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몬 왕국의 통치자들은 대제사장직보다는 끊임 없이 전투를 해야 하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세속 정치에 몰두하였다. 마카비 전투에 참여하였던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이 생겨났는데, 하스몬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멀리하고, 현실적이고 헬라주의화된 사두개인들을 가까이 하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아랍 세력들을 복속시켜나갈 때, 유대인들은 정복자 폼페이우스에게 왕국을 폐하고 제사장들의 통치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옮김의 『신약성서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를 타자쳐서 올린다.
팔레스틴의 형세에 영향력을 쥐려는 시리아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한 뒤(기원전 128년) 요하네스 히르칸은 마음대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유대 지방 곳곳에 승리의 진군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국민 군대가 아니라 그가 모집하고 그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용병 군단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미 요나단과 시몬이 유대인의 세력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면, 히르칸 역시 그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데 전념하였다. 기원전 128년에 가리짐 위에 있는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사마리아인들에게서 그들의 성지를 빼앗았다. 옛날 에돔의 영역인 이두매를 향한 또 다른 전투를 벌여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땅을 유대인 지배 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사마리아를 향한 진군 역시 승전으로 끝났다. 즉 헬라주의화된 도시가 기원전 107년에 점령되고 파괴된 것이다.
비록 히르칸의 정책이 군사적인 계획에서 성공하기는 했지만 백성들에게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부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형성되는데 전심하였으므로 하스모네어의 군사적인 노력을 지배자들의 세속적인 행위로 비난하였다. 막카베어 봉기를 일으켰던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 무리들 가운데서 바리새인의 공동사회가 생겨났다(참조, 65-66면). 하스모네어는 본래 이들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이제는 매우 거리가 멀어져 히르칸은 바리새인들에게서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고 냉정한 현실주의적 정치를 추구하며 헬라주의에 대해서도 폐쇄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히르칸은 처음에는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따라서 점차 그로부터 돌아서서 그의 뜻을 지지하는 사두개인들과 가까워졌다(참조, 62-65면). 히르칸과 바리새인들 사이가 갑작스럽게 절교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승은 말하고 있다. 히르칸이 한번은 바리새인들의 집회에서 그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본다면 그에게 말해 줄 것을 요구하였을 때 처음에는 누구도 그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지 못하고 모두 찬사만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때 엘레아자르(Eleazar)라고 부르는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히르칸에게 그의 어머니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시대에 포로로 감금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명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여자는 감금되어 혹시 강간당할 수가 있었고 그러한 어머니의 아들이 최고의 사제적 정결이 요청되는 직위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히르칸은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매우 진노하여 이 요구를 모든 바리새인들의 의견으로 보고서 그들과 절교하였다. 이 이야기는 경건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르면 하스모네어의 지배자는 대제사장의 정결에 대한 율법의 규정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록 그가 주조하게 했던 화폐에는 “대제사장 요하네스와 유대 공동체” 또는 “유대 공동체의 우두머리 대제사장 요하네스”라는 말을 새기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령관과 지배자의 직위가 대제사장의 의식적(的)인 사명보다 더 중요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아들인 아리스토불(Aristobul)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히르칸은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부인이 통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아리스토불이 자기의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명의 동생들을 감금해 버렸다. 그는 그의 동생인 안티고누스만을 그의 정부에 참여시켰으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의심하도록 하여 살해해 버렸다. 아리스토불은 동방의 작은 국가들의 왕들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유대인 지배자로서는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출전을 계속하여 갈릴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점령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할례 받게 하였다. 그렇지만 유대교에로의 강제 개종은 종교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왕의 지배권에 복종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희랍인들의 친구인양 행세하였으며 다른 동방의 지배자들의 선례를 추종하였다.
