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문예> 120호(2023년 9-10월)와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로 간다.
생각하는 사람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
차용국
먼 산을 넘어온 단풍은 강변의 낮은 산자락에 눌러앉아 푸른 강물을 지켜보고 있다. 염천의 시절을 견뎌낸 장군산(354.8m) 구릿빛 능선이 내려오면서 작은 산자락을 펼치고, 그곳에 작은 마을이 납작 엎드려 한낮의 오수에 빠져있다. 강 건너 산마루는 흰 구름을 이고 한가롭게 놀고, 숲은 가을의 풍경 속에서 고요하다.
이곳에 흙벽돌로 벽을 쌓아 올리고 지붕에 벼잎을 씌운 촌가 몇 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변과 산자락을 일궈 농사를 짓고 나무를 내다 팔며 살았다. 외따로 떨어진 궁벽한 마을이었다.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서 석장리(石壯里) 또는 장암리(壯岩里)라 불렀다.
외진 마을에 외국인 젊은 부부가 찾아왔다. 1964년 봄,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은 미국 대학원생 엘버트 모어(Albert Mohr)와 그의 아내 샘플(L.L.Sample)이 홍수로 무너진 지층에서 뗀석기를 찾아냈다. 뗀석기는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로 타제석기라고도 부른다. 뗀석기는 구석기시대부터 선사인이 사용한 도구이므로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다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유물이었다. 하지만 학계는 의구심을 떨어내지 못하고 시큰둥했다. 당시까지 한반도에 구석기인이 살았다는 유물이나 자료가 없었고, 뗀석기는 구석기시대는 물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소식을 들은 손보기 교수(1922~2010)가 석장리 강변을 찾아왔다. 그는 책상머리 학자가 아니었다. 오랜 발굴 현장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석장리 유적이 구석기시대에 닿아 있음을 직감했다. 정부의 발굴 허가 절차를 마친 그는, 1964년 11월 11일 연세대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발굴팀을 꾸려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였고, 한반도 산하에 구석기인이 살았던 사실을 세상에 알린 큰 사건이었다.
발굴은 까마득한 진화의 역사에 현대의 최첨단 과학을 들이대며, 가장 원시적인 몸짓으로 막막한 시간의 끈에 매달려 진실에 접근해 가는 지난한 작업이다. 2010년까지 총 46년에 걸쳐 13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C14dating)과 같은 과학적 방법도 처음 도입했다. 그렇게 석장리 유적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층을 찾아냈다. 이 땅에 선사시대 모든 시기에 걸쳐 인류가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기념비적 성과였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적막했던 벽촌(僻村) 마을이 사람들로 붐볐다. 발굴단이 캠프를 치면 마을 사람들은 들떠서 발굴단에 협조하며 발굴 현장을 지켜보았고, 아이들은 발굴단을 따라다니며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놀았다.
강변에 두 채의 단층 건물로 들어선 ‘선사유적전시관'과 '파른손보기선생기념관'은 산세를 위협하지 않고, 물길을 거스르지 않으며, 스스로 천연(天然)한 풍경으로 아늑하다. 전시관 앞에 조성한 선사공원에는 선사시대 문화와 유물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선사공원 잔디밭은 강변에 닿았고, 강물 위로 쏟아지는 햇빛의 알갱이가 물결을 타고 흐른다.
선사유적전시관에는 발굴한 석기를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자료와 발굴팀의 현장 활동사진과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손보기 선생은 기록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했고 관리에 엄했다. 당시 발굴일지에는 시간대별로 활동과 기록이 깨알처럼 꼼꼼하게 적혀있다. 당시 학생으로서 발굴팀에 참여했던 최복규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손보기 선생의 말씀을 회상했다.
"발굴이라 하는 것은 기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발굴하는 것은 기록이다. 당시 상황 모든 것을 기록해 놔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보고서도 쓸 수 있고, 이 담에 현장에 대한 상황을 알아야지 내년, 내후년까지 발굴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기록을 저녁마다 검사하셨어요. 발표시키고 발표가 끝나면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잠을 자러 갔습니다."
손보기 선생의 현장 중심 역사 인식과 철저한 기록 정신은 한국 선사시대 정립의 기틀이 되었다. 그는 제천 점말 용굴유적, 단양 도담 금굴유적, 청원 두루봉 동굴 유적,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 통영 상노대도 조개더미유적 등을 발굴하여 선사시대를 한국사의 전면으로 끌어냈다. 그는 얄팍한 머리로 글을 쓰지 않았고, 역사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몸으로 썼다. 그의 역사에는 땀 냄새가 난다. 더하여 그렇게 찾아낸 역사 증거물에 한글을 접목했다. 서구와 이를 번안한 일본식 용어가 지배하는 사학계에서 주류를 벗어난 그의 용기는 그래서 위대하다. 그는 말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하기 전까지 우리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석장리 유적이 발견되기까지는 우리말 구석기 명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세대를 거쳐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사를 우리글로 익히고 배워서 그 정신까지 후손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손보기 선생을 '파른'이라고 부른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앞에 붉은 등이 걸린 경찰서가 있었다. 어릴 적 일본 순사에게 망치로 맞아 머리에 피가 났던 경험 탓에 그 경찰서 앞을 지날 때면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다녔다고 한다. 이때 기억이 평생 붉은색으로 남아서 붉은색과 대조되는 의미로 '늘 푸르름(파른)'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손보기선생기념관 입구에는 '생각하는 사람, 호모 사피언스'라는 글이 눈에 확 띈다. 호모 사피언스는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선사인이 돌을 변형시켜 연장을 만든 것은 생각의 힘이라고 파른 선생이 일러주는 듯하다.
생각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일이다.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는 정신 활동이며, 결론을 얻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돌로 연장을 만드는 일은 주의 깊은 관찰과 논리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날것의 자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생각이 위대한 창조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모든 문명의 창조물도 석기를 만들어 낸 선사인의 생각에서 발아한 것이다. 호모 사피언스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종의 인류를 제치고 유전한 지난한 여정에는 생각의 힘이 있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살아온 생각하는 사람의 후손이어서 복되다.
금강의 물결은 늘 푸르고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산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단풍처럼 햇빛이 물 위에서 찰랑거리며 놀고, 선사공원 잔디밭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이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논다. 나는 물결을 찰랑거리며 건너오는 노을의 윤슬과 새로운 세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흐뭇했다. 그렇게 나는 석장리 강변에서 오래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