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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日帝敗亡)과 해방(解放)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기 전까지 김원길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의 밭을 얻어서 붙였는데 워낙 땅이 모래밭이고 땅 질이 좋지를 않아서 한껏 심는 곡식이래야 옥수수. 콩 팥 조 수수 같은 잡곡이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경작자도 부지런해야 하지만 날씨가 한몫을 잘 해주어야 제대로 농산물의 수확을 거둘 수가 있는데 해마다 가뭄이 심하여 소득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원길은 농사외의 일감이 있으면 찾아서 해보고자 하였으나 좀처럼 일을 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스무 살 무렵에 화천엘 가면 논미리 산판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한번 가서 일을 해볼 셈으로 하루에 한번 있다는 버스에 오르니 옆에는 아가씨가 타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논미리에 친척아주머니에게 간다고 하면서 제대로 찾아갈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김원길도 거기를 찾아 가는 길이라 화천에서 내려 논미리 들어가는 차량을 알아보니 버스는 없고 산판으로 들어가는 트럭이 가끔 있다고 하여 그 차를 겨우 찾아 논미리까지 갈 수가 있었다.
논미리에서 주막을 하는 아주머니를 만나자 오래간만에 조카딸이 왔다면서 무척 반기셨다.
김원길은 우선 산판을 찾아가서 십장을 만나 일 때문에 왔다고 하자 그 사람은 잘 왔다면서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하라고 하였다.
논미리는 산림이 울창하고 산판에서 하는 일은 주로 소나무를 벤 목재를 목도를 하여 큰 길가로 옮기는 일이었다.
다음날 산판엘 가서 보니 건장한 목도꾼들이 김원길을 보고는 체구가 잔망한 사람이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하면서 깔보는 눈치였지만 김원길은 잠자코 시키는 일을 하였다.
며칠간 일을 하다 보니 하지 않던 힘든 일을 해서 그런지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김원길은 저녁 시간에 주막을 찾아서 아가씨를 만나자 그러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잘 오셨다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소개를 하고 술상을 차렸다.
김원길은 이날이후 시간만 있으면 주막을 찾아 황선자를 만났는데 어느 날 하는 애기를 들으니 시골이라 너무 외롭고 적적해서 김원길을 오빠로 삼고 싶다고 하였다.
“나를 오빠로 삼겠다니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야지.”
“ 호호. 무슨 자격이라니요. 오빠는 아무 자격이나 다 갖추고 있어요. 오빠를 처음 만나던 날 오빠가 아니면 자칫 잘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잡혀 갈수도 있었을 거예요.”
“ 허허. 일이 그렇게 돌아가나 사실 여기는 시골 산판으로 돈을 벌러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자들은 주의를 많이 해야 될 거야.”
“ 그러니 오빠를 삼으려는거지요.”
“그러고 보니 니 말도 일리가 있긴 하네.”
“ 기왕에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 무슨 말인데 진작 하지 그랬어.”
“ 아직은 비밀이구요. 좀더 있다가 말 할게요.”
“ 나중에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듣겠네.”
“ 재밌잖아요. 오빠를 놀리는 게.”
“ 그래 마음 먹은대로 놀려도 좋아.”
김원길은 이리로 오면서 숙식을 산판에서 지은 임시 숙소에서 할 수가 있는데 일을 해 보니 일이 고되긴 하지만 한 일 년쯤이면 목돈을 만질 수가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석 달 동안 일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몹시 삐는 바람에 도저히 목재를 운반할 수가 없어서 당분간 치료차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원길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황선자는 오빠의 치료를 제가 할 터이니 가시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아쉽지만 곧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있는 동안 삔 다리가 낫기까지는 서너 달이 걸렸는데 그 후에 산판엘 다시 갈 생각을 하는 중에 아버지께서 병환이 나셔서 산판엘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계절은 빨라 봄이 오고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을 때에 김원길은 뜻밖에 사람을 만났으니 산판에서 일을 할 때에 하숙을 함께 한 이선주로 두 사람은 오래간만이라 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그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김원길이 산판을 떠나고 나서부터 산판의 일이 배는 늘어서 인부들을 더 데려다가 쓰게 되니 벌이도 그전 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게 되니 김원길은 발을 다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되었지만 불가항력이었으니 어째볼 볼 수가 없었다.
