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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이 시대의 진짜 기적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로다”(시 91:7)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기적은 관객들이 모여 있는 큰 강당에서만 일어나며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방영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성실한 종들을 위해 일할 때 마케팅 전략에 기대지 않으신다(마 7:21~23). 『천인이 엎드러지나』의 저자 수지 하젤 먼디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아버지 프란츠 하젤과 가족을 기적적으로 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소개했다.
재림교인이자 평화주의자였던 프란츠 하젤은 “최전선에 교량을 세우는 히틀러의 정예 부대인 699 공병 선발대로 징집됐다.” 1941년 7월 1일, 이들은 폴란드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간 이어진 행진 끝에 수많은 병사가 탈진했다. 뒤처진 병력은 병사하거나 러시아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프란츠 역시 기진맥진한 채 고열에 시달렸다. 양말은 너덜너덜했고 커다란 물집들로 발이 부어올랐다.
아무런 희망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프란츠는 기도했다. “주여, 저의 생명을 주님께 맡겨 버린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집에서 떠나올 때 주님이 저를 가족 품에 다시 안전하게 데려다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저에게 또 다른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목숨을 잃을 겁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손에 저를 맡깁니다.” 그리고 곧 그는 잠에 빠졌다. 오전 3시 15분, 기상 명령과 함께 일어난 그는 깜짝 놀랐다. 발이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여러 번 그러셨듯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를 위험에서 구하셨다.
그가 속한 부대의 1,200명 중 생존자는 프란츠를 포함해 7명뿐이었다. “천 명이…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로다”라고 시편 91편 7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보살핌을 프란츠는 몸소 체험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라는 10절의 약속도 집에 있던 프란츠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쇠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살피시며 결코 내버리지 않으신다. 하젤 가족을 지키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능히 지키신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국연합회 세계선교본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고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한국 교회가 되도록
7월 2일
인생의 전환점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22:6~7)
인생을 뒤흔드는 위기를 맞은 적이 있는가? 자신의 실수로 혹은 잘못된 조언을 따르다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속수무책으로 불쑥 위기를 맞는 경우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이런 위기에 맞닥뜨리면 삶은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 법대에 다니던 루터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6주를 다니고 짧은 방학을 얻은 루터는 부모님이 계시는 만스펠트로 향했다. 1505년 7월 2일,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낙뢰가 무섭게 번쩍이며 땅에 꽂히는 광경을 보았다. 겁에 질린 그는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울부짖었다. 광부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광부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에게 맹세한 것이다.
일부 회의론자는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천둥 번개 일화는 루터가 직접 사실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수도사가 될 생각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사건이 루터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에는 틀림없다. 7월 16일 저녁, 루터는 친구들과 식사를 나누며 송별회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에르푸르트는 수도원이 너무 많아 ‘작은 로마’로 불렸는데 바로 그곳에서 종교 개혁으로 향하는 루터의 영적 여정이 시작됐다.
“인생은 안전지대에서 벗어날 때 시작된다.” 무서운 벼락을 경험한 뒤 루터는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었다. 다메섹 인근에서 갑자기 등장하신 그리스도는 사울을 박해자에서 지치지 않는 사도로 바꿔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서 끄집어내어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오늘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신다. 꼭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야만 움직일 것인가?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하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의권/스즈키 에리코 선교사 부부(일본)
영혼 구원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개인과 교회가 되도록
7월 3일
새 예루살렘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많다. 구약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재건과 메시아 왕국의 건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슥 12~14장). 그러나 그런 일이 있으려면 먼저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지고 모리아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야 한다(고후 3:1).
테오도어 헤르츨(1860~1904)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언론인이자 정치 활동가였다. 그는 세계시온주의자기구를 설립하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나라를 세우도록 장려했다. 헤르츨은 1904년 7월 3일에 사망했지만 그로부터 44년 뒤에 세워진 이스라엘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할 린지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에서 1948년에 최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으며 40년이 지난 1988년부터 7년 환란이 지나면 1995년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문자 그대로 지상 예루살렘의 보좌에서 통치하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언된 시각이 다 지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지의 예언 해석은 왜 빗나갔을까?
다니엘 9장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70년간 바벨론 유수가 끝나고 이루어질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건에 관해 말한다(2절). 이것이 다니엘 9장 24~27절의 70주와 다니엘서 8장 14절의 2,300주야의 기산점이다. 그러나 린지의 주장처럼 이스라엘의 건국이 종말 예언의 기점이 된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예루살렘과 성전 중건에 관한 구약의 여러 예언은 바빌론 유수에서 풀려난 유대인에 의해 성취됐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기록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에도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을 종말론과 연관 짓는 구절은 없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히 11:10) 천상의 도성을 고대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새 예루살렘에 위치한 하늘 성전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계 7:15; 계 21:2).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얻을 영광스러운 유업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노영/이미진 선교사 부부(대만)
걷기 사역으로 건강 향상과 영적 친교의 증진이 이루어지도록
7월 4일
라이프치히 논쟁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눅 10:26, 메시지)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가?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면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쟁 가운데 하나인 루터의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이 그랬다.
신교도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다. 몇 번의 대화 끝에 그들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토론을 벌이기로 했다. 6월 27일로 날짜를 정하고 요한 에크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변호했고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비텐베르크 신교도 편에 섰다. 에크는 탁월한 언변으로 청중에게 호소했다. 카를슈타트가 말한 내용은 좋았지만 호소력이 약했다.
여러 차례 입지를 쌓은 에크는 이제 루터가 직접 나타날 차례라고 생각했다. 1519년 7월 4일,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토론”이 막을 올렸다. 이것이 인생에 매우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임을 루터는 알고 있었다. 이 토론에서 밀리면 수많은 것을 잃어버릴 참이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논객은 결코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루터는 성경에 충실했고 에크는 성경을 뒤틀어 교황과 가톨릭 전통을 비호하는 데 열중했다. 이들의 논쟁은 7월 14일이 되어서야 끝났고 여러 편견과 성경을 해석하는 상충된 의견 탓에 청중도 분열됐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나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사람이 항상 진리와 친근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웅변술을 발휘해 빈약한 논리와 왜곡된 정보를 덮는 일은 흔히 있다. 둘째, 성경을 함께 탐구할 때는 상대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충돌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성경, 오직 성경만을 모든 교리의 표준이자 모든 개혁의 기초”(쟁투, 595)로 드높이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효수/김윤주 선교사 부부(튀르키예)
현지인 소그룹과 가정 교회가 더 많이 생겨나도록
7월 5일
복제 양 돌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권능의 말씀으로 그분은 이 거대한 우주의 모든 생명을 지으셨다.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으로 모든 별을 만드셨다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시 33:6, 9, 새번역). 피조물인 인간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생명체의 유전자를 조작했다.