아리스토불은 기원전 103년 짧은 통치를 한 후 죽었다.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감금되어 있던 죽은 왕의 동생들을 석방시키고 제일 큰 형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고 그의 부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요나단이라는 자기 이름을 희랍식으로 얀네우스(Jannäus)로 개명하여 자신을 알렉산더 얀네우스라고 불렀다. 그도 역시 많은 전쟁을 하였으며 그의 전임자들처럼 대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점령하고 동부 요르단 땅에서도 전투를 치르고 난 이후 당시 발흥하고 있던 다마스쿠스와의 충돌에서 겨우 자기 지위를 고수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넓이에 거의 상응하는 지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확고하지 못하였다. 점령지의 주민들은 추방되든가 아니면 강제로 유대화되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였고 왕은 자주 나라 안의 이곳저곳으로 반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급히 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스모네어의 지배는 자기 백성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반이 약했다. 경건한 사람들은 군인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하고 있는 지배자의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잔인하고 독단적으로 그의 뜻을 관철하였으며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하였다. 긴장이 고조되어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전승에 의하면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한 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부인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서 향연을 베풀게 하였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을 그들의 눈앞에서 살해하도록 하였다. 십자가 처형의 잔인한 형벌이 결코 이스라엘에서는 집행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그의 적들을 잡아 “그들을 산채로 매달은”(4Qp Nah I. 6-7) 무서운 복수는 백성들에게 경악과 두려움을 자아냈다(참조, 82면). 얀네우스가 테러를 통해서 공개적인 저항은 분쇄하였으나 백성들 사이에는 그에 대한 내적인 반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임종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바리새인들과 다시 화해하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이 죽은 후 지배권을 이양 받아 9년 동안 신중하고 지혜롭게 통치하였다(기원전 76-67년). 그녀가 여자로서 여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대제사장의 직위는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약하고 활동능력이 별로 없는 아들 히르칸 2세가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살로메는 이제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화해하였다. 바리새인 공동체의 서기관들은 그 때까지 우두머리 사제(Oberpriester)들과 장로들만이 될 수 있었던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었다. 이들은 산헤드린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주장하여 여러 가지로 관철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얀네우스의 무력 통치하에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최고회의에서 그들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여 오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밀려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과 또 여왕의 통치에 불만을 가져온 모든 사람들과 여왕의 작은 아들이며 권력에 강하게 집착하는 아리스토불 2세가 접촉하였다.
이러한 긴장에 직면하여 살로메는 신중하게 고삐를 끌고 가면서 군사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피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나라의 내적 만족을 얻기 위하여 평화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새적인 전승에서는 그녀의 통치가 축복된 평화로운 시대로서 찬양되고 있다. 살로메 여왕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서기관이었던 시몬 벤 샤타하 (Simon ben Schatach)가 살아 있는 동안 비가 풍부하게 내려서 밀알은 콩이나 팥과 같이 커졌으며 보리 알맹이는 감람 열매와 같이, 콩은 금화(貨)와 같이 커졌다고 한다.
기원전 67년에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그녀의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 2세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아리스토불의 군대가 히르칸의 군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히르칸의 부하들은 그를 버리고 강자의 편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제사장과 왕위를 아리스토불에게 넘겨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써 싸움이 결코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 밑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두매의 총독으로 있었던 안티파테르(Antipater)가 밀려난 히르칸의 편을 들었다. 그는 얀네우스가 빼앗은 도시들을 다시 돌려 줄 것을 약속하고 다마스쿠스의 아레타스 왕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아레타스와 안티파테르는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결판나기 전에 장차 아랍 제국의 운명과 또 팔레스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 들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왔을 때 세로이키텐의 약한 나라는 무너졌고 시리아 지방으로서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유대에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던 두 파벌은 폼페이우스 쪽으로 돌아서서 그를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왕국을 폐하고 옛날 제사장들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줄 것을 원하였다. 하스모네어 왕국은 외적인 힘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서도 왕국을 지지하여줄 수 있는 세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의 종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자기의 판결을 내리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중재자로서 판단하기 전에 먼저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첫댓글 알렉산더 얀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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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가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 (기원전 104~78년)는 로마에서 헬라인 가정교사 아래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헬라 사상에 호감을 가졌으며, 지적인 사두가이파들에게 비밀리에 협력하고 호의를 베풀었다.
요세푸스는 얀네우스가 초막절 축제 1년에 술이 취해서 제단에 물을 붓는 대신에 그 자신의 발에 물을 부었다고 기록했다. 아마 이것은 비가 필요함을 상징하기 위해서 제단 위에 물을 붓는 바리사이파들에 대한 그의 경멸을 보여 주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폭동이 발생하고 얀네우스 군대가 질서를 회복했으나 6,000명이 살해되었다.