이선주는 이날 김원길에게 발이 웬만하면 다시 산판으로 들어오라면서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으니 이선주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황선자가 김원길을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 말을 들은 김원길은 그녀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황선자가 주막으로 오고 나서 간간이 아주머니의 일을 거들다 보니 얼마 후부터 목도꾼들의 눈에 띄어 이제 술맛이 제대로 나게 생겼다면서 일을 끝내고 주막으로 모이자고 하였다.
지금까지 주막에 색시를 두지 않은 것은 그만큼 장사가 되지를 않았기 때문인데 그 후부터 상황이 달라지자 주모는 색시라도 하나 두려다가 조카인 황선자를 불렀던 것이다.
황선자는 인물도 좋지만 경기민요를 멋 떨어지게 잘 하여 하루의 일이 끝난 일꾼들은 초저녁부터 술판을 벌리며 황선자를 차지하려 하였지만 목도꾼들은 이미 하루의 일과가 끝나기 전에 황선자를 차지하려고 주모에게 술상을 미리 차려달라고 하였으니 감히 거기에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주모는 여러 사람들이 황선자를 찾는 걸 보고는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며 기다리면 차례가 갈 것이라고 은근히 자기의 지위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어떤 날에는 색시를 차지하려고 선금을 주기도 하였지만 주모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으며 걔는 다른 애와 달리 얼마 있다가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할 아이니 숭늉부터 마시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다.
그러면 목도꾼들은 술집에 나왔으면 몸이고 마음이고 간에 달라는 놈에게는 다 내주어야 한다면서 어머니가 너무 색시를 싸고돌면 우리가 다시는 주막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공갈을 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어떤 일꾼은 “어머니 나 장가 좀 들여 주셔요.” 하면서 아기가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들고 쫓아다니듯이 보챘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기도 전에 주막에는 때 아닌 장날처럼 목도꾼들이 한 둘 모여서 서로가 술을 사겠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산판의 목상이 인부들이 한 달 동안 수고를 많이 하여서 파티를 열어주기로 하고 주모에게 술과 돼지갈비를 많이 준비하라고 하였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목도꾼들을 주막으로 모이라고 하자 모두가 즐거운 낯으로 멍석을 깔은 음식상 앞으로 모여 앉았는데 자그마치 열 명이 넘었다.
마침내 박 목상이 술잔을 높이 들고 건배를 제의하자 모두가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 건배 하면서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난 주모는 만날 이러면 큰돈 벌게 생겼네 하면서 좋아하자 “ 제가 장모님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하면서 일어선 사람은 평상시에 목도꾼 중에 제일 힘이 센 성지우였다.
“ 여보게. 자네 전에 벌써 임자가 나타나 도장을 찍었으니 그리 알라구,”
“ 뭐이야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시작부터 옴 붙었잖아.”
“ 여보게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듣지는 말아.”
“ 야. 너 왜 그렇게 사람을 헛갈리게 만드는 것이냐.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에 색시의 궁둥이 한번 만지고 말거야.”
" 생전 가야 술 한 잔 제대로 살 줄 모르는 놈이 무슨 장모님이고 궁둥이를 찾아. 일찌감치 꺼지셔. “
“ 그 말 잘 했네.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나. 그러다가 잘못하면 그 궁둥이가 두 갈래가 되면 어쩌려구 그래. 하하.”
술이 몇 판 돌자 벌써 한쪽에서는 돼지갈비를 더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 갈비를 굽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만 기다려요.”
“ 갈비 말고 이 집의 색시는 어디로 간 거여. 어서 와서 술을 부어야 어르신이 잡수시지.” “ 거기 어르신이 누구여. 어르신은 여기에 앉아 있는 나여. 잘 봐 두라구.”
“ 이 술판에 어느 놈이 어르신이여. 일어나 봐.”
