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중고차딜러로 일하고 있지만 10여 년 전 한 때 안산의 반월신문신문에서 편집장으로 활동할 때 입니다.
당시 옹진군 대부도 방아머리와 시흥시의 오이도( 시화공단)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시화방조제의 연결공사는 시흥시의 오이도와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걸쳐 있는 안산시와 시흥시, 화성군 등의 큰 이슈였습니다.
길이 12.7키로미터의 방조제공사는 전국의 관심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새만금 (33키로 미터) 다음 두 번째로 긴 방조제입니다.
농어촌개발공사가 서울 여의도 60배에 달하는 면적의 민물을 가두어 이른바 시화호에 담수호로 인한 연간 2천2만톤의 식량생산을 확보하는 등 다목적 간척사업의 성격이었습니다.
당시 환경단체들의 활동이 미약해 지금처럼 문제제기에 발 벗고 나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의식있는 주민들은 당시 물막이 공사가 완공된다면 과연 담수호(빗물)의 양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많은 민물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첫째 상류의 개천이 3개 안산천 등의 시군에서 흘러내리는데 수량이 적고 오염돼 살아있는 민물확보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시적인 즉 장마 때 물을 가두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마저 여의치 않았습니다.
상류의 원천수가 터무니 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입안자들의 황당한 발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1960년 농경지확보 5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농어촌공사가 주도하고 현대건설 등이 10여 년 동안 시화호물막이 공사에 뛰어 들어 대망의 공사가 끝이 나고 지금 왕복 4차선으로 차량들이 왕래하는 관광코스입니다.
물막이 공사는 완공됐지만 당초 우려대로 담수호 고갈로 농경지확보도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애물단지가 된 시화호는 변신을 위한 민물이 아닌 바깥 바닷물을 채워 다른 용도의 개발로 공사가 한창입니다.
최근에는 조력발전소가 건립돼 오이도 주민과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시화호 수질이 많이 좋아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북쪽 간석지에 MTV기반공사가 한창인데 과연 그곳에 꼭 건립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수자원공사가 직원들 먹여살리기 위해 억지 개발에 손 댄다는 눈총 받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언론과 환경단체 등이 대기환경과 수질오염문제와 교통체증 등을 묶어 수 년전 연일 성토 했기 때문입니다.
수자원공사는 주민들의 반대의견을 잠 재우기 위해 나빠진 시화지역 대기환경 개선 및 교통체증 해소와 수질정화에 공사이익금 전부를 기부하겠다고 해 공사는 어렵사리 시작됐습니다.
시화지역의 부동산가격이 저 평가되었던 주된 이유가 시화공단에서 뿜어 나오는 공해로 인한 대기오염 및 시화호의 수질오염문제 등이 가장 컷습니다.
이제 민과 관이 합세하여 친환경을 부르짖으며 서서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대기환경의 악조건에도 불구 한 때 국내부동산시장의 온기로인해 시흥시 정왕동은 물론 전국이 일제히 부동산가격이 급등한 적도 있습니다.
환경단체 등의 건립반대에도 불구 아이러니하게도 엠티브이 등의 개발호재가 정왕동지역의 부동산가격을 끌어 올리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데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사실을 실감하며 시흥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약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 봅니다.
1994년 1월24일 시화방조제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 전국의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가 방조제 한 가운데 즉 중간지점에 수 십명이 모였습니다.
해당 시 기자였기 때문에 대망의 마지막 물막이공사 장면을 취재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총연장 12.7키로 미터를 오이도와 대부도방아머리에서 서로 메꾸워 오는 중간지점이었는데 정확히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않습니다. 지금의 조력발전소 근처가 아닌가 합니다.
30여 미터의 공간만을 남기고 당일 영하 10도가 넘고 칼바람이 부는 오전 10시 경 메꾸어 들어오는 양쪽에서 30여 대의 대형트럭이 집채만한 바위를 동시에 쏟기 시작합니다.
바깥쪽의 바닷물이 그 큰바위들을 시화호로 휩쓸고 갑니다.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30여 분이 흐르자 마지막 10여 미터를 남기고는 물살이 더욱 거세져 쉽게 막히지 않습니다.
동시다발로 쏟아대자 드디어 닿습니다.
불행일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볼살을 에이는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에도 기자들은 몸을 아끼지 않은 채 취재경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좋은 위치에서 마지박 물막이 공사 장면을 찍으려고 바위를 실은 대형트럭에 오르려는 치열한 몸 싸움은 이날 또 하나의 압권이었습니다.
이제 역사는 20년 가까히 흘렀습니다.
아이러니 하게 시화방조제와 조력발전소는 지금 명소와 애물단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년 전 올렸던 글을 현실에 맞게 각색해 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