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길을 걷던 신라의 청년 서당은 서른 두 살 되던 해(648년)에 황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그로서는 목숨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달랐다. 그래서 사냥도 전쟁도 생리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불교에 심취하여 뒤늦게 머리를 깎은 뒤 이름도 원효로 바꾸게 된다. 원효는 더 많은 것을 배우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 ‘해골 속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그 길로 불경에 대한 연구를 하여 [화엄경소], 부처의 말씀을 담은 중국 책 [금강삼매경]을 쓰는 일도 한다. 이런 원효에 대한 소문이 무열왕의 귀에도 들어간다. 무열왕은 원효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본 뒤 그의 높은 인품과 실력에 감복해 원효를 자주 불렀다. 요석공주는 원효를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보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사모의 정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저분은 스님이시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출가하신 저분을 내가 사모하면 안 되지.’
그러나 아무리 다짐해도 승려가 아니라 남자로 생각되며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 요석공주는 용기를 내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복을 선물했다. 원효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는 고민 끝에 아버지 무열왕에게 아뢰었다.
“아바마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제 눈에는 나무밖에 보이지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원효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주에 아름다운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지만 자신은 승려였고 상대방은 공주였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 분명했다. 원효는 답답한 마음에 노래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난 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내려네.”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노래의 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대사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니 혼인을 시키도록 해야겠군.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는 계획을 은밀히 지령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를 맞닥뜨렸다. 원효는 이미 신하가 자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발을 헛디딘 체하며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졌다. 허우적거리는 원효를 건져낸 신하는 가마에 태워 곧장 대궐이 아닌 요석궁으로 달려갔다.
원효에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며칠이었지만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와 공주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난 것은 655년에서 660년 사이,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임금이 허락한 일이니 승려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크게 욕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원효는 부처님 앞에 다시 서기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한밤중에 요석궁을 몰래 빠져나온 원효는 그 이후 참회의 뜻으로 승복을 벗고 일반 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꿔 입었다. 이름도 소성거사로 바꾸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부랑자 집단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전국을 떠돌며 동냥을 하였다. 각설이 타령 비슷한 <무애가>를 만들어 불렀다. 그가 바가지를 들고 추는 춤은 <무애무>라는 전통춤이 되었다. 그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스님들이 경전을 위주로 불교의 진리를 연구하는 종파인 교종을 전파해 귀족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반해 원효는 거지들이나 노인네들, 시장 상인들, 철없는 아이들. 마을의 부녀자들을 노래와 춤으로 불러 모은 뒤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불교를 전하였다. 원효가 퍼뜨린 법성종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며 염불을 정성으로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민중불교로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인 가운데 열 명 중 팔구 명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https://m.youtube.com/watch?v=PZ-g4CW_d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