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수입되어 공전의 흥행을 기록했다. 육십여 년이 훨씬 지났지만 훤칠한 키에 남성미가 넘치는 배우 그레고리 펙과 발랄하고 청초한 오드리 헵번이 서로를 응시하며 한가롭게 산책하는 걸음새가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에 남는다.
해운대가 자랑하는 걷고 싶은 길, 문탠로드는 울창한 송림 사이 오솔길이다. 이 길을 십 년이 넘도록 매일 아침 산책했다. 예전에 이 길은 울퉁불퉁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데다 비가 온 뒤에는 땅이 질고 미끄러워 넘어질 우려가 있었다. 지금은 새로 조성한 해변의 테크로드를 편안하게 걷는다.
해운대의 동쪽 갯마을 미포에서 송정까지 이어지는 길은 깊은 바다와 일출을 조망하면서 걷기운동을 하기에 좋은 코스다. 3.8㎞의 동해남부선 철로가 이설된 후 기존 철로를 철거하지 않고 해변열차를 운행하여 관광 자원화한다. 옛 철로를 따라 설치된 ‘그린레일웨이’는 2011년도 대한민국 환경대상을 수상한 길이다. 먼 곳 사람들도 이곳에 와 걷기에 동참한다.
먼동이 트기 전에 이 길에 오른다. 비가 오고 세찬 바람이 불어도 우의를 입고 어김없이 집을 나온다. 시야에 시나브로 여명의 수평선이 들어온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 위로 구름과 안개가 펼치는 장관은 매일 보아도 새롭고 경이롭다. 가슴이 탁 트이는 이 정경을 환상하며 걷다 보면 건강은 덤으로 얻어지는 것 같다.
헬스클럽에 수년간 다녔으나 언젠가부터 노령이라 힘에 부쳤다. 건강상식을 TV나 유튜브에서 쉽게 접하는 세상이다. 제일 쉽고 비용이 들지 않는 대중적인 운동은 걷기라 했다. 걸으면 살고 눕게 되면 죽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걷기는 비만과 고혈압을 치료하고 뇌를 자극하여 건망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다. 건강검진 때마다 고혈압과 과체중 소견이 나와 걷기운동을 시작했다.
군 복무 시절 제식훈련 때면 손발의 높이와 간격이 맞도록 보행해야 했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는 걸음으로 팔은 어깨높이로 올렸다. 무릎과 어깨관절에 무리 없이 멋진 걸음새를 터득했다. 제대 후 수십 년이 지나 노화 현상인지 나도 모르게 보기 싫은 팔자(八字)걸음을 걷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놀림 반 핀잔을 준다. 군 복무 시절의 멋진 걸음을 복원코자 일 년이 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308㎞를 왕복하여 걷는다. 윗몸을 곧추세우고 발뒤꿈치를 먼저 바닥에 닿게 하면서 보폭을 약간 넓게 한다. 일상 걸음보다 보폭을 넓게 해야 체지방을 연소하는 데 효과적이다.
어둠이 머무는 새벽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오십 명이 넘을 것 같다. 여러 날을 걷다 보면 통성명은 하지 않아도 서로 낯설지 않다. 제법 먼 거리를 두고 걸음걸이만 봐도 누구인지 알게 됐다. 사람에 따라 얼굴 모습이 다르듯 걸음새도 모두 다르다. 관상으로 그 사람의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말하듯 보행상도 관상처럼 그 사람의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준다. 옛날 사대부 가문에서 며느리를 볼 때 규수의 걸음걸이도 봤다는 기록을 보면 전혀 엉뚱한 발상은 아닌 것 같다.
이곳 해변의 데크로드는 목재라 탄력이 있다.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신발 바닥으로 싹싹 마찰음을 내면서 걷는 사람, 상반신을 좌우로 씰룩씰룩 흔들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일격을 가할 것 같이 걷는 사람, 마치 쫓기듯 안쓰럽게 걷는 사람 등 다양한 걷기 자세를 볼 수 있다.
남자의 멋진 용모와 여자의 참한 용모가 있듯이 걸음에도 멋진 걸음, 참한 걸음이 있다. 편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유연하게 걷는 남자들의 걸음이 멋져 보인다. 수녀셋이 횡대로 걷다가 우측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우측 수녀는 슬며시 좌측으로 비킨다. 속보도 완보도 아닌 자연스럽게 참한 걸음이 마음에 든다.
연예인은 물론 TV에 패널로 나오는 저명인사들도 성형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얼굴 성형을 하는 것은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함이다. 흉볼 일도 아니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걸음걸이도 성형이 가능하다. 걸음걸이도 멋있고 참하면 건강과 운을 위해 좋다. 여러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고 마음에 드는 자세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된다. 석 달 정도 몸에 배게 걸으며 노력하면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비만 체구라도 8㎏ 정도는 감량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 특성을 고려한 보행로가 잘 갖춰져 있고 체육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어 평균수명 연장에 한몫하는 것 같다.
매일 새벽에 이 길을 걸으면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것도 노후의 행복이라 감사하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걸으면서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 딴엔 멋진 걸음으로 오늘도 해운대 ‘그린레일웨이’ 새벽길을 힘차게 걷는다.
첫댓글 정 작가님 편찮으시다는 말 전해 들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 날, 선생님 께서도 속히 쾌차 하시어 좋은 글 많이 쓰 주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