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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불국사는 흔한 절 이름이 아니다. 이 거친 사바 세계의 우뚝 선 불국 세계의 상징이다.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배려에서 건설한 부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는 높은 석축 기단 위에 건설되었다. 불국을 떠받들어 지탱하는 석단은 상하 2층으로 되었는데 하층은 거대한 자연석을, 상층은 원래 크고 작은 냇돌을 쌓아서 안정감을 주었다. 석단은 아래의 사바세계와 위의 불국 정토로 구분했다. 석단 아래는 연못이 있어 사바세계 차안과 불국 세계 피안으로 나누어 놓고 있다. 연못 속에는 불국 세계의 휘황한 누각과 탑이 아롱져 꿈결인 양 손짓하고 있다.
김대성이 건설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나라는 화엄의 불국 세계였다.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은 화엄 불국사였는데, 이는 최치원의 ‘화엄불국사아미타불화상찬’으로 알 수 있다.
‘화엄불국’이란 화엄의 불국토란 의미다. 화엄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세계이고 온갖 꽃으로 장엄된 세계이다. 화엄의 불국토는 국토해와 세계해로 구분 설명된다. 붓다 깨달음의 세계, 해임 삼매로 깨달아 얻은 비로자나불의 세계,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본질적인 세계가 국토해다. 침묵하는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보현보살은 그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했다.
석굴암의 과학
1. 정교한 인공건축물
순수 인공 석굴인 석굴암 내부는 철저한 좌우 대칭으로 이뤄졌다. 석굴암은 앞은 사각형이고 뒤는 원형이다. 사각형의 전실에는 양쪽에 각각 4개의 입상이, 비도(통로)에는 2개의 입상이 마주보고 서 있다. 원형인 주실엔 15개의 입상이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을 둘러싸고 있다.
수리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석굴암은 더욱 과학적이다. 석굴암은 12당척(1당척은 29.7㎝)을 기본으로 설계됐다. 주실은 반지름이 12당척인 원형이며 참배자의 위치는 12당척의 두 배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참배자가 본존불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다. 그리고 비도와 전실은 주실의 입구에 내접하는 12당척의 삼각형을 세 배 확장한 정삼각형에 내접하는 곳에 위치했다. 또 감실은 12당척의 정사각형이 만들어낸 황금비에 위치한다.
2. 자연속에서 숨쉬는 석굴암
석굴암을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 숨쉬게 한 비밀은 원활한 통풍과 온·습도 조절장치. 석굴암에는 수많은 통풍장치가 있다. 우선 석굴암 주실에 위치한 10개의 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돌 사이에는 작은 틈이 존재해 공기를 순환시킨다. 또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위에 위치한 광창은 채광은 물론 원활한 통풍이 이뤄진다. 이밖에도 본실 지붕 외벽엔 직경이 10㎝가 넘는 돌들이 1m가량 쌓여있는데 이 자갈층을 통해서도 공기는 안팎을 넘나든다.
자갈층은 제습 기능도 겸비했다. 외부의 습하고 더운 공기는 자갈층을 지나며 수증기를 자갈층에 남기고 차가워져 내부로 유입된다. 때문에 석굴암은 차고 건조한 공기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자갈층은 낮에는 물을 머금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도차에 의해 바깥으로 수분을 방출하고 다음날을 준비했다.
무엇보다도 석굴암의 습도 조절을 좌우한 지혜는 바닥 밑을 흐르는 지하수였다. 이 지하수는 바닥의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하게 만들어 불상 표면의 결로현상을 막았다. 석굴암 천년의 신비는 이같은 자연친화적인 과학 원리들에 의해 유지됐다.
