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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리: 2003.9.21
06:00광점교-06:15광점동-06:45어름터-09:00망바위-09:20독바위-10:40쑥밭재-11:40국골4거리-12:20하봉-13:00촛대봉-13:20대륙폭갈림길-14:10합수점-14:40대륙폭포-15:00칠선폭포-16:00비선담-16:20옥녀탕-17:20두지터-17:50추성리-18:05광점동
오늘 산행은 지난 7월 말 칠선골에서 추락하여 다리를 다친 후 2개월 만이다. 그동안 지리가 그리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젖은 짚단 태우듯 애태우며 기다려왔다. 깁스를 5주 만에 풀었으나 무릎 통증은 여전했고 매일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와 집에서 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정성껏 하였다. 올해는 이렇다 할 교육과 연수가 없어서 지리산행을 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어서 8월에는 제법 배낭을 빵빵하게 꾸려 장기간 지리산행을 하면서 여유롭게 보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깁스를 푼 후 날마다 걷기운동을 했으며 계양산을 자주 올랐다. 이제 다리 힘도 많이 좋아져서 자신감을 회복했고 지리산 입산 날을 틈틈이 노렸다.
토요일 밤 자정 집에서 출발하여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밤이 깊어가는 서울외곽순환도로는 구간 구간 차선을 좁혀가며 공사를 하여 정체가 되어 짜증이 났는데, 이것은 오늘 산행에 대하여 결코 순탄치 않은 예감을 갖게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대전을 지나 판암과 진주로 빠지는 I.C를 지나쳐 옥천까지 진행하다가 다시 되돌아 대진고속도로에 들어섰으며, 장수에서도, 인월에서도 헷갈려 헤매더니 나중에는 지리산에서도 귀신에 홀린 듯이 장시간을 헤매 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인월에 들어오니 날이 밝아온다. 아까 남쪽 하늘의 달을 보았으니 날씨는 괜찮을 것 같다. 짙푸른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산내와 마천을 지나 의탄교를 건너 추성리에 도착하여 광점교에 주차하였다. 광점동에서 산행을 하는 것은 1년 만이다. 옹기종기 산비탈에 몰려있는 광점동 마을을 지나 어름터 계곡으로 들어선다. 강력한 16호 태풍 매미와 많은 비의 영향으로 두꺼비 등처럼 길가는 거칠게 표면을 들어냈고 계류를 건너는 철다리는 처참하게 끊겨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계곡 아래로 내려가 바위를 위험스럽게 타고 건너 산비탈을 걷는다. 수풀이 우거지고 인적 없던 길을 따라 걸으니 금세 등산화와 바지를 적신다.
오늘도 역시 어름터는 조용하다. 집 앞 계곡 쪽으로 길게 평상을 이어 만든 정자가 생겨났고, 집 툇마루에는 등산복과 코펠도 보인다. 이젠 여기서도 민박을 하나? 쑥밭재를 향해 직진 길을 따라 걸어 오른다. 하지만 10여 분을 오르니 길이 끊긴다. 헐. 아무리 살펴도 길의 흔적은 없다. 다시 어름터로 후진을 하여 그곳에서 길을 찾았으나 곧 끊어져 30여 분을 어름터에서 미로를 헤매듯 어이없이 시간을 허비한다. 이상도 하다. 연전에 양봉 터를 옆에 끼고 손쉽게 쑥밭재까지 올랐는데. 지금은 그 길을 헷갈려 찾을 수가 없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착각했다는 말인가? 혹 사람이 있으면 여쭤보련만 어름터 집은 침묵을 지키며 고요하다.
할 수 없이 계곡을 건너 표지기를 따라 오르다가 우측 능선 쪽으로 붙기로 한다. 더위를 느껴 재킷을 벗어 몸을 가볍게 하고 행장을 추슬렀다. 얼마간 계곡 우측을 따라 걷다가 등로가 산비탈로 접어들었는데 갈림길이다. 나중에 이름 없는 암봉에 올라서야 3년 전에 올랐던 이 길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오늘 산행은 시계가 없어서 불편할 것 같다. 산행하면서 틈틈이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시간을 보는데 귀찮기 짝이 없다. 부평의 L 백화점으로 A/S를 보낸 지 이십여 일이 되었건만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이른 아침 짙은 어둠 속의 오름 길은 산님이 다녔던 흔적은 거의 없다. 작은 계곡 사이로 오름길은 이어졌고 앞이 훤해져 지능선에 섰더니 1시 방향의 저편에 안부가 낮은 쑥밭재가 보인다. 작은 능선 날 등을 타고 능선 쪽으로 붙었다. 좌측에도 작은 능선이 또 있는걸 보니 다소 지형적으로 복잡한 듯하다. 평소에도 이쪽의 지도를 유심히 보면 길이 애매하고 작은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릿대 숲이 나오는 능선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이곳이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길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졌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딜까? 우측으로 몇 걸음 옮기니 3년 전에 올랐던 그 바위다.