1996년 7월 5일, 여러 유전학적 연구와 복제 시험을 거듭한 끝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복제 양 돌리가 탄생했다. 돌리는 “6살 된 핀도어셋 품종의 유선 세포와 스코틀랜드 블랙페이스 품종의 난세포를 복제해 만들어졌다.” 그 후 인류는 수많은 포유류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실험은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신기술의 발판이 됐다.
1997년 2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이와 관련된 법적·윤리적 쟁점에 관해 연구하도록 미국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 요청했다. 위원회는 “공공 기관이든 민간 기관이든 연구·임상을 막론하고 인간의 세포를 핵 치환하여 아이를 복제하려는 시도는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1997년 11월 11일, 유네스코의 <인간 게놈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에서는 “인간 복제 등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1998년 1월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전 세계적으로 인간 복제를 금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학계가 이 규제를 따를지는 모를 일이다.
유전학 실험 덕에 수많은 난치성 유전병 치료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실험은 하나님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분의 놀라운 창조를 멸시하는 일이 된다(창 1:31).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26절), 있는 그대로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들고 그분의 피조물을 그분의 의도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지성배/김영란 선교사 부부(파키스탄)
학교 개척으로 선교의 문이 계속해서 열리도록
7월 6일
화염 속의 증인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1415년 7월의 남독일 제국의 중심 도시였던 콘스탄츠를 방문했다고 상상해 보자. 여러분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를 보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모인 인파와 맞닥뜨릴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저마다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베네딕토 13세, 요한 23세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교회 통치와 도덕적인 삶을 개혁하고 이설을 뿌리 뽑기 위해 개최됐다.
1415년 7월 6일 토요일 이른 아침, 프라하 대학의 유명 교수 얀 후스가 콘스탄츠 성당에서 의회 앞에 섰다. 그는 교회에서 파문됐고 범죄자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다. 주교 6명이 그에게 모욕감을 주는 의식을 시작했다. 먼저 그들은 후스의 제의를 벗기고 머리를 밀고 악마의 그림과 함께 ‘이교의 창시자’라고 새겨진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맡겼다. 후스는 호송대에 둘러싸인 채 콘스탄츠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책이 광장에서 불타는 모습을 보았다.
처형장에 선 개혁자의 팔은 등 뒤로 결박됐고 목은 사슬로 말뚝에 묶였다. 그의 몸 주위로 장작과 지푸라기가 수북이 쌓였다.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그들이 제안했다. 그러나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믿으며 기쁨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후스는 말했다. 불꽃이 타올랐고 후스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며 두 번 찬양을 불렀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후스의 얼굴을 덮었고 정적이 흘렀다. 그는 기도와 찬송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 전역을 뒤흔들었고 후스파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이어졌다.
얀 후스는 구주를 배반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순교자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정신을 품고 있는가?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손만식/어은숙 선교사 부부(필리핀)
원주민 교회인 오유난 교회와 미션 학교가 계속 유지되도록
7월 7일
행운의 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고대부터 숫자 7은 완성, 완벽의 상징이었다. 기쁨과 만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를 ‘제칠천국(Seventh heaven)’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 2007년 7월 7일 토요일을 두고 수많은 미신과 음모론이 나돈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날은 한 주의 일곱째 날일 뿐 아니라 새천년 이후 일곱 번째 해 일곱째 달의 일곱째 날로 날짜가 07/07/07로 표시되는 날이었다.
수많은 도박꾼이 그날을 행운의 날로 여겼다. 웨딩플래너 웹사이트인 더노트(TheKnot.com)에서는 보통 때보다 3배 이상 많은 3만 8,000커플이 이날을 결혼일로 잡았다. 또 기후 위기와 관련한 행사 라이브 어스(Live Earth) 콘서트도 세계 곳곳에서 열렸다.
그 와중에 재림교회는 브라질의 여러 도시에서 안식일을 기쁨의 날이라고 강조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나도 거기 참여해 상파울루 재림교회 대학 예배당에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 설교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곱째 날에 안식일을 기념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안식일은 매주 찾아와 바쁘고 치열한 삶의 영적 우선순위를 일깨운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 속의 지성소로서 안식일은 물질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되새김과 동시에 하나님을 비롯한 인간 동료들과 더 특별한 시간을 보내도록 초청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복을 얻는 통로이며 구원받은 백성이 영원히 지킬 안식일의 원형이다(사 66:22~23).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약속하신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사 58:13~14).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대륙선교회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 가정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7월 8일
끝없는 지옥은 없다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았는가? 지옥을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설교자와 기독교 작가가 많다. 1741년 7월 8일, 18세기 미국의 유명 설교가이자 신학자였던 조너선 에드워즈는 코네티컷주 엔필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이라는 설교로 청중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에드워즈는 참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번쩍이는 불꽃”이 집어삼킬 것이며 “영겁의 세월 동안” 지옥에서 끝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굉장히 직설적인 어조로 말했다.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소란을 피워 설교가 중단되기까지 했다.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 지옥에 대한 중세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단테는 지옥은 지구 내부에 있으며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묘사한다. 영국인 가톨릭 사제 존 퍼니스(1809~65)는 『지옥의 광경』이라는 책자에서 영원한 고통을 설명한다.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거대한 쇠구슬이 있다. 1억 년에 한 번씩 새가 날아와 날개의 깃털로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쇠구슬이 다 닳아 버려도 불타는 지옥에서 죄인의 형벌은 끝나지 않는다고 퍼니스는 설명한다. 인간은 매우 짧은 기간을 살 뿐인데(시 90:9~10) 왜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끝도 없이 벌하신다는 말인가?
엘렌 하먼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 때문에 청소년이 될 때까지 고민했다. “하나님의 정의가 자비와 사랑을 가려 버린다.”(자서, 543)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간은 불멸을 타고난 존재가 아니라 소멸된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화잇은 또 악인이 하늘에서 쫓겨나 맞이하는 최후의 소멸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의 행위라고 진술했다.
