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품으로
하 봉 수
처남과 집사람을 태우고 장모님이 계신 천안에 있는 풍산 공원 묘원으로 가고 있다. 장조카가 함께 가야 하는데 바빠서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 결국은 내가 비가 약간씩 오는 흐린 날씨에 운전하고 가는 것이다.
추석도 지나고 해서 산소를 한번 둘러보고, 장모님 묘의 위열에 있던 처이모님 부부의 묘가 없어진 것에 대한 어떤 조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모님은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고 병천 순대로 유명한 병천 ‘풍산공원묘원’의 입구 쪽 ‘장미’ 불럭 ‘나’열에 안장 되어 있다.
얼마 전에 집사람과 둘이서 이곳에 왔을 때 장모님 산소 바로 위열에 있어야 하는 처 이모부님의 산소가 없어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공원 묘원에 있는 산소가 없어 졌으니, 처남에게 물어 보니 처의 이종 처남이 자신의 부모님산소를 이장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선,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제사를 모시지 않고, 형제간에 금전문제로 다투다 보니 형제끼리 모여서 할일이 없어진 것이다. 맏형인 이종 처남은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나름대로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갔다. 한 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기도 한 사람이다. 나이 먹고 힘없으니 아우들의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형제간이란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말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각자 살아가기 때문이다.
명절날에는 자식들이 찾아오니 형님 댁에 제사 모시러 올라 갈수도 없고 제삿날은 근무하는 날도 문제지만 너무 멀어서 못가고 형제간에 금전문제가 발생하면 원래부터 제사 싫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결국 아예 서로 보지도 않고 사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결국은 화합이 안 되고 살기 바쁘다보니 산소에 찾아오는 형제도 없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두는 것은 관리비만 나가고,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국은 계약기간 종료 시점에 맞추어 산소를 개장하고 이장하여 자연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이라고 한다. 어디 다른 곳에 모신 것도 아니고 그냥 산속에 뿌렸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하니 며칠 전에 이종 처남한테서 집사람에게 몇 번의 전화가 온 걸 들은 것 같다. 그때 물어 보니 오빠가 안부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부모님 산소를 이장할러고 하니 장모님 산소도 같이 하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지 못한 것으로 나중에 이야기 들었다. 차마 자신의 처한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 변명처럼 들릴 것이고 불효로 인식 될 것 이라는 마음에서 안한 것 같다.
장모님 산소는 이종 처남이 사놓은 산소자리를 한자리 주어서 그곳에 안치한것이기 때문에 이장할러면 이종처남이 함께 해야 한다.
처남이 어려운 사정인걸알고 이종 처남이 당시 어려운 결정을 하여 산소자리를 준 것이다. 물론 시골에 안장할 수도 있지만 번거로운 절차도 그렇고 가까운 곳이고 더구나 공원 묘원이라 너무나 고마운 결정이었다.
장모님 돌아가시는 시기에는 처갓집이 시골에서 안산으로 올라 온지 얼마 안 되었고, 집안에도 조카가 장애가 생겨 힘들고, 처남댁이 종교에 빠져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닐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집안의 무질서가 주는 스트레스가 장모님이 조금 더 일찍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종처남이 부모님산소를 이장한 마당이니 장모님 산소도 이장해야 하다는 절대 명제가 생긴 것이다.
대마도 여행을 가기위해 하루 전 들린 부산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넷째 동생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나는 국립묘지로 가는데 너는 사후에 어떻게 할 거냐?” 고 물어니 그냥 화장해서 뿌리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묘지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산소 보다는 화장 후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수목장에서 이제는 그냥 자연에 뿌리는 것으로 생각이 변했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서 이장할 수 있는 해라는 처남의 설명에 이미 윤달은 지나갔으니 사년 후에 하자고 했다. 그리고 산소를 개장하고 이장하는데 소요되는 절차가 그리 쉽지는 않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소자리는 시골 강림에 있는 ‘백천 농원’의 소나무 아래에 뼈 가루를 묻어 두자고 했다. 새로운 ‘수목 장’ 보다는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비닐에 넣어 진공 포장 하지 말고, 항아리 속에도 넣지 말고, 그냥 흩어 부리는 것 보다는 모아서 묻는 것이 낳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알고 나중에는 아무도 모르게 하자고 했다.
‘ 백천 농원’은 집사람이름으로 토지등기가 된 곳이다. 농원의 약간 구릉지대에 노송이 몇 그루 자라고 있다. 그곳을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내고 계단을 만든 다음 주변을 정리하고 출입금지 푯말과 노끈으로 울타리를 쳤다. 처남과 의논 후 미리 대강의 준비를 했다.
딸이 어머니를 모시고 자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묘지문화의 변화 때문에 비록 흔적이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장모님의 자식 사랑마음은 가슴에 두고 얼마 후면 영원한 자연 속으로 다시 돌아가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