자갈층 밖에서 들어가는 공기는(특히 장마철에는) 습기 차고 더운 상태이다. 이것이 차가운 자갈층 내부를 통과하면서 수증기는 응축하여 자갈층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이렇게 차갑고 건조해진 공기만이 석굴암 내부를 향하여 흘러 들어간다. 자갈층 내부에서 차가와진 공기는 밀도가 높으니까 자연히 아래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달리 송풍기가 없어도 이런 방식으로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주실 내부를 꾸준히 채우게 되고, 석실 내부는 언제나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 석굴암의 제습메카니즘의 비밀
석굴암 비밀은 '열린 통풍 구조'에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송태호 교수는 석굴암이 1,000년 이상 원형을 보존하게 된 비밀을 과학적으로 추적했다.
석굴암은 원래 출입구가 개방돼 외부 공기가 쉽게 드나드는 열린 구조였다. 본실 지붕인 천개석 위에는 직경 수십cm의 돌들이 1m 정도 쌓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교수는 석굴암의 독특한 덮개 구조에 주목했다. 그는 돌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다공성 구조물은 곳곳에 공기층을 함유하고 있어 외부 공기가 안으로 쉽게 드나들면서 열전달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직경 5∼15cm 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다공성 구조물(원래 석굴암의 상부구조)과 시멘트, 물, 모래, 자갈 등을 섞은 콘크리트 구조물(일제가 보수한 상부구조)을 만들었다. 이후 98년 6월 7일부터 7월 25일까지 석굴암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시간대별로 측정한 후 실험실에서 이와 똑같은 조건을 만들어 두 구조물을 비교했다.
실험결과 다공성 구조물은 외부 온도와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4.8도였는데 다공성 구조물은 온도차가 2도밖에 안돼 바깥 온도와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었다. 이슬이 맺혀 석굴암을 훼손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결로 현상은 예상대로 콘크리트 구조물에서만 발견됐다. 특이한 것은 장마가 그치고 맑은 날이 시작되면서 결로 현상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점이다.
송교수는 이를 이슬점의 원리로 설명한다. 비가 그치고 갑자기 기온이 올라가면 공기는 수분을 많이 함유해 고온다습한 공기가 된다. 이 공기가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과 만나면 함유할 수 있는 수분량이 적어져 여분의 수증기가 물방울로 응축되며 이슬이 생긴다.그러나 다공층 구조물은 자연 대류의 영향으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다. 장마철 동안 비가 오면 다공층은 차갑게 식게 된다. 날이 개면서 고온다습한 공기가 외부에서 들어오더라도 다공층을 타고 내려오면서 수분이 응축된다.이 과정에서 제습효과가 생겨 석실 내부에는 건조한 공기만 들어오게 된다. 밤이 되어 외부온도가 낮아지면 석실 안의 따뜻한 공기가 상승해 다공층을 따라 빠져나가면서 돌에 묻어 있던 물기를 증발시킨다. 그러므로 석굴암 내부는 항상 건조한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송교수가 밝힌 석굴암의 구조를 우리 생활에 이용할 수 있다. 송교수는 시골 야산에 석굴암과 같은 동굴을 만들면 농산물을 사시사철 시원하게 저장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또 납골당의 경우 2∼3대만 내려가면 화장한 뼈가 부식되고 상하는데 납골당을 석굴암처럼 지으면 오랫동안 조상의 뼈를 보존할 수 있다.
- 현대인의 손길이 망친 고대 과학
20세기 들어 석굴암은 일본인들에게 개·보수라는 치욕을 당한다. 일제는 1913년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한 후 재조립을 시도했다. 이 때 당시 첨단 건축법으로 각광받던 콘크리트를 사용해 석굴암의 외벽을 시멘트로 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석굴암 아래로 흐르던 지하수를 차단하고 물길을 돌렸으며 석굴암 둘레도 시멘트로 막았다.