바리사이파는 얀네우스에 대항해서 내란을 일으켰는데 (기원전 94~88년) 하스몬 왕이 바리사이파 지도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중 80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그 내란은 종식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사두가이파
사두개인 하니까 필이 확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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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태복음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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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세속적 종교인들에게 뭔 기대를 합니까ㅠㅠ
@노베 공감합니다.
이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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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시대에 이르자 에돔은 유다 남쪽에서 유대인과 동화되어 이두매 사람들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도 이두매의 안티파트로스가 로마 제국의 행정관이 되었고 그의 아들을 훗날 로마 제국의 명령 하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헤로데 대왕이 되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8F%94
저도 외경을 검색하니 족속도 되고 지명도 되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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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마카베오하 12:32
오순절 축제가 지난 후, 유다의 군대는 이두매의 총독 고르기아스를 치기 위해 돌진하였다. [번역비교] [유사말씀]
마카베오하 10:16
마카베오와 그의 부하들은 마음을 합하여 기도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편이 되셔서 싸워주시기를 빌었다. 그들은 곧 이두매인들의 요새로 돌격해 들어갔다. [번역비교] [유사말씀]
마카베오하 10:15
그와 동시에 중요한 요새들을 장악하고 있던 이두매인들도 유다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자들을 받아들여 전쟁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노베 에돔이니 유대인을 괴롭혔군요. 검색결과가 도움이 되네요.
엘레아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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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는 별명으로, 망치를 의미한다. 제사장을 자처하며 제우스를 섬기라고 강요하는 셀레우코스 제국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마타디아의 아들이다. 형제로 엘레아자르 아바란, 시몬 타시, 요한 가디, 그리고 요나단 압푸스가 있었다. 기원전 166/16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유대 반란군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베오기 1서는 그의 용기와 군사적 재능에 찬사를 보내며, 이러한 자질로 인해 새로운 사령관으로 자연스럽게 선택되었음을 암시한다.
츨처: 나무위키, 유다 마카베오
마카베오의 의협심과 용기는 가상하지만 다윗의 후손이 아닌 자들이 만든 왕국은 기독교 역사에 큰 반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고요. 마치 망한 고구려의 여파로 발흥한 발해국 같은 느낌도 조금 듭니다.
여기서 언급한 엘레아자르는 알렉산더 얀네우스에게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직언한 그 사람은 아니네요. 바리새인 엘레아자르는 훨씬 후대 인물임을 감안하십시오.
@코람데오 원 책의 저자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인명에 대한 확인 없이 그냥 막 번역한 것 같아요.
엘레아자르는 Eleazar을 그냥 적당히 한글로 음역한 것 같은데요. Eleazar는 유대인들이 쓰기에 좋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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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아살<영> Eleazar,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 GODpia 성경: 어가페 출판사
@장코뱅 옛날 신학서적들은 교수님들이 학생들 시켜서 번역한 것이 많은데 이 책도 그런 느낌이 많이 납니다. 그렇더라도 정착된 외래어로 표기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외경이 언급하는 아리스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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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하 1:10
예루살렘과 유다의 온 주민들과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나 유다가 이 편지를 씁니다. 프톨레매오 왕의 스승이며 거룩한 사제직을 맡은 가문의 한 사람인 아리스토불로 님과 이집트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건강을 빕니다.
외경도 희미하게나마 성경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요. 역사서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포스팅 본문을 읽고 제 개인적으로 추가검색을 해보니 마카베오서가 정통 개신교에 의해서 외경으로 분류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가의 계통이 끊어진 상태에서 조금 듣보잡 가문이 이스라엘 왕가와 제사장 족속을 만들고, 게다가 바리새인보다도 더 세속주의적인 사두개인들을 등용하려고 하니까 종교적 순수성마저도 흐릿해지는 것이지요.
네, 저도 그런 걸 느낍니다.
잘 보셨습니다. 공감합니다. 혈연적으로 전혀 정통성이 없습니다. 왕국과 성전이 훼손되고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이 모든 어둠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죠.
신약의 찬란한 빛이 오기 전 과도기에 이스라엘에 강한 어두움이 지배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좋은 포스팅 시리즈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주님이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시기 전에 마카베오서에 쓰인 것 같은 혼돈과 어둠이 있었던 것입니다.
네, 그렇네요. 신구약 중간사 400년을 왜 암흑기라고 했는지 체감이 되는 그런 역사들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장코뱅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