숲이 우거진 이 능선에는 이곳 망바위 말고는 딱히 조망할 데가 없어서 산세를 잘 살폈다. 서쪽에는 하봉에서 뻗어내린 장쾌한 초암능선. 바로 아래는 국골. 북쪽으로는 마천쪽이 보인다. 남쪽을 바라보니 치밭목산장이 있는 비둘기봉과 쑥밭재로 추정되는 낮은 안부가 보였다. 그렇다면 이 암봉을 기준으로 급격히 북쪽으로 떨어지는 우측길은 두류 능선을 따라 국골이나 다시 어름터로 빠지던지 성안마을로 가는 길로 추정을 해본다.
위로 향한 남쪽 길을 웃자란 산죽을 해치고 정신없이 치고 나가니 바로 앞엔 눈에 익은 독바위다. 어럽쇼. 무지하게 헷갈린다. 이상한 일이다.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가는 길을 버리고 분명히 두류 능선 쪽으로 붙었는데 어떻게 독바위 쪽으로 왔단 말인가? 일단 독바위에 올라 조망을 살피기로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늘어진 밧줄을 잡고 독바위에 올라 사위를 살피니 광활한 동부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남쪽 아래로는 대원사계곡과 조갯골이 보이고,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상내봉과 그 능선. 그리고 서왕등재와 동 왕등재를 잇는 능선 너머로 멀리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보인다. 바로 앞에는 향운대가 보이는 두류 능선이다. 다시 말하면 두류 능선 위에는 중요한 갈림길이 있는데. 오름길이 갈라져 하나는 말봉을 지나 국골 사거리 쪽으로. 다른 하나는 쑥밭재가 있는 독바위 쪽으로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저 아래 불쑥 꺼진 안부가 바로 쑥밭재인데.
독바위에서 내려온 후 방향을 잡고 쑥밭재를 향해 갔으나 또 어디서 길을 놓쳤던지 아까 올라온 능선 길에서 만난 암봉까지 원위치를 하고 말았다. 정말 황당한 일이다. 이렇게 헤맨 원인은 수풀이 엄청나게 우거져 조망을 막고 있어서 나의 현 위치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독바위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쑥밭재를 향하는데 조갯골로 빠지는 길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가 하봉으로 향하는 것을 확신하고 산행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동부 능선은 이리도 어렵다.
예상외로 어름터와 이곳에서 2시간 가까이 알바를 하느라 산행 시간이 늘어지게 되었다. 물기에 적신 바지를 탈탈 털고 행장을 다시 추스른 후 쑥밭재에서 다음 도착지인 국골 사거리로 향한다. 으음.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있다면 확실히 개념정리를 해야겠구나. 길을 잃고 장시간 헤맨 탓으로 국골 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털퍼덕 길바닥에 주저앉아 왕만두를 허겁지겁 먹는다. 아까 새벽에 덕유산 휴게소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지금까지 산행했으니 허기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 홀로 산행을 하면 늘 이렇게 배를 곯는다.
아직도 길이 생소해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하봉쪽인지 의심이 갔으나, 국골 사거리에 도착해서야 안심하고 두 다리를 뻗고 휴식에 들어간다. 국골 방향과 세재 방향을 각각 지시하고 있는 이정표에는 과태료 100만 원 표시가 되어있다. 지금의 시각이 11시 40분. 사거리에서 하봉까지는 고도를 높여야 하므로 무척이나 힘에 겹다. 특히 오늘같이 알바한 날은 더욱 힘겹다. 다시 배낭을 들쳐메고 하봉을 향하여 오름 짓을 계속한다.
하봉. 하봉은 지리산에서 상당한 고봉이다. 그 높이가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제석봉 다음이다. 그러니까 지리산에서 4번째의 봉우리다. 특히 하봉 능선은 겨울철에 적설량이 많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보통 산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오르기 힘든 봉우리이다. 게다가 길을 잃기가 쉬우니 경험자가 아니라면 산행을 삼가야 한다. 아직 무릎의 통증은 없었으나 지치고 허기가 져서 한 걸음씩 꾸준히 인내력을 가지고 하봉을 향한다.
무덤 갈림길을 지나 12시가 넘어서야 하봉 정상에 섰다. 하지만 조망은 잠시뿐. 중봉 쪽 계곡 아래에서 뭉실뭉실 안개꽃을 만든 구름이 솟아오르다가 부서져 사방은 곧 구름바다에 휩싸인다. 하봉에는 부산에서 온 2명의 산님이 있어 그곳에서 지형을 얘기하다가 어름터로 내려가는 길을 일러주고 물 한 모금 걸치고 하산을 시작한다. 홀로 산행인데 초암능선을 타다가 촛대봉을 지나 칠선골의 대륙폭포 쪽으로는 길이 험한데 괜찮을까. 혹시 지난번처럼 추락이라도 한다면 어떡하나. 만약 운신할 수 없는 부상이라도 한다면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려서야 한다.