죄와 고통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죄는 완전히 뿌리 뽑힐 것이며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계 21:5) 하여 세상이 본래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도록 하실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죄를 이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교린/이미화 선교사 부부(아랍 에미리트)
에티오피아에 본부를 두고 진행될 예멘인 선교를 위해
7월 9일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젊은 시절에 나는 지역 교회에서 안식일 오후 청년반에 즐겨 참석했다. 재미있는 여러 활동 중에는 성경 구절 빨리 찾기 대회도 있었다. 거의 매번 나의 누나 엘레다가 승리를 차지했다. 누나의 성경에는 자동으로 성경절을 찾는 기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장과 절이 표시되지 않았던 수백 년 전의 성경으로는 이런 대회를 꿈도 꿀 수 없었다.
스티븐 랭턴(1150~1228)은 1228년 7월 9일 사망한 유명한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그는 성경을 장별로 분류하는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에도 그 분류대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다.” 그 뒤 1448년, 유대인 랍비 모르드개 나단이 구약을 절별로 나누었다. 1551년에는 로베르 에티엔으로 알려진 로베르트 스테파누스가 같은 방식으로 신약을 나누었다. 마침내 1560년, 최초로 장과 절이 구분된 제네바성경이 탄생한다. 제네바성경은 킹제임스성경보다 먼저 나온 개신교 영문 성경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성경과 가까워지는 것, (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것, (3) 그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 (4) 성경의 진리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손에 들고 있을 때는 거룩한 땅에 선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좋은 책이 많지만 우리는 성경을 일생토록 빛으로 삼아야 한다(시 119:105) “성경을 상담자로 삼으라. 세상의 잡것들에서 눈을 돌릴수록 더 빠르게 성경과 친숙해질 것이다.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할수록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깊어질 것이다. 그분의 진리가 마음에 새겨지고 지울 수 없는 감화를 끼칠 것이다”(부모, 484).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기쁨, 의미, 희망을 가져다준다. 말씀은 영원에 이르는 다리이며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사 40:6~8).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지훈/신은주 선교사 부부(미얀마)
MPM 직업 훈련센터의 영어 학원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7월 10일
의용선교회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젊은이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곧 교회의 미래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1879년, 미시간주 헤이즐턴의 작은 시골 교회에서 14세 소년 루서 워런과 17세의 헨리 페너는 영적으로 미숙한 친구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림교회 최초의 청년회가 생겨났고 그들을 따라 청년회는 미국 전역과 해외까지 퍼졌다.
재림교회 청년 사역은 빠르게 성장했고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부응해 1907년 7월 10~21일 오하이오주 마운트 버넌에서 안식일학교 및 청년 대회가 개최됐다. 세계로 뻗어 가는 재림교회 선교 활동에 청년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발표와 회의의 주제였다. 면밀히 조사하고 심의한 끝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대총회, 연합회, 합회에 청년의용선교부를 두고 지역 교회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청년의용선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
대회에 참석한 아서 G. 대니얼스 대총회장은 그 명칭이 (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교단, (2) 청년들이 모인 교회 조직, (3) ‘의용선교회(Missionary Volunteers)’라는 부서의 목적을 밝혀 준다고 설명했다. 의용선교회는 오늘날 AY(Adventist Youth)로 이름이 바뀌었고 교회에서 교회 성장과 전도에 가장 역동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역이 온 가지로 뻗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젊은이의 생기, 열의, 용기를 찾으신다. 그분은 청년을 택하여 자신의 사업을 진척시키고자 하신다. 맑은 정신으로 계획하고 용감하게 일하려면 싱그럽고 한없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청년 남녀들은 젊은 시절의 힘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명민한 생각과 왕성한 활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동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야 한다”(복음, 67).
여러분의 지역 교회 청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여전히 굳건하고 역동적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활력과 선교에 대한 열의를 불어넣기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고종식/김은아 선교사 부부(아드라 필리핀)
필리핀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직업훈련센터가 잘 준비되도록
7월 11일
시간 관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인간은 시간이라는 영역에 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햇수로 표현한다. 고대 문명은 해시계로 시간을 쟀다. 수백 년 뒤에는 용수철, 추 등으로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가 등장했다.
영국의 빅 벤은 네 개의 종이 달린 시계 중 세상에서 가장 크다. 원래 빅 벤은 시계탑에 달려 있는 거대한 종의 이름이었지만 나중에는 시계 자체와 시계탑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빅 벤은 1859년 5월 31일에 처음 작동했고 1859년 7월 11일, 처음으로 종이 울렸다. 그러나 두 달 뒤 가장 큰 종에 균열이 생겼고 4년 동안 네 번째 종만 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도 전자시계, 쿼츠 시계, 손목시계 등으로 대체됐다. 스트론튬 원자시계는 150억 년이 지나도 1초의 오차조차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 오늘날 그리니치 표준시, 국제 원자시, 협정 세계시 등의 표준 시각은 원자시계를 태양과 지구의 상호 관계에 맞추기 위해 고안됐다.
시간 측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엘렌 화잇은 “인생은 단 한 번뿐”(딸들, 189)이며 “삶은 신비하고 신성하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드러낸다. 삶의 기회는 소중한 것이며 그 기회를 열심히 활용해야 한다. 한 번 놓친 기회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치료, 397)라고 충고했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거룩한 선물이다. 우리는 시간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시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시간은 늘릴 수도 줄일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우선순위를 정하고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영원한 미래를 결정한다. 잠시 멈춰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돌아보라. 언제나 현명하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서병웅/이정민 선교사 부부(기타 지역)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이 미얀마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기를
7월 12일
그리스도의 생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온 사건은 가장 큰 미스터리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인성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탐구해야 할 가장 숭고한 주제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토록 긍정적인 변화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엘렌 화잇은 예언 사역 초기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호주에 있는 동안(1891~1900)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생애 전반에 관해 저술했다. 1892년 7월 12일 자 일기에서 화잇은 “오늘 오후 그리스도의 삶에 관하여 여러 쪽의 글을 썼다. 성령의 큰 도움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화잇의 가장 영감적인 세 가지 저술로 꼽히는 『산상보훈』(1896), 『시대의 소망』(1898), 『실물교훈』(1990)의 출판은 그렇게 시작됐다.
1892년 7월 15일 금요일, 화잇은 대총회장 O. A. 올슨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하나님 앞에서 떨며 걷고 있습니다. 말로든 펜으로든 속죄의 희생이라는 큰 주제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게 제시된 주제들을 어떻게 해야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주제를 어설픈 표현으로 하찮게 만들까 두렵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누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편집 보조인의 도움으로 화잇 여사는 자신이 작성한 수많은 기사, 다른 이들의 믿을 만한 인용문, 환상에서 자신이 보았던 그리스도의 삶을 취합했다. 그리고 성령의 지도 아래서 더 많은 새로운 정보를 기록했다. 마침내 1898년 10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가장 탁월하게 설명한 책 중 하나인 『시대의 소망』이 출간됐다.
