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영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영천지역은 1949년 토벌부대에 의한 피해가 컸다. 1949년 7월 30일에는 영천 북안면 주민 7명이 북안지서 소속 경찰관과 방위대(특공대)원들에게 연행되어 그 날 낮 12시경 북동 회관 앞에서 공개 사살되었다. 10월경에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 30여 명이 대창면 조곡리 뒷산(현 채석장)에서 희생당했으며, 12월에는 대창면 조곡리에 있는 또 다른 산인 송친산 뒷산에서 30여 명이 다시 총살되었다. 이외에도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아작골에서도 많이 희생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같은 시기에 청통면 치일리 주민들과 애련리 주민들이 많이 붙잡혀갔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애련리에서도 엄태식 등 4~5명이 청통지서로 연행되어 총살당했다. 당시 경찰서 근무자는 치일리 주민 7명이 충남부대에게 죽었다고 증언했다.
자천리와 구전리에서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대한청년단원이었던 김씨(김종우)는 밤에 경찰특공대들이 구전리 황보 등 2~3명을 잡아 자천교 다리 위에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개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영천에 호림부대(서북청년단 출신으로 당시 정규부대는 아니었다)가 영천향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영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예비검속되어 희생되었는데, 그 수는 6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7월초, 8월 7일부터 11일까지, 9월 4일부터 10일까지 등 모두 세 차례에 집중되어 희생당했다.
이중 2차시기의 학살사건이 잘 알려졌는데, 이 사건은 국군 8사단이 영천지역의 낙동강 전선을 담당하는 동안 저질러졌다. 당시 국군은 예비검속된 주민 400여 명을 8월 7일부터 11일까지 군 트럭에 실고 가 아작골로 불리는 임고면 수성리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당시 기관총이 사용되었으며, 군인들이 학살이 후 2시간이 지나자 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고 한다.
<미군폭격 피해>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미 전투기의 폭격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9월 11일 폭격을 피하기 위해 창상리 대로변으로 모인 피난민 수백 명이 미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최소 3명이 사망했다.
<부역혐의 피해>
『한국전쟁사』는 영천경찰서가 국군 수복 다음 날인 1950년 9월 16일 석종면 창토리 마을에서 인민군 패잔병 1개 소대를 토벌하여 1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고 하는데 경찰 측 피해는 없었으며, 9월 21일에는 도덕산 중턱의 패잔병 10명을 공격하여 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고 한다.(733쪽) 정황상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 영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