“ 이 골방쥐 같은 놈아. 내가 어르신인 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
“그래 어르신노릇 싫건 하게. 여기 잔 있으니 받아봐.”
동시에 술이 가득한 잔을 방금 말을 한 쪽으로 던졌으니 술상 앞에서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노닥거리던 목도꾼들 모두가 난데없는 술 벼락을 맞자 “어느 놈이 술잔을 던졌어.” 하며 소동이 벌어졌다.
“이 어르신이 술잔을 올렸는데. 왜 무어가 잘못된 거여.”
이러는 가운데 누군가 술상을 뒤집어엎으니 술상 앞에 앉았던 또 다른 목도꾼들이 술과 안주벼락을 맞았으니 술판은 그냥 깨지고 말았다.
이날 밤 황선자는 아랫마을 회갑 집에 가서 술 심부름을 하고 간간이 노랫가락을 멋지게 불러 손님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는데 난데없이 술 취한 양복쟁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황선자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누가 던졌는지 고기안주접시가 엉뚱하게도 황선자의 얼굴에 맞아 코피가 터져 얼굴에 흘러내렸다..
젊은 아줌마가 얼른 헝겊으로 코를 틀어막아서 황선자는 바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어느 놈이 남의 귀한 집 처녀의 코를 건드렸느냐면서 화를 내셨다.
황선자는 다음날 머리가 아프다면서 당분간 집에 가 있다 오겠다고 하고는 산판에 드나드는 짐차를 타고 화천으로 나와서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김원길은 이선주를 만난 후에 한동안 황선자를 생각하느라 모든 일이 손에 걸리지를 않았고 그러다 보니 밥맛도 없는 가운데 치아까지 말썽을 일으켜 음식을 제대로 먹지를 못하였다.
어느 듯 가을이 되자 얼마 안 되는 농토에서 수확한 잡곡을 일본으로 공출을 보내고 나머지를 가지고 양식을 하자니 항상 부족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점령한 뒤에 전국각지에서 생산되는 쌀을 공출이란 제도를 만들어 일본으로 운반해 갔으며 그 대신에 만주에서 생산되는 콩의 기름을 뺀 다음에 나오는 콩깻묵을 배급이란 제도를 만들어 각 가정에 배급하였다.
일본은 짐승 사료로나 써야할 콩깻묵을 조선 사람들이 먹도록 하였으니 나라를 뺏긴 조선백성들은 일본인들에게 철저하게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조선 사람들은 썩은 콩깻묵을 주는 일본인들에게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슨 사건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일본 경찰들의 감시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였다.
더구나 일본은 전쟁 말기에 조선 사람들의 각 가정집에서 조상 대대로 써오던 놋그릇이며 놋대야 놋화로 놋수저 등을 무차별로 걷어 갔으며 만약에 이를 어기게 되면 가차 없이 가장을 주재소로 데려간 다음에 매로 다스렸다.
그때 김원길이 살고 있는 마을을 담당한 주재소에는 조선인 형사가 두 명이고 주재소의 주임은 우미노(海野)라는 일본인으로 그 자는 매일같이 조선형사로 하여금 마을을 순찰시켰으며 마을에서 투전을 하거나 부역에 불참하는 경우에는 주재소로 불러들이고 나무의자에 앉혀놓고 죄 값을 받아야 한다면서 구둣발로 정강뼈를 걷어차기 때문에 누구나 그 구둣발을 당한 사람은 그 순간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들은 또다시 발길질을 가하였으니 발길질을 한 형사는 일본인이 아니고 그보다 더 악질인 조선 형사들이었다.
일제 때에 일인보다도 더 우리 국민을 괴롭힌 자들이 일본인 행세를 하며 밤이면 하오 리를 입고 돌아다니기까지 한 가짜 일본인이 조선의 형사들이었다.
한일합방이라는 허울로 인해 조선 나라를 송두리째 점령한 일본인들은 기회가 닿으면 부산을 비롯한 동내지구와 마산인근에 일본인마을을 조성하고 일본 거리를 만들어 군림하면서 살았으니 이를 대하는 조선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36년간이나 이 나라를 뺏은 다음에는 그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였으니 특히 우리의 문화재들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도굴꾼에 의해서 거의가 다 파헤쳐졌으며 거기에서 나온 귀중품들은 암암리에 그들끼리 거래가 되어 지금도 수십만 점의 우리문화재가 일본인 개인의 재산으로 등록이 되어 찾지를 못하고 있다.