조상의 눈부신 과학 기법들이 모두 파괴된 것이다. 결국 석굴 내에 결로 현상과 누수가 생겼고 2차, 3차에 이르는 보수작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은 화강석 벽도 손상시키기 시작했다.1960년대엔 우리 손으로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콘크리트 외벽 바깥쪽으로 약 1m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웠다. 하지만 결국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계에 의해 냉방과 온방, 습도조절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리벽으로 보호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석굴암(국보 제24호)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뒤 일제강점기에 1913~15, 1917, 1920~23년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본인들의 잘못된 보수는 1962~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는 앞으로 문헌자료와 함께 중수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만 창건 당시의 석굴암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
<삼국유사>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의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경주의 모량리에 가난한 늙은 아낙이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성과 같다고 해서 ‘대성’이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다. 대성은 ‘복안’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여 밭을 조금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하루는 ‘점개’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청하자 복안은 베 50필을 선뜻 시주했다. “누구든지 정성껏 보시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를 얻고 안락장수할 것입니다”라는 점개스님의 말을 들은 대성은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이렇게 말하며 졸랐다. “제가 스님의 축원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생에 닦은 선이 없어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니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 더욱 고통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품을 팔아서 얻은 밭을 시주하여 뒷날의 과보를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맞는 말이라며 밭을 점개스님에게 보시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대성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은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깜짝 놀란 김문량이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과연 대성이라는 아이가 죽었으며, 하늘에서 말소리가 들리던 그날 김문량의 아내는 아기를 잉태하였고 열 달 후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더니 7일이 지난 후에야 손을 폈는데 ‘대성’이라고 새긴 금패가 나왔다. 이 아이가 모량리 대성의 환생이라고 확신한 김문량은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고 짓고 모량리의 대성의 어머니를 맞아들여 함께 살았다. 훗날 김대성은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에서 사라져 버린 5층소탑
1909년 가을의 일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 일원의 고적을 보러 온 일제 고관일행이 있었다. 2대 통감이 된 소네아라스케가 초도순시라 하여 수행원을 거느리고 경주를 찾은 것이다. 그들은 불국사로 해서 석굴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온데 간데 없이 증발했다. 소네가 개인적으로 탐을 내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선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인들조차 그것은 소네가 가져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증언기록들이 그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먼저 경주박물관 초기(1930년 전후)에 촉탁으로 관장을 대리했던 모로가의 증언이다. "지금 석굴암의 9면관음(11면 관음의 잘못) 앞에 남아 있는 대석위에 불사리가 봉납됐었다고 구전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는데 지난 명치 41년 봄(42년 가을의 착오, 1909)에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간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음은 한국의 미술과 민예의 열렬한 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언급이다. "목격자의 술회를 빌면 11면관음 앞에 작고 우수한 오층소탑 하나가 안치돼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1925년까지 10여 년가 경주에 살면서 신라의 유적을 조사, 연구한 후 1929년에 '조선 경주의 밀수' 이란 책을 낸 나카무라도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타(석굴암의 본존상) 뒤의 9면(11면)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쓸쓸히 대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리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석굴암의 오층소탑의 증발이 소네 통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은 명백하다. 1976년의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 도 과거의 굴내 오층소탑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소네에 의해 약탈되었다" 고 명기하고 있다. 석탑을 약탈한 후 석굴암은 탑상을 구비하였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 국보 중의 국보인 석굴암으로서는 커다란 상처이다.
석굴암의 오층소탑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해방 후 국내 관계전문가들이 일본안의 행선지를 백방으로 탑색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국내 전무가들은 아직도 정보추척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오층소탑이 일본의 어딘가 에서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믿고 있다.
