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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석(羅重錫) 연보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 향년 93세)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부사공파 24대손
수원 출신 나주인(羅州人) 자선사업가•민족계몽운동가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대 종손
함경도관찰사(함경북도관찰부주사 설)•삼일학원 설립자•정6품 참복완궤차비관•정릉비각 및 표석영건 감동관•정3품 통정대부 역임.
수원부 국채보상회 재무원•기호흥학회 수원군지회 평의원•대지주(10만여 평 토지 소유)•수원소작인상조회 고문 역임.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 부호 가문 출신
조선 후기 이후 수원 지역 명문 대지주
대한민국의 민족운동가
―자강운동, 국채보상운동, 농지 개혁, 자족주의 참가
대한제국 자강운동의 주체
―기호흥학회와 수원 국채보상운동 주도
근대 교육운동가
―삼일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최초의 무상 토지 분배자
―대한민국 농지 개혁의 선구자
『토지무상분배록』(土地無償分配錄)의 저자(1946년)
근대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유지
우리나라 최초의 자선사업가
―이남 최초의 무상 토지 분배, 공유 경작지 제공, 소작인 조세 대납, 빈민 양식 제공, 지역 교육 사업 등 수많은 자선사업
―우리나라 자선사업의 선구자
―1947년 대토지 무상 분배의 공덕으로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 마을 입구에 「나중석송덕비」 건립
―송덕비에 “자선”(慈善)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일제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한 양심적 지식인
민족 계몽 운동과 사회 구제 운동의 지도자
삼일학원 설립자
나중석의 가문 나주 나 씨 부사공파는 수원의 대표적인 성 씨로서 전통적으로 “나 참판 댁,” “나 부잣집”이라고 불림.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17세기 나주 나 씨 11대손 부사공이 수원부사로 부임해서 수원에 정착하면서 수원 나주 나 씨 부사공파 명문 부호 가문이 시작되었고, 19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수원에 정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호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으며, 나경석과 나혜석 오누이의 조부 나영완도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수원 부사공파 가문은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이라고 불렸다. 『나주나씨세승』에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빈손으로 집안을 일으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기록
여류 독립운동가•여류 서양화가•소설가 정월 나혜석(羅蕙錫, 1896년 생~1948년 몰)의 사촌 오빠
독립운동가•언론인•사업가(농업 및 공업)•교육자•정치인 나경석의 사촌 형제
증조부 증 호조참판 나○○
조부 훈련원봉사•훈련원참군•종2품 호조참판 나영완(羅英完, 1825년 조선 순조(純祖) 25년 8월 13일 생~1890년 조선 고종(高宗) 27년 4월 1일 몰; 향년 66세)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2대손, 자 영서(永瑞)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묘역.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台安面) 구봉산(九峯山)
조모 연안 차 씨(1832년 생~1907년 몰)
조부 나영완의 자녀 3남 2녀
―나주 나 씨 수원파 중흥 세력 형성
처 연안 차(車) 씨
1남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
―나중석 선생의 부친
―자 선필(善弼), 호 성재(省齋)
―처 철원 송 씨(1848년 생~1929년 몰; 1남(나중석) 3녀)
―부친 나영완에게 호조참판 증직
2남 나기형(羅基亨, 1857년 생~1884년 몰)
―자 덕준(德俊), 호 연농(硯農)
―아들이 없어 동생 나기정의 장남 나홍석을 양자로 입적
3남 수원면장•경기도관찰부주사•환소도감위원•친일파 시흥군수•용인군수 용인공 나기정(羅基貞, 1863년 생~1915년 몰)
―나경석•나혜석의 부친
―자 덕유(德裕), 호 우산(愚山)
―집터.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일대
―묘역.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선영(묘역 아래에 나주 나 씨 납골당 소재)
―5남매의 아버지로서, 이복 딸 나계석을 제외하고, 두 딸 나혜석과 나지석에게 집안에서 한학 교육을 시켰으며, 나혜석에게 삼일학교와 진명여고보 그리고 일본 유학까지 신여성 교육을 시킴.
1녀 전하준(全河駿)의 처
2녀 이규성(李楏成)의 처
부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 향년 57세)
모 철원(鐵原) 송 씨
숙부 나기형(羅基亨)
숙부 수원면장•경기도관찰부주사•환소도감위원•친일파 시흥군수•용인군수 나기정(羅基貞)
부 나기원의 자녀 1남 3녀
처 철원 송(宋) 씨
1남 본인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대 종손 외아들 정3품 통정대부•함경도관찰사•대지주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 수원 출신 나 씨 부호)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의 아들
―자 성규(聖奎), 호 이당(耳音堂)•매조(梅祖)
1녀 지성원(池性源)의 처
2녀 남양 홍 씨 홍사우(洪思友)의 처
3녀 김해 김 씨 김석환(金晳煥)의 처
숙부 나기정의 자녀 2남 3녀
1남 나홍석(羅弘錫, 자 나도은(羅燾殷))
―숙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입적
―1909년 일본 도쿄 와세다대 정치과 졸업, 1918년 수원금융조합 서기, 1920년 수원면협의원, 1923년 경성편리사이사, 조선 수원청년구락부 회장, 대화교 간부 역임.