1945년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의 최고위 군 지휘관들은 일본인특공대를 조직하여 ‘하야부사’ 전투기를 몰고 적군(연합군)의 군함을 향하여 돌진케 하였으니 이렇게 잔인무도한 무리들이 일본의 군 지휘부였다.
그 뿐인가 일본은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징용으로 끌어갔으며 초등학교 5.6학년 여학생들을
군수공장에 가게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앞세워 일본의 군함을 태워서 남양군도로 끌고 가서 일본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인생의 꽃봉오리를 미처 피우지도 못한 어린소녀들이 새까맣게 그을린 일본의 군인들 앞에 내팽개쳤을 때의 그 절망감과 두려움속의 공포감은 살치를 불 불 떨게 하였을 것이다.
나라가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던 가엾은 우리의 소녀들. 이들의 쓰라렸던 과거를 후세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하고 국력을 신장시켜 다시는 이러한 인간이하의 삶을 살게 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사에도 드물게 갖은 악행을 자행한 일본인들이야말로 우리에겐 돌이킬 수없는 원수의 나라일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1910년 이래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에게 당한 멸시와 인간 이하의 시름과 고통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잔혹사이다.
그뿐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미독립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인에게 핍박을 받았으며 또 얼마나 많은 애국동포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고 혹은 그들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던가.
전쟁 말기에 전황은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연합군에게 전멸을 당하게 되자 일본의 전의는 완전히 패망직전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해방 직전의 어느 날 밤 김원길이 사는 동네에는 유난히 달이 밝았는데 이 시간을 이용하여 젊은이 두 명이 김원길이 사는 집으로 들어갔으니 이때의 두 청년은 몹시 경계를 하였다.
이날 밤에 두 청년은 김원길의 아들 김정호와 윗마을에 사는 김준영으로 이 두 사람은 두 달 전에 징용으로 부산까지 끌려갔다가 부대를 탈출하여 귀가를 하였던 것이다.
두 청년은 징용영장을 받은 후에 춘천역에서 환송을 받고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 후에 일본으로 가기위해 배편을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내로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의 가고시마로 향한다고 하더니 하루하루를 밀리다 보니 배의 출항이 자꾸만 늦춰지었다.
그 당시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마다 패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징용으로 끌려간 청년들은 이 같은 전황을 들으면서 동요가 일었고 저녁 점호 때마다 몇 명씩 행방불명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행방불명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부대의 지휘관들은 겉으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않았으니 그들은 그만큼 다급한 처지에 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소문은 일본이 곧 망하게 된다는 확증의 말들이 계속해서 돌자 두 청년 김정호와 김준영은 밤중에 부대를 탈출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저녁점호가 끝난 뒤에 대원들이 거의 잠속에 빠져들 때에 평상시에 보아둔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부대를 빠져나왔다.
이날 밤에 부산을 벗어나고자 향방도 모른 채 밤을 새워서 시골길을 택하여 걷다가 날이 새자 숲속에서 한나절을 보내다가 배가 고파서 민가로 들어가 사정 이야기를 하자 밥을 주면서 잘 살펴서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밥을 주는 분들이 모두가 두 청년의 탈출 경위를 듣고 난 후에 노비까지 주시는 분도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두 청년은 사람을 만나기를 꺼리면서 걷자니 마음은 내내 불안감이 가시를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가급적 걷는 걸음을 주리고 밤이 되어서야 속도를 내면서 걸었는데 경상북도 춘양에서 난데없이 순사를 만났는데 그는 대뜸 두 사람에 대해 검문을 하였다.
김정호와 김준영은 그를 만난 것이 죽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지. 둘의 얼굴은 흙비를 맞은 모양으로 검어지고 거짓말을 해서 해로울 바에는 솔직하게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왜 말을 하지 않냐. ”
순사는 두 청년이 제대로 말을 하지를 않자 잠시 뜸을 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어딜 가는 중인지. 솔직하게 말을 하라.”