촛대봉을 지나 초암릉으로 빠지는 길을 위쪽으로 흘려보내고 아랫길로 과감히 들어선다. 물론 초암능선 방향으로만 표지기가 있을 뿐 합수골 쪽 들머리에는 표지기가 없다. 그러나 지리 산꾼이라면 금세 감이 잡힐 것이다. 내리막길은 무척이나 아슬아슬하며 위험스럽다. 곳곳에 물에 휩쓸려 간 흔적들이 발견된다. 푸른 이끼가 무성한 너덜이 이어지기도 하고, 껍질이 완전히 발가벗겨져 반질반질한 상태의 나목이 가로막기도 한다. 제법 많은 수량의 물을 피해 바윗돌을 건너뛰고 내려가며 작은 폭포수와 암반을 만나기도 한다. 때에 따라 물줄기가 떨어지는 벼랑을 우회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내려서기도 한다. 조심조심 바닥에 스틱을 찍어가며 30여 분 내려서야 차츰 순해진다. 하지만 아래쪽을 바라보니 아직도 급경사가 상당히 길게 보여 대륙폭포까지는 결코 걸어 내려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칠선골에는 이러한 지계곡이 여러 개가 있는데, 역시 지리산의 최대 계곡답게 험하고 두렵다. 이러한 곳이기에 일본강점기에 징용과 학병을 피해 들어온 젊은이들이 무장투쟁할 비트를 만들 수가 있었고. 결국, 일본 경찰은 산세가 두려워 함부로 그들을 토벌하러 오지 못했다. 특히 이런 곳에 무장한 빨치산들이 숨어있다면 어떻게 국군토벌대들이 감히 들이닥칠 수 있겠는가?
바짝 긴장하며 조심조심 내려가니 앞이 훤해 오며 큰 계곡과 만난다. 이 계곡 역시 중봉과 하봉에서 뻗어내린 칠선의 지계곡일 뿐이다. 그런데 계곡이 넓게 발달해 있고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어 이곳이 혹시 칠선의 본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계곡이 넓어도 아직 대륙폭포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언제가 이 계곡을 치고 올라 중봉과 하봉의 안부로 오르리라 생각도 해본다. 지리산을 오른다고 많이도 올랐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그 능선과 그 골짜기가 얼마던가. 지리산은 이처럼 광활한 산이다.
이제 하산길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넓은 암반과 바위를 건너뛰며 내려가니 그 끝자락에는 지리산에서 가장 웅대한 대륙폭포가 포말을 일으키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대륙폭포 좌측에는 한사람이 어렵고 옹색하게 지나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나의 생명줄이었다. 만약에 그 길이 없다면 달리 우회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장관이구나. 퍼질러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1년 전 이곳에서 철O님과의 산행 때 아침을 먹던 생각이 났다. 아래에 내려서니 역시 대륙폭포 주변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무지개 색채를 띤 물방울이 허공에 날리며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비경을 연출한다.
이제 본류를 찾았으니 칠선골 하산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지금 시간이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며 햇살도 한풀 기세가 꺾였다. 아마 북쪽 깊은 지리산 칠선계곡인지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상외로 대륙폭포 부근에서 표지기를 찾지 못해 무조건 계곡을 치고 내려가기로 했다. 이십여 분을 그렇게 치고 내려가니 칠선폭포. 칠선폭포에서 한숨을 돌린 후 길을 찾아 하산하는데 역시 칠선계곡은 곳곳이 험준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어 그저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오늘같이 평상시에도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험난한데. 이곳에서 비를 만나면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에 마폭포에서 폭우를 만나 선녀탕까지 나는 정말 반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때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하산하였는지 기적처럼 느껴지고 꿈만 같기만 하다.
어렵사리 표지기를 확인하며 내려가는 데 아니다 싶으면 마음을 비우고 돌아섰고, 표지기가 끊기면 반드시 뒤로 돌아 나와 다시 찾고 침착히 하산하였다. 그래서 하산길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비선담과 옥녀탕을 지나서야 한숨을 돌린다. 추성리-선녀탕까지는 탐방 허용지역이기에 길은 양호하다. 옥녀탕 직전에서 지난번 산행 때 추락했던 곳을 찬찬히 살핀다. 역시 벼랑 아래로 추락하면 어림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의하여 지났다.
이후 선녀탕과 두지터를 지나 하산길이 한참 이어졌는데 긴장이 풀렸던지 다소 몸이 무겁게 작동을 한다. 사릅재에 올라 추성리 마을과 벽송사 서암을 바라보며 오늘 어렵던 산행을 무사히 끝냈다는 마음에 감격스럽고 뿌듯하였다. 뒤를 돌아보니 천왕산정 쪽엔 짙은 구름이 흩어져 있다. 우측의 초암 능선과 국골, 그리고 두류 능선을 보면서 오늘 모처럼 장장 12시간 지리산의 품에 안겨, 마냥 행복했다는 생각에 광점교까지 힘들지 않게 차량을 회수하러 올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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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 모르고 올랐다가 죽을 만큼 힘든 기억도 무시무시한 칠선계곡.....
수고 많이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