오늘날은 사복음서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책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고찰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자료가 많다.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읽고 공부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종훈/조혜정 선교사 부부(네팔)
재림 신앙을 받아들인 타 교파 성도들이 재림 성도답게 성장하기를
7월 13일
숫자 13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눅 22:47~48)
오늘은 7월 13일이다.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비행기 좌석의 13열이나 호텔의 13층을 싫어한다. 13일의 금요일이 무서워서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왜 이런 미신이 생겨났을까?
‘불길한 13’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12는 완전을 뜻하지만 숫자 13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예수님의 일행은 열두 제자를 합쳐 13명이었다가 배신자 유다가 떠난 뒤 온전한 12명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또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날이 유대력으로 니산월 13일의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도 있다. 1970년 4월 13일에 아폴로 13호의 산소 탱크가 폭발해 임무가 중단됐고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에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 수백 명에게 체포됐다. 이렇게 13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1907년에 출간된 토머스 W. 로슨의 소설 『13일의 금요일』은 해당 날짜에 대한 미신에 불을 지폈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8월을 불길한 달로 여기는데 위의 미신과 결합해 8월 13일 금요일은 특히 공포의 대상이 된다. 가령 브라질에서는 8월을 미친 개의 달로 여겨 개에게 광견병 예방 접종을 한다. 선원들이 긴 항해를 떠나는 달인 8월에는 포르투갈 처녀들이 결혼을 꺼린다. 결혼하자마자 허니문도 없이 혼자 남고 싶은 신부는 없기 때문이다.
13일의 금요일에 많은 재난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매년 다른 날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재난이 발생한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다. 우연한 사건을 기준으로 삼고, 예외적인 일을 규칙이라고 여기면 이런 문제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손에 삶을 맡긴 사람은 근거 없는 미신 따위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신승환/이경희 선교사 부부(아드라 방글라데시)
아드라 방글라데시 직원 채용과 직원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7월 14일
아기를 까맣게 잊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인생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우리는 과거의 실수와 방해를 과감히 떨쳐 내고 현재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방해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어떤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와 씻을 수 없는 후회를 남긴다.
안타깝게도 가장 사려 깊은 부모조차 치명적인 실수를 할 때가 있다. 2016년 7월 14일, ABC 뉴스에서는 니콜 펠레티에레의 경고성 기사를 보도했다. ‘찜통 차량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악몽, 아기 망각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레이레이’라고 불리는 아이였던 소피아 레인 카발리에로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첫돌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2011년 5월 25일, 레이레이는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차량에 혼자 남겨졌다. 그날 아이의 엄마 크리스티 리브스는 집에서 전화 회의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아이를 아빠인 브렛 카발리에로에게 맡겼고 아빠가 아이를 유아원에 데려다주기로 되어 있었다. 꼬마 레이레이는 첫 생일 선물로 선생님께 받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후 1시 15분, 리브스는 남편의 사무실에 들러 함께 식사하러 나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며 새 드레스를 입은 레이레이가 정말 예뻤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자 브렛이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갑자기 브렛이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리브스에게 말했다. 리브스는 브렛이 무언가 잊어버렸겠거니 짐작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침에 레이레이를 내려 준 기억이 없어.”라고 브렛이 털어놓았다. 리브스는 즉각 911을 불렀고 구조대원은 레이레이를 살리려고 40분간 분투하며 지역 어린이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거기서 레이레이는 심정지로 인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아기 망각 증후군은 생각보다 흔하게 발생한다. 레이레이는 그해 미국에서 같은 이유로 사망한 33명의 아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사야 49장 15절에는 놀라운 약속이 명시되어 있다. 부모는 아이를 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각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 아들을 바쳐 인류를 구하신 그분이 지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우리이다”(치료, 229).
어떤 부모는 편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신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국연합회 세계선교본부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선교지에 필요한 자원을 허락하시도록
7월 15일
돌들의 외침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고고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꼽으라면 1802년부터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제타석을 빼놓을 수 없다. 몇몇 학자에 따르면 로제타석은 1799년 7월 15일 프랑스 선장 피에르 프랑수아 부셰가 처음 발견했다. 그러나 7월 19일설, 8월 발견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이 돌덩이는 1799년 여름 나폴레옹의 부대가 이집트로 진군했을 때 나일 삼각주의 로제타 마을에서 발견된 것이 분명하다.
로제타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신으로 떠받드는 기원전 196년의 칙령이 담긴 화강암 비석이다. 비문은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 민중이 사용하던 속용 문자(俗用文字), 그리스어 이렇게 세 언어로 기록됐다. 토머스 영이 속용 문자를 해독했고 여기에서 도움을 받아 1822년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상형 문자를 해독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간 노예로 지내던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상형 문자 기록을 해석할 길이 열렸다.
갖가지 고고학적 발견과 더불어 로제타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해 주었다. 그 당시는 고등 비평가들(오늘날의 역사 비평가들)이 성경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성경의 여러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에 대해 중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했다.
성경이 굳이 외부 자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성경 자체로 입증되는 것이니만큼 성경이 다른 자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고학은 성경 사건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재구성하고 그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이 어떤 집을 짓고 살았는지, 어떻게 일하고 결혼했는지 등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고고학이다. 예를 들어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을 상술한 마르틴 헹엘의 저서 『십자가 처형』은 그리스도의 잔혹한 십자가 죽음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더해 준다.
주님, 고고학적 발견으로 성경을 뒷받침하고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면주/김영문 선교사 부부(파키스탄)
AWR에서 운영 중인 라디오 방송국 4곳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7월 16일
새로운 선지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는 엘렌 G. 화잇(1827~1915)이 마지막 때의 진리 회복을 위해 예언적으로 특별한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믿는다. 예언들이 성취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엘렌 화잇은 생전에 재림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재림을 보기 전에 잠들 수도 있다는 확신이 점점 커졌다. 1915년 7월 10일 안식일 아침, 아들 윌리와 함께 기도를 마치고 나서 화잇은 아들에게 속삭였다. “내가 믿어 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나는 잘 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몇 마디 말을 더 남겼다. 1915년 7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40분, 70년간의 보람 있는 예언 사역을 마친 뒤 화잇은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
말년에 화잇은 하나님이 또 다른 진리의 선지자를 일으키시겠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화잇은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답하지 않으셨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1907년 화잇이 남긴 글은 다음과 같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충분한 빛이 주어졌다. 나의 삶이 연장되든 말든 관계없이 나의 저술들은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시간이 지속되는 한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나의 글들은 사무실에 파일로 보관되어 있고 내가 살지 못하더라도 주님께 내가 받은 이 글들은 계속 살아서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1기별, 55).