그래서 김정호는 사실대로 영장을 받고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기위해 대기 중이었다가 탈출을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순사는 아무 소리도 하지를 않더니 “너희들을 만나지 않은 것으로 하겠으니 어서 가라.” 하고는 뒤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얼추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정세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부산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춘천에 도착을 하였고 부모님들은 어떻게 왔느냐면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김원길은 아들이 무사히 돌아와서 좋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일이 탄로가 난다면 곧 수배령이 내릴 것인데 그리 되면 아버지나 엄마가 주재소로 호출을 당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정호의 엄마는 아들에게 집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정호는 젊은 놈이 영장이 다시 나오게 되면 가면 고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있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같이 김원길을 다음날 9시까지 주재소로 출두하라는 통지가 온 것이다.
주재소의 출소통지를 받게 되자 김원길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하였지만 도무지 마음이 불안하여 날밤을 새우고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가 가까워지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알 수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조여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재소 주임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방금 들어온 김원길을 빤히 보고 있었다.
김원길이 호출을 받고 온 김원길이라고 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하자 주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김원길 앞으로 다가서더니 서있는 김원길을 향하여 구둣발로 정강뼈를 걷어 내차는 바람에 김원길은 그 저리에 고꾸라졌다.
“ 징용간 새끼가 언제 집에 왔는지 바른대로 말을 하라오.”
김원길은 아픈 다리를 펴면서 억지로 일어나 말을 하였다.
“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모르는데요.”
“ 뭐이야. 징용간 아들이 집에 오지를 않았다고. 정말 거짓말하기야,”
김원길은 내친김에 자금까지 집에는 아무 연락도 없다고 대답을 하였다.
“ 그래. 그러면 아들이 올 때까지 유치장에서 지내야겠군.”
주임은 그 소리를 하더니 어디다가 전화를 걸었다.
‘’ 김 형사. 빨리 들어오라 . “
전화를 건지 30여분 후에 조선인 김 형사가 헐레벌떡 주재소로 들어왔다.
“어제 수배령이 내려진 김정호 알지. 징용으로 갔다가 도망친 놈 말이다. 집에 오지 않았다고 아범이 거짓말을 하는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범을 유치장에 집어넣어라. 밥은 하루 두 끼만 주고 철저히 감시하라.”
“ 네. 알았습니다.”
김원길은 그날 이후 유치장에 가두키는 몽이 되었으니 집에는 아무 연락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집에서는 아버지가 주재소로 가신 후에 아무 소식이 없자 저녁때 정호 엄마는 주재소로 남편을 찾아 나섰다.
주재소에 도착을 하여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침 조선인 형사가 혼자 있었다.
형사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고 나서 김원길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남편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정호엄마는 온 김에 남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고 하자 형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른 벌을 가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고 큰 소리를 쳤다.
형사가 큰 소리로 말을 하니 부인은 우리 남편이 무얼 잘못했기에 집으로 돌려 보내주지를 않느냐고 항의를 하자 형사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조용히 말을 할 때 어서가라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둘 다 유치장에 가두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형사가 이렇게 세게 나오는데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손해가 될 것 같아서 정호엄마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주재소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맥이 탁 풀리고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정호엄마는 허둥지둥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웃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가 와 계셨다.
“그래 남편은 만나고 왔는가.”
“ 만나긴요. 아들이 올 때까지 유치장에서 풀어주지를 않는데요.”
" 저런 저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
부인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남편이 거기에 있는 동안 밥이나 제대로 먹기나 하는지 그것이 염려되고 더구나 일본 형사들의 지금까지의 행태를 들어보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면 우선은 지하실로 데려간 다음에 혹독한 매질을 가하는 것이 그네들의 취조방법이라고 하였다.
얼마 전에도 마을에 부자로 사는 김종율씨도 불려가서 매를 맞았는데 그 원인은 일본 천황 절에 행사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흘간이나 구류를 하고 일주일간이나 문밖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던 일이 있었다.
