원리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1869년에 신기관을 부활시켰다.
5 1869년에는 신기관에서 가신전이 낙성되고, 1870년에는 천황수호신인 팔신과, 역대 황령을 그곳에 모셨는데 이것이 훗날 궁중삼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6 1882년 태정관 포교에 의하며, "신관은 교도직의겸보를 그만두고, 장의에 관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7 김남직, Op. cit., pp. 176.
8 조선총독부총계연보, 명치 40년, p. 658에 "우리 동포들은 히루마루기를 등에 달고 이들 지역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소위 해외의 신사도 도처에서 봉제되기에 이르렀던 것은 당연하였다."고 기록하였다.
9 F. A. Mackenzie, Kirea's Fight for Freedom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 p. 211.
10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서울 : 기독교문사, 1980). p. 177.
11 김양선, op, cit,
12 조선총독부 관항문서과, 논고, 훈시, 황술총감(경성, 조선총독부, 1941), p. 2.
13 1938년 이월에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명칭, 교육내용을 일본인 학교와 같게 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5월에는 국가 총동원법의 한국에서의 적용,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조직, 1939년에는 창씨개명, 국민징용령 등을 내렸다.
14 김양선, op. cit., p. 187
15 동아일보, 1938년 8월 27일자
16 문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428. ; 문상희, "한국교회수난사", 사상계, 1968년 9월로, pp. 210.
17 Ibid.
18 노기남, "노기남 회고록", 창조 1972년 11월로, p. 133.
19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Th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29, NO. 2, 1967, pp. 159f
20 이 진정서는 김명선, op, cit, p. 192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21 이상규, "한상동론",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사상(부산 : 광야, 1986), p. 222.
22 전남 지방 도압 성자 이 현필의 경우이다. cf. 엄두섭, 도암의 성자 이현필(서울 : 은성, 1986)
23 일제의 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운동가로 보였을 것이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었던 상황속에서 교회만이 조직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24 민경배, 교회와 민족, p. 396.
25 이기선, 예상종결서.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이들, p. 256.
26 동향신문, 1972년 11월 11월자
27 박형룡, 남궁혁 등은 반대의 입장이었고 채필근 등은 신사참배를 문제 삼지 않았다. 선교사들 가운데 언더우드 등 일부 북장로교 선교사와 캐나다 선교부가 신사참배를 용인하였다.
28 주재용 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 : 풍만출판사, 1986), pp. 153 - 154, 271f.
29 김영재,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신앙", 신학지남, 51권 4호, 통권 203호., p. 142.
30 신사참배의 수난에 대해서는 김남직, 한국교회수난사를 참조하라.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영적 대각성 부흥운동과 이준 열사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된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인 2007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하나님과 민족 앞에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 통절한 심정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해 온 것을 고백합니다. 교회의 참된 각성과 부흥은 지난날의 죄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죄책 고백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영적각성과 부흥의 은총을 입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강압에 못 이겨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신앙의 정절과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신사참배에 가담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라는 일제의 거짓논리를 수용하여 성도들을 기만하고 신앙양심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식에 묵도,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 이른바 일본식 국민의례를 순서에 넣어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연수회에서 일제의 시조신(始祖神) 천조대신(天祖大神)의 이름으로 신도세례(神道洗禮)를 받은 죄를 고백합니다. 부당한 일제의 강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맞서지 못하고 일제 신사에 머리 숙였던 부끄러운 죄를 통절한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2.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재산을 국방헌금, 애국운동기금연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갖다 바친 죄를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국민총력의 허울 아래 일제의 군국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일제의 전쟁물자 징발에도 가담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일제 군국주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내 몰았던 죄악에 대해 민족의 역사 앞에 고개 숙여 사죄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교회에 걸었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제에 굴복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족의 가슴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긴 우리의 죄악에 대해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용서를 빕니다.
3.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의 죄를 참회하고 청산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해방 후 신사참배에 굴복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회피하였습니다. 이로써 신사참배의 죄악을 참회하고 거룩한 교회로 새롭게 거듭날 것을 주장하는 형제들과 분열하였습니다.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아집과 완악함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킨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통감합니다. 우리는 신사참배 때문에 갈라진 형제자매들에게 회개를 거부했던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며 화해와 협력의 손을 내밉니다.
우리는 교회가 또다시 하나님과 민족의 역사 앞에 부끄러운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수치스러운 죄악을 기억하며 역사의 교훈으로 길이 간직하고자 합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출발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어떠한 불의와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영원한 진리로 선포하며 한국교회의 개혁과 올바른 성장, 그리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화해 ․ 평화선교에 적극 앞장서고자 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지난 날 우리의 죄악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고, 100년 전 이 땅의 교회 위에 내려주셨던 성령을 오늘 다시 이 땅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에 부어주시기를 엎드려 간구합니다.
2007년 9월 1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임명규 및 총회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