엘렌 화잇이 죽고 100년도 더 지난 지금, 다른 선지자가 나타날지 궁금해하는 재림교인도 있다. 그들은 요엘 2장 28절을 자주 인용한다. 하나님이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며 사람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볼 것이라는 구절이다. 이 말씀이 정녕 모든 사람이 선지자가 될 것이라는 뜻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때로 하나님은 바로(창 41:1~36), 느부갓네살(단 2장) 같은 사람에게도 제한적으로 계시를 보여 주셨지만 그들을 선지자로 부르시지는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혜롭고 선하셔서 실수가 없고 아무도 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실천하면 된다. 이 말씀만으로도 하늘 본향까지 이르기에 충분하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광성/이은정 선교사 부부(대만)
한글 교실과 일본어 교실을 통한 구도자 확보와 성경 공부를 위해서
7월 17일
또 이별 없으리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어떤 이별은 마음을 허전하게 만든다. 매 순간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이 떠나가는 모습은 보고 있기가 힘들다. 우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면서도 그에게 남아 있어 달라고 부탁하기란 참 고통스런 일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때는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그곳을 고대한다.
영어 찬송가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작 와츠(1674~1748)는 1674년 7월 17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났다. 와츠는 찬미 약 600편을 남겼고 1707년에는 <한 기쁨의 땅 있으니>(607장)라는 아름다운 찬미를 지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한 기쁨의 땅 있으니
곧 하늘 나랄세.
늘 낮이요 밤 없으며
또 아픔 없으리.
저 천성을 향해 가세.
나팔 소리 쉬 들리리.
주 권세로 임하시면
그때엔 이별 없으리.
윌리엄 밀러는 이 찬미를 좋아했다. 1849년 임종 시 그는 가족들에게 계속해서 이 찬미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랫동안 수많은 대총회 총회와 장막 부흥회 폐회식에서 사람들은 이 찬미를 부르면서 ‘이번 모임이 마지막이고 다음에는 하늘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재림교회 개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빨리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이작 와츠가 이 가사를 쓰고 윌리엄 밀러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보다 재림이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실 날이 머지않았다. 거기에 가면 다시는 이별이 없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승진/맹선옥 선교사 부부(일본)
노령화된 모바라 교회의 목양을 위해 지혜를 주시도록
7월 18일
마리 퀴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실습했다. 1891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대학에서 물리, 화학, 수학 공부를 이어 갔고 후속 연구를 이끌었다. 피에르 퀴리와 결혼한 그는 마리 퀴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1903년, 마리는 남편과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1년에는 폴로늄과 라듐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고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다.
1898년 7월 18일, 마리와 남편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고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 이름 지었다. 다섯 달이 지난 12월 26일 새로운 물질을 또 발견한 내외는 ‘광선’을 뜻하는 라틴어에 착안해 라듐이라 명명했다. 방사능을 뜻하는 ‘레이디오액티비티(radioactivity)’도 거기서 나왔다. 항상 주머니에 라듐 시험관을 넣고 다녔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X레이 보급에 앞장섰던 탓에 방사능에 노출된 퀴리는 재생 불량성 빈혈로 1934년에 사망했다. 오늘날과 같은 이해 수준과 안전 수칙이 미비했던 탓에 퀴리가 직접 발견하고 연구한 물질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방법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는 길뿐이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럼에도 그분께는 죄가 없었다(히 4:15).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는 죄의 영향을 모두 취하셨지만 죄에 감염되지는 않으셨다. 만일 그분께서 죄에 빠졌다면 우리 구주가 되기는커녕 본인도 구원자가 필요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찬양하라. 감사하게도 그분은 죄 없이 우리의 죄를 지셨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황자연/데니 홍 선교사 부부(케냐)
선교지에서 함께 일할 선교사들을 보내 주시기를
7월 19일
여성의 권리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창조 이야기에서는 남녀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창 1:26~27).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가 창조된 것은 두 존재가 동등하고 친밀한 관계임을 뜻한다(창 2:21~24). 매슈 헨리(1662~1714)가 진술했듯 “여성은 아담의 옆구리에 있는 갈비뼈로 창조되었다. 아담 위에 군림하는 머리나 아담에게 짓밟히는 발이 아니라 옆 자락에서 동등하게 탄생한 것이다. 여성은 두 팔로 보호받고 소중한 심장 곁에서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죄악으로 남녀 관계가 뒤틀리고 말았다(창 3:16). 또 세월이 흐르면서 남성은 여성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억압했다.
1848년 7월 19~20일, 뉴욕 세니커폴스의 웨슬리언 교회에서 개최한 세니커폴스 회의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남녀는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또 참가자 300명 중 100명이 발표하고 서명한 <권리와 감성에 대한 선언>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입힌 피해와 박탈들”을 고발했고 여성들이 “법에 눈을 떠”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내고 선거에 참여하는 등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조뿐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도 남녀는 동등하다. 창조와 구원이야말로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권리이다. 남녀는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리고 똑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받는다. 바울은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경은 남녀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한다(레 18:22; 20:13). 그 선을 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더럽히는 행위이다(롬 1:24~28).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사역하면서 여인을 존중하고 도우셨다. 그분은 사회적·종교적 차별로부터 여성을 지키셨다(요 4:1~42; 8:1~11).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사회적 편견으로 바라보는 행위는 그들을 창조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효신/이은화 선교사 부부(아드라 캄보디아)
캄보디아대회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실무자들의 건강을 위해
7월 20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간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인간이 직접 우주를 탐험하기 시작했을 무렵인 1961년에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긴급한 국가적 필요에 의한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며 “미국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로 보내 지구에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하자.”라고 호소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들이 달 착륙에 성공했다.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이나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7월 24일,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에드윈 올드린이 탑승한 캡슐이 무사히 지구로 귀환해 태평양에 안착했다. 바다에서 구조된 그들은 미 항공 모함 호넷호에서 21일간 격리됐다. 혹시 모를 ‘달 세균’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그들을 만난 닉슨 대통령은 인사를 나누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세 이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세상은 전에 없이 가까워졌습니다.”
