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니
Text Lk 2,28-35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1. 캄캄한 밤중에 베들레헴 한 마굿간에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첫 번째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이 할례받으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보이신 첫 번째는 30세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기리는 절기를 ‘주현절’이라 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세상에 드러내신 지 약 3년 후에 구원의 십자가 사역을 시작하는 수난절까지 이 주현절은 지속됩니다.
주현절 제1주일이며 예수 세례 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만큼은 아니지만 처음 공개석상에 나타나신 ‘예수 할례’를 다루고 있는 눅2,28-35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니’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두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2. 먼저 28-33절을 봅니다.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에 대해 가르쳐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에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시므온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헬렐의 아들이요, 유대인들이 학자들에게 붙여 주는 최고의 칭호인 ‘라반’이라는 호칭을 최초로 받게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칭호는 7명에게만 주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그의 아버지 힐렐이 생존해 있었고, 시므온 자신도 이 사건 훨씬 후대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할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나이가 많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인간에 대해서는 의롭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경건했던 사람이라고 눅2,25에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메시아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희망, 즉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희망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깨닫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고서 세 이레 동안 금식을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미가엘을 보내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단10,12),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중에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29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32절)라 하였습니다.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는 말은 곧 죽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죽어도 좋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만이 죽음을 용감하게, 두려움이 없이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 이방을 비추는 빛,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한 것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본 일에 크게 만족하는 것 이상임을 뜻합니다. 죽음과 심판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유익하게 여기게 된 것(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죽음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안은 시므온은 감격해 했고 그 말을 들은 부모는 놀랍게 여겼습니다. 전도자가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복음을 우리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도 시므온처럼 ‘그리스도를 안고’ 주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이 그랬던 것처럼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여 생을 경건히 경멸할 수 있고, 죽음을 소망하게까지 됩니다. 모세에게는 가나안을 보리라는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보게 되면 죽으리라고 했지만 모세는 그 말씀을 변경시켜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신3,24- 25)
여러분, 어둠에 갇혀 고통 중에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시므온처럼 깊게 볼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관광을 말할 때, ‘아는 만큼 본다’라는 말을 합니다. 깨달으려 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던 다니엘처럼, 얍복강 가에서 온 힘을 다해 간절하게 기도하던 야곱처럼, 우리 모두도 우리에게 드러내신 구원의 주님을 품에 맞아들이고, 많이 알고 깊게 알려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찾고 구하고 두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깜짝 놀랄, 크게 놀랄, 진리를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3. 둘째로, 시므온의 축복과 마리아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인 34절~35절 중의 34절을 봅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할례 의식에서 제사장이 하는 축복은 단순히 의식의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영적인 선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며,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의미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아이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자라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할례를 통해 아이가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되었음을 상기시키는 의미도 갖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축복을 통해 아이가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언약의 축복을 이어가기를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을 통하여 이런 할례를, 원래는, 받을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 시므온의 축복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한 축복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분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잘 자라도록 책임을 다하고, 세상을 구원할 사역을 위해 헌신된 분임을 잊지 말라는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로서는 예수님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고 말하는 시므온을 보고도 놀랐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하는 말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약 성경(롬2,29)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각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온 자녀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마리아를 향한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은총을 받은 그녀가 가져야 할 각오가 보통 이상의 각오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패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따른다는 것을 나타내며, 반대로 흥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생명이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좋은 교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운명을 완전히 바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또한, 시므온은 이 아기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시지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대적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큰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계심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에는 큰 고난이 있을 것이며, 엄청난 도전이 있는 길이 될 것을 마리아에게 경고합니다. 그 경고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도 들어야 하는 경고입니다. 구원은 필수적으로 사탄의 저항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그 고난과 도전을 이겨내시고 사탄의 머리를 짓밟으셨지만 사탄이 사람에게 심어놓은 악의 씨를 우리는 거절하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이 싸움은 ‘회개’입니다. 본성이 하게 하고, 세상의 초등학문이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말씀이 아니고 은혜가 아닌 것은 단호히 거절하고 구원의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의 빛이 세상에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에 나아와 빛 가운데 드러난 어두움에 속한 것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 비가 세상에 내리고 있습니다. 봄비에 산천초목이 무성하여지듯이 죽어 있던 우리의 속사람이 그 은혜의 비를 충만하게 받아들여 새롭게, 아름답게, 풍성하게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보혈의 강으로 세상에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머뭇거리지 말고 그 사랑에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여 사랑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을 보고 깨닫고 믿으며, 영접하고 감사하며 순종하시기를 기도합니다.
4. 끝으로 마리아에게 전한 시므온의 예언 중 35절을 봅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겠다는 말씀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느낄 마리아의 고통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메시아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관계가 가까우며,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의 내적 비탄은, 말 그대로, 칼이 마음을 찔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메시아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그 아픔은 여러 사람에게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 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이루시는 진리의 빛이 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죄의 생각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주님의 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은밀하게 숨어 있던 죄까지도 다 드러납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속에 있던 것들을 발견한 사람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알게 하고 마침내는 자기 안에서는 의를 찾을 수 없는 것을 알고 통회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간고를 많이 겪으며 질고를 당하는 아픔이 우리를 허물과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롬5,8은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단순히 말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과 고통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그가 대신 죽으셨으므로 이제 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되었느니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세상에 거룩한 사랑의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신 주님은 우리가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