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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나 안 오시뇨
달맞이 가잔 뜻은 님을 모셔 가잠인데
어이타 우리님은 가고 아니 오시느뇨
하늘아 무너져라
와르르 르르르 르르르 르르르
잔별아 쏟아져라
까르르 르르르 르르르 르르르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나 안 오시뇨
벽오동 심은 뜻은
벽오동 심은 뜻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소쇄원의 경우, 뜻에 맞은 친구, 혹은 밝은 세상을 기다리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양산보의 경우 스승 조광조의 죽음으로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양산보는 몇 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스승과 의리때문에 마다했다고 합니다. 김인후의 48영중 제 1영인 소정빙란이 대봉대를 뜻하는 시인데요 한 번 감상해보시면 대봉대의 뜻을 제대로 아실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봉황은 오동나무에서만 살고 대나무 열매만 먹고 사는 새이기에 대봉대 주변 조경을 그렇게 한 것이지요.
옛 사람들은 봉황이 나타나면 세상에는 태평성대가 온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결국 벽오동은 세상에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심었다는 이야기이다. 봉황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장자’에 따르면 봉황은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예천'은 태평성대에만 단물이 솟는 샘이다. 봉황이 머무는 곳은 오동이다. 이 오동은 오동나무가 아니라 '벽오동(碧梧桐)'을 가리킨다.
오동나무는 목재가 희기 때문에 백동(白桐)이라 하고, 벽오동은 줄기가 푸르기 때문에 청동(靑桐)이라 한다. 오동나무는 현삼과(科), 벽오동은 벽오동과(科)로 전혀 다른 나무다. 굳이 구분하자면 ‘梧’는 벽오동을 뜻하고, ‘桐’은 오동나무를 뜻한다. 따라서 봉황이 깃드는 오동은 모두 벽오동이라 보면 된다. 벽오동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줄기가 푸르고 윤기가 나기 때문에 불로(不老)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자라는 속도도 빠르고 키도 큰 편이다.
한 해에 한 마디씩 자라기 때문에 마디를 세어 보면 나이를 알 수 있다. 크게 자란 벽오동은 과연 봉황이 찾아가 앉을 만큼 위엄이 있다. 이파리도 부채처럼 널찍하다. 잎이 무성하면 봉황이 그 속에 앉아 충분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희고 노란 빛을 띠는 작은 꽃무리가 가지 끝에 달린다. 꽃잎도 없고 꽃받침이 뒤로 젖혀져 꽃술만 쑥 나온 모습이 뭔가 어색해 보인다. 가을이 되면 다섯 날개를 아래로 오무린 듯한 팔랑개비 모양 안에 완두콩 같은 열매가 오순도순 달린다.
남도 민요 ‘새타령’은 "남영에 대붕새야 오동잎에 봉황새야 상사병에 기러기야 고국 찾는 접동새야" 하며 온갖 새를 불러낸다. 화투(花鬪) 11월의 패(오동광)에서도 벽오동과 봉황을 볼 수 있다. 봉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경남 함안은 봉황을 부르기 위해 벽오동을 심은 숲이 있고, 여수 오동도는 봉황을 쫓기 위해 벽오동을 베고 동백을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후기에 표암 강세황이 그린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선비가 벽오동 아래 앉아 마당을 쓰는 아이를 바라보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벽오동 아래서 기다리면 봉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혹시 벽오동에 깃들어 스스로 봉황이 된 듯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 않았을까? 벽오동에 빠지면 헛것을 보게 되나 보다. 굿거리장단의 대중가요 <벽오동 심은 뜻은> 노랫말 표현이 아주 재미있다. ‘봉황을 보잤더니’‘어이타’‘안 오시뇨’ 등은 친한 사람들을 만나 주고받는 대화의 한 부분인 듯하다. 노래 도입부의 첫 단락도 그렇지만 ‘하늘아 무너져라’로 나가는 후렴부문과 ‘와르르 르르르…’ ‘까르르 르르르…’로 이어지는 대목에선 어깨가 절로 들썩일 정도로 흥겹다. 어찌 보면 대중가요라기보다 굵직한 남성 목소리에 걸맞는 토속민요라 싶다. 음악인 김도향이 작사·작곡하고 그가 한 때 결성해 뛰었던 남성듀엣(투코리언스)이 취입, 히트한 이 노래는 1970년 만들어졌다.