달 착륙이 모두 사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한다. 달에서 찍었다는 사진들이 항공 시뮬레이터를 통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뭐라고 주장하든 아폴로 11호의 임무를 통해 과학이 한층 발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닉슨 대통령의 표현만큼이나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던 수난 주간에 비하면 달 착륙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폴로 11호가 세 사람을 싣고 달에 간 사건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 인류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기회를 얻은 사건에는 비교할 수 없다.
아폴로 11호의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흥분과 기대를 자아냈다. 남부 브라질에서 자란 나 역시 그 순간 라디오 방송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인류를 끈끈하게” 이어 준 것은 없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호소한다(고후 5:19~20).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더 이상 결정을 망설이지 말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형우/배현경 선교사 부부(일본)
재일 한국인 선교 거점 집회소 7곳의 개척을 위해
7월 21일
신이 아닌 신들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행 19:26)
에베소는 항구 도시이자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도 에베소에 있었다. 기원전 550년경에 지었지만 기원전 356년 7월 21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나던 날 헤로스트라토스가 불을 질러 버렸다. 에베소인은 불탄 건물 대신 더 크고 멋진 사원을 짓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재정을 대겠다고 했지만 자존심 센 에베소인들은 “신이신 폐하께서 다른 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라면서 거절했다. 새로운 신전은 뜰까지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으로 둘러싸인 형태였다. 내부는 대리석 기둥 127개로 떠받쳤고 사냥, 여인, 처녀의 수호신인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의 신상을 세웠다.
3차 선교 여행에서 바울의 전도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예배에 지장을 주었다. 사도행전 19장 23~41절에서 아르테미스의 신상을 만들어 돈을 벌던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바울을 가만두면 안 된다고 동료들을 선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사업이 타격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데미스(아르테미스) 신당이 괄시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상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참으로 위험합니다”(27절, 공동). 데메드리오의 말에 흥분한 직공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도다”(34절, 바른)라고 두 시간이나 외쳤다.
에베소 세공업자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26절)는 바울의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바울은 “그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신도들을 불러 격려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행 20:1, 공동). 이 장면은 아르테미스 여신과 그를 숭배하던 에베소 세공업자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서기 268년 동고트족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된 뒤에 또 재건됐지만 결국은 바울이 이겼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시아와 유럽에 전파되면서 이 거대한 신전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과 신전은 그것을 지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굳게 뿌리박은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조성규/최지혜 선교사 부부(대만)
운영 중인 감화력센터에서 많은 영혼의 결실이 있기를
7월 22일
유혹을 이기려면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유혹은 강력하고 끈질기다. 유혹에 맞서는 대신 유혹에 빠지게 되어 변명거리를 찾는 사람이 많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극중 인물의 대사를 빌려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말했다. “나는 어떤 것도 끄떡없다. 유혹만 빼고.” 미국의 영화배우 매 웨스트 역시 “보통 나는 유혹을 피한다. 피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니라면.”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이것은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는 발언들이다.
1891년 7월 22일, 엘렌 화잇은 미시간주 하버하이츠에서 설교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나 유혹이 따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의 길로 인도하며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시도합니다. 사탄은 결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사건, 133). 그보다 앞서 1858년에는 “유혹하고 속이는 사탄의 힘은 사도 시대보다 열 배는 강해졌다.”(초기, 41)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약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목회자이자 저술가인 랜디 알콘이 현명하게 지적했듯 “유혹은 맞서는 것보다 피하는 게 훨씬 쉽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아담과 하와가 떨어져 있어야 했듯 우리도 죄악에 빠질 상황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노리고 있으며 그중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또 우리는 사탄에게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그분을 힘입을 때만 악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시험이 닥칠 때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모범 답안이 되신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히 4:15,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기도로 시험에 맞섰고(마 26:36~46) 하나님의 말씀에 조건 없이 충성했고(마 4:1~11) 믿음의 노래를 부르셨다. 우리도 이 전략을 따라야 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그분이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엡 6:16)을 막아 주신다. “또한 피할 길을 내사…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 해 주신다. 유혹을 물리칠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는다. 주 안에서 굳세어지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최봉길/최경미 선교사 부부(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예멘인들을 만나고 접촉할 기회를 주시도록
7월 23일
진짜 재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시작부터 재림교회는 급격히 신자 수가 늘었고 지리적으로 널리 확장됐다. 1857년 7월 23일 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지에 ‘사업’이라는 제목으로 제임스 화잇이 소개한 기사에 따르면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자가 1847년에는 “1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850년에 그 수는 두 배로 늘었고 1852년에는 2년 전보다 열 배나 증가했다. 1863년에는 3,500명이 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재림교인은 2,000만 명이 넘는다.
재림교회는 견실한 조직과 한결같은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제대로 따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예수님의 천국 비유(마 13장)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 모두가 진정으로 회심하고 끝까지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1867년에 엘렌 화잇은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 녹명책에는 이름이 등록됐지만 생명책에는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청년 20명 중 체험적인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1증언, 504). 1890년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교회를 향하여 엄숙하게 말씀드립니다. 교회 녹명책에 이름이 적힌 20명 중 단 한 명도 이 땅의 삶을 마무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일반적인 죄인들처럼 진정 하나님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Christian Service, 40).
이 진술을 자신의 교회에서 몇 명이나 하늘에 갈 수 있을지 계산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구분하는 일은 하늘 천사들의 몫이며 우리가 주제넘게 끼어들면 안 된다(마 13:27~30; 47~50). 이 진술은 각자 자신의 삶을 점검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를 극복하라는 엄중한 경고로 주어진 것이다(계 3:14~22).
오늘날 우리에게 더 필요한 사람은 남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자 하려는 사람이다. 참된 재림교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다. 그대와 나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남웅/심은정 선교사 부부(대만)
신좡행복 국제교회 성도들의 열정적인 참여를 통해 영혼 구원의 길이 열리기를
7월 24일
마지막 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우리 삶에 끼어들어 감정을 뒤집어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은 가 버려도 감정은 가 버리지 않는다.” “베풀어 준 만큼 받을 거라고 믿었던 게 최대의 실수였다.”라고 고백한 이도 있다.
애니 R. 스미스(1828~55)는 아주 멋지고 재주가 뛰어난 아가씨였다. 1851년 애니는 <작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라는 제목의 시를 제임스 화잇에게 보냈다. 제임스는 그 시가 몹시 마음에 들어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에 소개했을 뿐 아니라 교열자로 일하도록 애니를 뉴욕주 로체스터로 초빙했다. 그곳에서 애니는 젊은 목사 J. N. 앤드루스와 사랑에 빠졌다. 앤드루스도 분명 그녀를 좋아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1855년 폐결핵에 걸린 애니는 뉴햄프셔주 웨스트 윌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애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졌다.