본존불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은 높이 총 높이 326㎝, 대좌 높이 160㎝, 기단 상대석 폭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인 얼굴 상은 안정감이 있으며 종교적인 숭고함을 띄고 있다.우리가 뚜렷한 명칭 없이 본존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석굴암 본존 부처님은 그 존재를 둘러싸고 불교학계와 고고미술사학계에서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본존 부처님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불교계의 주장은 전통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고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했던 황수영 박사의 아미타 부처님설은 7~8세기의 역사적인 사실을 추정해서 당시 세워진 본존 부처님 대부분이 아미타 부처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두 학설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이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1998년 퇴임)로 재직 중이던 신현숙씨의 경전적 해석, 특히 석굴암 만다라설은 본존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일 가능성에 대해 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렇듯 석굴암 본존 부처님은 빼어난 작품성뿐 아니라 통일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논하게 하는 학술적 가치 또한 크다. 동해를 바라다 보는 석굴암 본존 부처님은 그 형태의 위엄 만큼이나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통일신라 불교의 찬란함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석굴암의 구조와 특징
천장은 궁륭형(穹窿 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석굴암의 불상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석굴암의 신비
우주의 원리를 응용하여 아름다운 비례의 극치를 이루는 석굴암은 우리나라 불교 미술을 대표한다. 자연 암벽을 직접 뚫지 않고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든 석굴암의 독특한 건축법은 세계의 자랑거리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은 모두 자연의 암벽을 뚫어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또 긴 세월에 걸쳐 같은 장소에 여러 개의 석굴을 완성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석굴암은 크고 작은 화강암을 차례차례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립하였다. 바로 이 점이 석굴암 건축사의 특색이다.
10분의 1 비율은 기원전 25년 헬레니즘 사상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주창한 '균제비례(Symmetry)'와 맞아 떨어진다. 그는 "건축미는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룰 때 얻어진다"고 했다. 균제비례는 인체에서 얻어진 것이며 인체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다. 이에 석굴암 본전 불상도 이런 균제비례가 적용되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설굴암 본전불은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의 비율로 되어 있어 본존불상 자체를 1로 봤을때 10분의 1인 균제비례가 적용되었다.
신라인들이 당시 비트루비우스의 균제비례를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비트루비우스가 알아낸 안정감과 아름다움의 비율을 이미 알고 있었고 석굴암의 공간마다 이상적인 비례배분을 적용했다. 그리고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세로 또는 세로:가로의 비율이 1:2인 직사각형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니 신라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에 놀랄 뿐이다.
또한 후실 돔형 천정 반지름은 하루 12시를 나타내고,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돔의 지름 24척은 하루의 24시간을 나타내는 우주 공간의 축소 구조이다. 돔의 중심과 전실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동남 30도)은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후실의 돔 천정은 당시 천문도가 응용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석굴암의 건축물에 적용된 응용 수학은 통일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기초적 수학을 총망라했을 정도로 완벽하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착공되어 금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약 1200년을 지탱해 오고 있는데, 이는 석굴암이 평면 기하학을 기초로 하는 입체 기하학의 지식도 발휘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하학, 천문학, 종교, 물리학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진리를 모두 담고 있는 석굴암의 예술은 그래서 더욱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만들어져 모진 세월을 버틴 석굴암에 일제 때부터 보수공사를 해오면서 오히려 누수현상, 습기, 이끼 등이 생겨났고,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풀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첨단과학기술도 1,200년 전의 신라인들의 과학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까. 석굴암은 그 신비함을 모두 감춘 채 지금은 곳곳에 시멘트만을 뒤집어쓰고 그 운명을 우리의 손에 맡기고 있다.
팔부신중
사천왕四天王
전시로가 주실을 연결하는 통로의 좌우벽에 배치되어 있다. 수미산의 사방을 관장한다는 천왕으로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으로 부른다. 전실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앞에 남방 증장천왕, 뒤쪽에는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앞에 북방 다문천왕과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배열되어 있다.
천부상과 보살상
십대제자
석굴 후벽 중앙에 십일면관음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곧이어서 각각 5구씩 나한(羅漢) 입상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 왼쪽에 있는 십대제자상이다. 석가여래의 제자 중에서 이름이 높은 수제자 10인을 말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 나한상은 동양에서도 첫째로 꼽을 만큼 훌륭한 부조상을 하고 있다.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부처님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 부처님 바로 뒤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위에 작은 아홉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 보살님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금강역사
감실
석굴암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