정호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로 주재소에 가서 자수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엄마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주재소에서 아버지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들이 돌아와서 자수하기를 바라기 때문인데 만일 이 시점에서 아들이 자수를 하게 되면 섶을 지고 불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엄마는 극구 반대를 하였다.
그렁저렁 김원길이 주재소에서 구류상태로 열흘이 지난 날 다 저녁때에 주재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를 데려가라는 통지였다.
정호엄마는 부랴부랴 이웃의 친척 아저씨에게 부탁을 하여 급하게 주재소엘 가니 아버지는 마당 한쪽에 방치되다 싶이 누워계셨다.
가족을 알아본 조선인 형사가 하는 말이 아침을 먹은 것이 탈이 난 것 같으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부인이 급하게 남편에게 다가가자 남편의 숨이 하늘에 닿을 만큼 호흡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게 되자 울화가 치밀며 왜 사람을 다 죽여 놓았느냐고 형사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대꾸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을 안방에 뉘어놓고 몰골을 보니 밥을 굶기기도 하였겠지만 구타를 당한 흔적이 온몸에 나타 나 있었다.
필시 형사는 매일같이 아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하라고 하였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였을 것이니 형사는 괘씸하게 여기고 심하게 구타를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멀쩡하게 주재소엘 가신 분이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편의 맥없는 모습을 보자 부인은 한의원을 불러서 맥을 보라고 하였는데 한의사는 워낙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당분간 보약으로 다스려야 겨우 살수 있다고 하였다.
아들인 정호는 아버지가 기력을 회복하시는 것이 더디자 아버지 옆에서 떠나지를 않고 간호를 하였다.
엄마는 이럴 때에 혹시 형사가 집으로 들이닥치면 대번에 아들에게 수갑을 채워서 주재소로 압송할 텐데 그런 생각도 없이 아버지 곁을 지키면 어떻거냐며 아들을 창고 방으로 가 있으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집으로 오신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의 일이다.
동네 사람들은 다 영화네 집으로 모여서 라디오 방송을 들으라는 전갈이 온 것이다.
이 동네에는 유일하게 영화네 집에만 라디오가 있어서 그 집에는 항상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가마니도 치지만 한쪽에서는 담배내기 화토를 치기도 하였다.
영화네 집으로 가던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인가 하고 의심을 가지면서 모였는데 영화네 아버지가 말을 하였다.
“오늘 라디오를 통해서 중대발표가 있다고 하니 모두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강 건너에서 맨 날 뱃사공 노릇을 하는 연봉화가 하는 말이 중대 발표를 몇 번을 해
도 우리 뱃사공에게는 해당이 없으니 우리는 가렵니다.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화 아버지는 뱃사공의 팔을 붙잡으면서 집으로 가지 말고 방송을 들어야 한다고 하자 마지못해서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마침내 12시가 되자 라디오 방송이 나오는데 지금 방송을 하는 사람이 일본 천황으로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영화 아버지가 해설을 해주셨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한다고 하자 동네 분들은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되찾게 된다는 말이지 하면서 다 같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는데 모두의 얼굴들은 환희에 찬 모습들이었다.
아날 영화 아버지는 라디오 방송이 끝나자 이제 잃었던 나라를 찾게 되었으니 모두가 거리로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 하자 동네 사람들은 한 다름에 신작로로 뛰어나가는 중에 어느새 이웃마을에서는 이 동네보다도 앞서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얼마 후에 라디오 방송에서도 간간이 대한독립만세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한꺼번에 우리 국민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정호 엄마는 이 소식을 듣고는 바로 남편에게도 다가가서 “ 여봐요 눈을 좀 뜨세요.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의 왕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한다는 방송을 하였대요. 이제 당신은 주재소에 다시는 안가도 될 거예요.”
정호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 정호야. 이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단다.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일본으로 쌀 공출을 보내지 않아도 될 거야. 정말 이런 꿈같은 날이 오다니 어서 동네사람들이 모인다는 공회당으로 가보자.”
동네 사람들이 모인 공회당에서는 ”동해불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었다.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