1855년 7월 24일 화요일 아침에 애니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시를 남겼다.
이런, 잠들려 하는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여러분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 우는지도 몰라요.
왜 슬퍼하시나요? 삶의 짐과 고민을 내려놓고
피곤하여 무덤에서 편히 쉬는데.
이틀 뒤 애니는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1855년 8월 26일 엘렌 화잇은 J. N. 앤드루스에게 편지했다. “당신은 이제 앤절린과 결혼하는 게 최선일 듯싶네요. …애니는 상심이 커서 끝내 숨을 거뒀답니다. 당신은 애니에게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했습니다.” 애니의 삶이 끝나 갈 무렵 앤드루스는 애니에게 관심을 잃었지만 애니는 여전히 앤드루스를 좋아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남의 감정으로 장난치지 말라.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쓰라린 마음과 신체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애니는 끝까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냈음을 그녀의 마지막 시에서 알 수 있다. 또 이전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 애니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영광의 그날을 고대했다. 이 복된 소망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북한선교부
NKPMM 목회자 선교사들이 열정과 헌신으로 북한 선교를 위해 준비되도록
7월 25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세상에는 수많은 영웅과 배우와 모델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며 우리의 눈길을 쉽게 사로잡고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웅으로 삼고 그분의 길을 따라야 마땅하다. 엘렌 화잇이 말했듯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전한 사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화잇주석, 골 1:15).
14세기 네덜란드의 헤라르트 흐로테가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가톨릭 사제 모임을 시작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헌신했고, 자선 활동을 벌이고, 신앙적이고 영감적인 작품들을 옮겨 적었다. 1380년경 독일에서 태어나 1471년 7월 25일 네덜란드에서 사망한 토마스 아 켐피스도 공동생활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실천적인 신앙과 참된 경건을 장려한다.
켐피스는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이 겸손하지 못하여 삼위일체를 불쾌하게 한다면 삼위일체에 대해 학구적으로 이야기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거룩하고 정의롭게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고결한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정의에 대해 배우기보다 차라리 뉘우치는 마음을 지니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지 않는다면 성경 전체를 암기하고 철학자들의 모든 원리를 통달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 섬기는 일 외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 “꾸준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그렇게 하십시오. 아침에 결심하고, 저녁이 되면 오늘 여러분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 점검하십시오.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여러분은 어쩌면 하나님과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켐피스는 죄 없는 완전이라는 주제넘은 이론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이 세상에서 완전이란 하나같이 불완전이 어느 정도 섞여 있으며 우리의 배움에 그늘이 전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실천적인 종교와 참된 경건은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본받을 때 생긴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마 10:25, 공동)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매일 그분을 본받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기노혁/윤재나 선교사 부부(튀르키예)
이란인 선교 훈련을 위한 세미나 예산이 마련되도록
7월 26일
우리의 소망 불타오르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희망에 찬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진심으로 전하고 노래했다. 그 뚜렷한 사례가 바로 1962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총회 총회이다. 총회의 주제는 ‘우리의 소망 불타오르네’였다. <예언의 소리> 라디오 방송의 남성사중창단인 킹스 헤럴드의 멤버였던 웨인 H. 후퍼(1920~2007)는 대총회 총회의 주제곡을 지어 달라고 부탁받았다. 여러 번의 기도 끝에 총회 주제와 같은 제목으로 가사와 곡을 완성했다. 196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 대총회 총회가 시작됐고 총회 대표들은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소망 불타오르네. 재림은 우리의 소망.’
재림교인들의 애창곡인 이 노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총회 총회 주제가로 선정됐고(1966, 1975, 1995, 2000년 총회 및 2015년 총회 일부)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1995년,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라는 주제로 대총회 총회가 시작하기 전에 후퍼는 2절 가사도 써 달라고 부탁받았고 곧 2절이 추가됐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노래의 메시지와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1962년에 비해 지금은 재림이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엘렌 화잇은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마지막 날이 더욱 가까워진다. 그만큼 하나님께도 가까워지고 있는가?”(9증언, 27)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양희원/현아름 선교사 부부(대만)
차오양과기대 한글 동아리와 캠퍼스 선교를 통해 얻은 구도자들을 위해
7월 27일
선교 열정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
열대병과 독사들이 득실거리고 호의적이지도 않은 먼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다면 어떨까? 가족, 친척, 친구를 뒤로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면?
레오와 제시 핼러웰 부부는 브라질에서 그렇게 38년 동안 주님을 섬기며 시간의 대부분을 아마존 지역에서 보냈다. 의료 봉사와 선교 활동을 위한 선박 루제이로호(‘빛의 전달자’라는 뜻)를 타고 내외는 거대한 아마존강을 따라 벨렘과 마나우스를 오갔다. 이들의 도움으로 브라질인, 인도인 25만 명이 열대병을 비롯한 질환을 치료받았고 강가에 고립된 마을들에 재림 기별이 전파됐다.
영감적인 책 『아마존에 찾아간 빛의 전달자』에서 레오 핼러웰은 “아마존 지역에서 일하도록 건강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권이었다. 남은 삶을 다해 북브라질연합회의 사업을 마무리하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빈곤한 이들에게 무아의 봉사를 베풀며 빛나는 유산을 남긴 이들 부부는 1958년에 은퇴해 미국으로 귀국했다.
1959년 7월 27일, 부부는 남십자 국가 훈장을 받았다. 브라질에 큰 공헌을 남긴 외국인에게 정부에서 수여하는 가장 큰 상이다. 축사에서 정부 대변인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바로 핼러웰 부부라며 “남다른 사람들”로 이들을 묘사했다. 레오 핼러웰은 “40년 전 브라질에 처음 왔을 때 브라질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정중하고 애정 어린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 지금 우리는 미국에 있지만 마음만큼은 브라질에 있다. 가장 좋은 친구는 브라질 북부 아마존강 유역에 사는 이들이다.”라고 답했다.
핼러웰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재림교인 선교사가 열정을 다해 선교지에서 일했고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여러분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해외에 있든 가정에 있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기원/이용숙 선교사 부부(대만)
지역 주민들이 선교 프로그램으로 성경 공부와 침례를 결심하도록
7월 28일
영원히 남아 있다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옳은 말이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4:13, 공동)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바닥에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라고 새겨진 동판이 있다. 바흐가 묻혀 있는 곳이다. 적혀 있는 이름만으로도 위대한 작곡가와 그의 유산을 추억하기에 충분하다.