벽오동
Chinese parasol tree, 碧梧桐아욱목(―目 Malvales) 벽오동과(碧梧桐科 Sterculiaceae)에 속하는 교목. 아시아가 원산지이며 키가 12m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고 너비가 30㎝에 달하며 낙엽이 진다. 꽃은 작고 녹색이 감도는 흰색이며 무리지어 핀다. 북아메리카의 따뜻한 지역에서는 관상용으로 기르고 있다. 한국에서 옛날부터 자라던 나무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들여와 널리 심었던 나무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벽오동나무를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부터 관상용 나무로 심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동나무처럼 잎이 크나 줄기의 색이 푸르기 때문에 벽오동(碧梧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벽오동나무를 그냥 오동나무 또는 오(梧)로, 오동나무는 동(桐)이라고 불렀다. 열매는 아주 특이하게 맺히며 익기 전에 5조각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각 조각들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배처럼 생겼는데, 이 조각의 가장자리에 몇 개씩의 씨가 달려 있다. 씨는 완두콩처럼 생겼는데, 오동자(梧桐子)라고 부르며 볶아서 커피 대신으로 쓰기도 하며 구워 먹기도 하는데, 폐·간·심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소화를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줄기에서 뽑아내는 인피섬유는 물기에 잘 견디기 때문에 조포를 짜거나 밧줄을 만드는 데 쓴다. 꽃을 잘 말려 가루로 만들어 화상 입은 곳에 바르면 잘 낫는다고 한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가지가 많이 달리나 뿌리는 깊게 내리지 않는다. 공해에는 잘 견디나 추위에는 약하여 주로 남쪽지방에서 자라지만, 서울에서도 겨울을 날 수는 있다. 벽오동나무는 옛날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왔다. 즉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 말은 봉황새가 나타나면 온 세상이 태평하게 되며, 이때 나타난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만을 먹고 벽오동나무에만 둥지를 짓고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김도향, 1945.5.3 ~
한국 CM Song의 대부이자 명상음악가인 가수, 음악인 김도향이 작사·작곡하고 그가 한 때 결성해 뛰었던 남성듀엣(투코리언스)이 취입, 히트한 이 노래는 벽오동 심은 뜻은 1970년 만들어졌다. ‘투코리언스’가 불러서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인기를 끈 이 노래는 우람하고 박력 있는 김도향과 손창철이 만나면서 탄생됐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군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훈련소를 거쳐 자대 배치 받은 부대는 육군 1군사령부 군악대. 그곳엔 10명의 합창단원이 있었고 이들 중 김도향과 손창철이 노래를 제일 잘 했다.
군생활을 함께 한 이들은 1969년 개구리복을 받고 제대했다. 전역을 한 김도향은 이듬해 혼자서 음반을 내고 가수활동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서 같이 합창을 했던 손창철이 찾아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도향아! 우리 듀엣 안 해볼래?” 그룹가수제안을 불쑥 한 것이다. 김도향은 손창철의 의견을 받아들여 듀엣이름을 ‘두 한국’으로 짓고 곧바로 노래연습에 들어갔다. 문제는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였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기성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프로 듀엣답게 새로 만든 신곡을 선보여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둘은 결국 김도향이 군복무 때 틈틈이 써둔 곡들을 모아 레코드판을 내기로 하고 준비에 밤낮이 없었다. 여러 곡들 가운데 이들이 특히 심혈을 쏟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로 나가는 노래가 그것이다.
제목은 가사에 나오는 <벽오동 심은 뜻은>으로 그 때 전국에서 유명세를 탔던 수학선생 김현준씨의 외아들 김도향의 철학적 삶을 담은 내용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자라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서 자랐던 터라 외로움을 느끼며 성장했다. 젊었을 때부터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등 한마디로 올된 편이어서 노랫말도 자연히 그런 흐름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 졌다.
연습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취입, 음반이 나왔고 본격 노래홍보에 들어갔다. 아무리 훌륭한 가요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묻혀버려 결국 헛수고만 하게 되는 까닭이다. YWCA 청개구리클럽에서 사회도 보고 아마추어가수 활동을 했던 이들은 어느 날 잘 나갔던 당시 동양방송(TBC) 이백천PD를 만났다. 그들의 노래를 들은 이PD는 감탄사를 연발, 자신이 만드는 방송프로그램에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졸지에 출연제의를 받고 기뻐했던 김도향과 손창철은 그 때 이PD가 “한 가지 지적할 게 있다”는 충고에 귀를 쫑긋했다. 얘기 골자는 듀엣 이름을 고치는 게 좋겠다는 것. ‘두 한국’이란 이름 대신 다가올 국제화시대를 맞아 ‘투코리언스’로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언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도향과 손창철은 듀엣명을 투코리언스로 바꾸고 TBC-TV의 게임쇼 ‘명랑백화점’ 프로에 단 한차례 출연, 확 떠버렸다.
출연섭외가 몰려들었고 각종 무대에 수시로 불려 나갔다. 인기듀엣으로 주가가 한창 치솟으면서 1972년엔 상복이 쏟아졌다. 다른 가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그들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74년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도향은 CM제작회사를 차렸고 손창철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듀엣가수 데뷔 4년만에 활동을 접은 것이다. 세월은 흘러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2년 어느 날. 김도향은 음악평론가가 된 이백천의 긴급전화요청으로 제주도의 한 노인요양원에서 <벽오동 심은 뜻은>을 부르게 됐다. 마을주민 2백여 명 앞에서 노래를 한 건 노래봉사를 위해 약속했던 출연가수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대타로 불려간 것이다. 여기서 뒷얘기가 재미난다. 그곳에 온 뒤 3년 동안 말을 한마디도 않았던 한 할머니가 김도향의 구성진 노랫소리에 갑자기 말문이 터져 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듀엣가수활동을 접은 김도향은 지금까지 국내 CM송의 대부라 할만큼 오랜 세월동안 한 분야를 깊이 있고 넓게 파오고 있다. 방송되는 국내 거의 모든 CM작품들(3천여 편)을 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파를 타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제작된 CM송은 줄잡아 1만여 편. 게다가 소리로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상음악까지 연구, 30장 짜리 CD역작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 연예계 데뷔 후 1집 음반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내고 TV출연을 두 번밖에 안 했다는 ‘60세 청년 김도향’. 그는 최근 2집 음반을 내 또 한번 매스컴의 초점을 받고 있다. 가수생활 35년만의 일이다.
음원출처:http://mediafile.paran.com
첫댓글 벽오동 깊은 의미가 있고 우리가락 즐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