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오산마을 입향조 동래정씨 호장공파 정선문
• 해운대 중동의 본거지 오산마을
오산(梧山)마을은 중1동 700~900번지 일대로 미포교차로에서 삼성연수원 쪽으로 길을 따라 형성된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원래 봉림(鳳林)마을이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조선 말기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다 하여 오산마을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오동나무가 많아서 머구실(오동나무를 뜻하는 사투리)로 불리다가 오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오산마을은 중동의 본거지이다. 원래 오산마을은 현재 마을보다는 약간 산 쪽으로 위에 있는 갓지실(좌동 현대아파트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아래쪽으로 옮겨 와서 자리를 잡았다.
• 입향조 동래정씨 정선문
이 마을의 입향조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동래정씨 호장공파 정선문이 17세 때 동래 거제에서 해운대 오산마을로 입향하였다. 동래정씨의 다른 분파는 양산 법기리에서 동래 구서동으로, 또 반여동으로, 기장에서 반송 운봉마을로 옮겨 거주했다. 동래 정씨는 신라시대 경주를 본관으로 하다가 동래로 분적 되어 동래군의 향직을 맡았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고려 전기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을 1세로 한다. 그 아들 정문도의 묘소는 화지산(和池山)에 있으며 화지공원 역내에 동래정씨의 사당 정묘사가 자리 잡고 있다.
풍수가가 오산마을을 지나다 해운대의 가장 명당은 개바우(犬岩, 오산공원) 부근이라 하였다. 또한 이곳은 옛사람들의 큰 무덤(능)이 많이 있어서 능구실(陵丘室, 중동 동일아파트 자리)이라 불렸다. 아마 옛날에 이곳으로 귀양 온 귀족들이 묻혀 있는 곳인 것 같다. 1938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寒與勝覽)」 명묘조(名墓條)에서는 “鄭在夏墓 在南面中里 梧葉嶝 巽坐”라 하여 정재하의 무덤이 중리의 오엽등(양운로 37번 길 28. 흥국자동차운전학원 일대)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장안읍 덕선리 선암마을 선영에 모셔져 있다.
이 가문은 조선 철종 무렵인 1820년대 해운대 우동으로 들어와 부를 일구었다. 우동 못안마을 일대 약 30만 평 토지가 이 집안의 소유로 천석군이었다고 한다. 부가 축적되자 정부명 선조 때부터 대를 이어 동래향교에 출입하게 되었고 양반 대접도 받았으며 향임(鄕任)도 맡았다. 정재하(鄭在夏)(흠제 노영경과 동시대)는 유학서원 장의를, 정귀조는 도유사, 민의소 의원, 정정출은 교임, 서원제 집사를 지냈다.
• 해운대 문중 후손 정청일 선생
필자가 만난 입향조의 후손 정청일 선생(1941년생, 해초 14회)은 동래중·고등학교를 나와 ‘부산 연세대학’(영도구 소재) 영문과를 졸업. 공군에 입대하여 제트기 정비병을 하였다.
1966년 부산시 공무원이 되어 남부민 1동사무소, 중부수도사업소, 시청 공보실, 인사과 등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공무원 생활 12년 5개월 만에 건설회사로 옮겨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주택공사 현장소장 시절 이란에서 쏘아대는 스쿠드 미사일 때문에 숙소가 흔들리는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그러면서 현지인들의 주택을 보수해 주고 이슬람 세례명을 받기도 했다. 이후 14년 만에 건설회사를 떠났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조직위 국제본부장을 역임했고, 71세의 나이로 TOEIC 시험에 응시하여 805점을 맞아 그 해 바로 관광통역사 시험에 합격한 후 지금까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관광안내를 하고 있다.
그는 부산을 방문하는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한국과 부산을 소개하고 있는 한국문화해설사이다. 지나온 평생이 하나의 파노라마였고 팔십이 넘은 지금도 그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멋있게 살아가고 있다.
남은 여정 힘차게 노를 저으며 힘찬 파도와 바람을 기꺼이 맞이하며 부닥치며 즐기며 항해하시는 선생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출처 : 언론인 박병곤 칼럼, 정청일(1941년생, 해초14회) 인터뷰
※ 2012년 자전적 에세이 旅路(여로) 출간은 세간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해운대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시절 모교에 그랜드 피아노를 기증했고, 어릴 때 다니던 해운대교회에 그랜드 피아노를 기부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