7월 28일에는 유명 바로크 음악가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거장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로 1741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별세했다. 그는 유명한 작품 <사계>를 포함해 협주곡 약 500편을 남겼다. 또 다른 사람은 독일의 작곡가이자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이며 1750년 7월 28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숨을 거뒀다. 전문가에 따르면 바흐의 곡은 1,128편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됐다. 이 두 사람이 남긴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 보라. 두 사람은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들만큼 유명해지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제대로 모른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별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과 악의 무거운 결과는 모두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말과 행동은 세상만사의 사슬을 잇는 연결 고리이다”(3증언, 542). 하나님은 “선악 간에 끼치는 영향력”은 물론 “그로 말미암은 결과”까지 모두 살피신다.
성 토마스 교회에서 본 것처럼 여러분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면 사람들은 그 이름을 보고 무엇을 떠올릴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이든 우리는 주변에 구원의 감화를 끼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영원한 왕국에 이르기를 바란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병섭/이세주 선교사 부부(대만)
타이동 교회의 교우들 및 교우들의 사업을 위해
7월 29일
결혼 서약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기억에 남는 멋진 결혼식이 있는가? 그 결혼식은 무엇이 남달랐나? 결혼식장에서는 멋진 장식, 잘 차려입은 사람들, 감동적인 순간 등이 이목을 끈다. 그러나 드레스를 입은 신부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결혼식이 성대할수록 부부의 삶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1981년 7월 29일,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하객 3,500명이 참석했고 7억 5,000만 명이 TV로 지켜보았다. 신부의 약혼반지는 12캐럿짜리 타원형의 푸른색 실론 사파이어 주변으로 다이아몬드 14개가 박혀 있는 18캐럿짜리 백금 반지였다. 웨딩드레스 역시 화제를 모았다. 찰스 왕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의 결혼식은 완벽했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듯이 보였다. 그들은 귀여운 두 아들을 낳았고 다이애나는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2년에 내외는 별거를 시작했고 1996년에 끝내 이혼하고 말았다.
부부의 대다수가 사랑과 존경을 다짐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평생 서로를 소중히 여기겠다고 약속한다.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등의 표현을 떠올려 보라. 나오미를 향한 룻의 맹세를 결혼 서약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진심을 담아 약속하고도 쉽게 마음을 바꾸고 맹세를 저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을 자기 만족의 도구로만 여기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떤 교회에서는 기혼 부부가 헌신을 재다짐하는 의미에서 결혼식을 다시 거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흔치 않은 이런 예식을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다. 부부는 정기적으로 집에서 서로에게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서로에게 헌신을 재다짐하는 간단한 예식을 기획해 보라.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배진성/정해옥 선교사 부부(인도)
자히라바드 게이트 삼육학교와 봉사자 샘 선교사의 가정을 위해
7월 30일
우정의 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친구가 있으면 세상 살맛이 난다. 유명 강사이자 저술가인 스티브 마라볼리는 “친구란 상처 입은 마음의 치료제이며 영혼에 희망을 주는 비타민”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격언에 따르면 “친구란 행복할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 사랑을 드러낸다.” 모두가 떠나가도 곁에 남는 게 친구라는 말이다.
2011년, 유엔 총회에서는 7월 30일을 국제 우정의 날로 선포했다. “사람, 국가, 문화, 개인 간의 우정은 평화를 위한 노력을 증진하고 공동체 간에 다리를 놓아 준다.”는 생각에 기초한 결정이다. 우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미니스트리』 1977년 12월 호에서는 ‘연결망을 사용하라’는 제목으로 머리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 당시 캘리포니아 허먼 재림교회 담임목사였던 클라크 B. 매컬은 ‘친절 통화’라는 자신의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상냥하고 동정적인 마음을 품으면 지금 한 사람밖에 없는 곳에서 1백 명이 회심할 것”(9증언, 189)이라는 엘렌 화잇의 진술에서 착안한 프로그램이다.
매컬은 교인들에게 매주 전화하기, 아기 돌봐 주기, 차량 제공, 가사 도우미, 방문 등의 친절 봉사를 자발적으로 실행하라고 요청했다. 이런 활동으로 편견의 벽이 점차 허물어졌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자신이 사역하던 한 교회에서는 이 방식으로 전년도에 비해 월등히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결실을 얻고 싶으면 친해지고 친절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갈망하면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셨고 신임을 얻으셨다. 그런 다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치료, 143). 우정 전도 방식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보자. 이 유쾌하고 효과적인 전략으로 전도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PCM(캠퍼스 선교사 운동)
올해 파송된 5기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7월 31일
미지의 땅으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가정이란 삶이 시작하고 사랑이 끊이지 않는 사회 단위이다. 또한 부모와 자녀가 가장 소중한 순간을 늘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죄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이상은 훼손됐고 건실한 가정도 이별의 고통을 겪는다. 성장한 아이들은 집을 떠나 학업을 계속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린다. 부모들은 빈 둥지 증후군에 빠지고 아이들은 날아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 이런 인용구가 적힌 액자를 보았다. ‘자녀란 당신의 인생에 활짝 피었다가 어른의 세계로 사라지는 꽃과 같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부모가 귀여운 아기를 그리워하듯 나이 먹은 아이들도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때 중압감과 슬픔을 느낀다.
루스 E. 밴 레컨은 1945년 7월 31일 미국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에서 13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부모는 선교사였고 레컨은 6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기숙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자신의 감동적인 책 『결코 보내지 않았던 편지』(1988)에서 루스는 모든 곳에 소속되었으면서도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자신의 느낌을 적어 놓은 편지들을 소개했다. 1951년에 기록한 첫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저 너무 힘들어요. 제 속의 무언가가 저를 강하게 짓눌러서 숨을 쉬지 못하겠어요. 비행기를 타고 기숙 학교에 가면 재미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아직 모르겠네요. 비행기 안에서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어요. 제가 구름을 좋아해서라고 아이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오늘 오후 학교에 갔을 때도 계속 울었고 그칠 수가 없었답니다.”
새는 언제까지 둥지에만 머물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날아야 할 때가 온다. 그러나 그때가 오더라도 자신의 태어난 곳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이미 부모와 떨어져 지내거나 곧 집을 떠나게 된다면 여러분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이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내라. 가족의 결속은 신성하다. 그렇기 때문에 꿋꿋하게 지켜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성용/장유진 선교사 부부(인도네시아)
동인도네시아 1000명선교사 훈련원 40기 선교사 모집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