―집터. 수원면 남창리 55번지 소재
1녀 (서녀) 나계석(羅稽錫, 1883년 생~1939년 몰)
―13세에 수원의 영향력 있는 가문 수원 최 씨 최기환(崔基煥, 1884년 생~1948년 몰)과 조혼해서 나계석이 서녀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2남 독립운동가 나경석(羅景錫, 1890년 9월 27일 생~1959년 12월 31일 몰; 자 나도헌(羅燾憲),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과대 유학생)
2녀 여류 독립운동가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생~1948년 12월 10일 몰; 5남매의 넷째 자녀, 딸 중의 둘째 딸,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 여류 서양화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 여류 독립운동가(2•8선언, 3•1운동, 그 밖의 독립운동 주도 및 참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단편 소설가
―묘역.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부근
3녀 나지석(羅芝錫, 나기정의 막내 딸, 일본 음악학교 유학, 언니 나혜석보다 먼저 평안도 곽산 부호 김창곤과 결혼)
나중석의 자녀 2남 1녀
처 충주 지(池) 씨
1남 나갑균(羅甲均, 1903년 생~1969년 몰)
2남 나재균(羅載均, 정균(正均), 1909년 생~1974년 몰)
1녀 나여균(羅姒均, 박만희(朴萬熙)의 처)
나중석의 손주
나중석의 손자 나종설(羅鍾卨, 1925년 생~2013년 몰)
―조상의 유업으로 화려한 집, 기름진 논밭과 의복과 음식을 갖췄다고 회고
사촌 형제 독립운동가 나경석의 자녀 1남 3녀
1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나영균(羅英均, 1929년1월1일 생~)
―만주 출생, 경기여고 졸업, 경성여자전문대학(이화여대 전신) 수학,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전입학, 1948년 이화여대 학사 학위(4년 과정), 이화여대대학원 영문학 박사
―1950년 8월 1일 이화여대 4학년 당시 대학교수•화학공학자 전민제와 결혼, 자녀 1남 3녀
―김종필•김용권과 교유, 영국 소설 전공, 번역문학가•서예가, 호 여정(如庭), 1994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 영문학자
2녀 서울대 미대 교수•여류 서양화가 나희균(1932년 생~)
―화가 안상철(1927년 생~1993년 몰)과 결혼, 아들 건축가 안우성(1966년 생~)
―만주 봉천 출생, 경기여고 미술반(미술 교사 최덕휴),서울대 미대 진학, 동기생 화가 안상철과 교유, 제2회 국선 입선, 중앙여고 미술 교사, 파리 유학, 파리 개인전, 귀국 개인전, 화가 안상철과 결혼, 안상철 사망,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남 나상균(1934년 생~; 서울 종로구 부암동 거주, 나혜석의 프랑스 파리 근교 마을 풍경화 소장)
3녀 나정균
사촌 조카 나사균(羅姒均, 1914년 생~)
사촌 형제 나홍석의 손녀 여류 영화배우 겸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
사촌 조카사위 전민제(딸 나영균의 부군)
사촌 여동생 나혜석의 자녀 3남 1녀
1녀 개성 모 여학교 교사 김나열(金羅悅, 1921년 4월29일 생~)
1남 김선(金宣, 1924년 생~사망 연도 미상, 요절)
2남 서울대 법학과 교수•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법학과 교수•미국 웨스턴주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김진(金辰, 1926년12월19일 생~)
3남 한국은행 총재 김건(金建, 1929년 6월 20일 생~2015년 4월 17일 몰)
1878년 1세 경기도 수원군에서 수원 나 씨 대부호 중추부사 나기원과 철원 송 씨 사이에서 맏아들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대 종손으로 출생
1901년 24세 6월 함경도관찰사(함경북도관찰부주사 설) 관료 서임
1902년 25세 광무 6년 5월 7일 종로교회 매일학교(Day School, 현 주일학교) 개교. 삼일학교 설립자 관료 출신 나중석, 차유순(車裕舜), 이성의 그리고 수원의 초기 기독교인 이하영(李夏榮), 임면수(林冕洙), 김제구(金濟九) 등 수원의 청년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삼일학교 설립. 교장 이하영이 삼일학당(三一學堂)이라고 개칭. 나중석 선생이 사립 삼일여학당(1909년 삼일여학교로 개명, 현 매향중학교)을 설립(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 내 소재). 대한제국 시대 숙부 나기정 경기도관찰부주사 판임관 6등(재판주사)
1904년 27세 11월 29일 태자 순종비 민 씨 장례 담당 참복완궤차비관 임명. 나중석과 숙부 나기정이 6품 승직
1906년 29세 1월 정릉비각 및 표석영건 감동관으로 정3품 통정대부 승직. 5월 삼일학교가 재정적 위기에 처하자, 나중석이 학교 운동장 부지로 매향동 부지 900여 평을 후원했고, 고종의 내관•지사 강석호가 8만 냥 상당의 기금을 후원했다. 나중석을 비롯한 수원 유지들의 기금 모금으로 수원 유지 70여 명에게서 1,014환 모금(지사 강석호 440환, 수원관찰사 최석민 100환, 주사 최익환 80환, 나중석 70환 등)
1907년 30세 3월 수원 국채보상운동 모금 시작. 수원부 국채보상회 재무원
―나중석이 수원 국채보상운동 주도. 경기관찰부주사 나기정과 경기관찰사서리 김한목이 국채보상금 모금 사무소 설립하고, 이후 김제구, 이하영, 임면수 등으로 민간 모금 사업으로 이양
1908년 31세 기호흥학회 수원군지회 평의원
1909년 32세 4월 23일 삼일학교 설립 인가
1910년 33세 일제 강점. 4월 자 나성규를 나중석으로 개명
1910년대 33세 이후 (주)수원전기와 팔달은행 설립 참가
―팔달은행 설립 무산
1912년 35세 소유 토지 9만 7천 391평(논 7만 4천 평 포함)
1915년 38세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 낙향. 수원 성안 남창리에서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로 이거
―소극적 일제 저항 운동. 종중 사업과 저술 활동 및 후손 교육 사업
―(주)수원전기와 팔달은행 설립 대주주로 참여
1917년 40세 수원군청에서 독행자(篤行者) 표창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선행과 자선 사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
1919년 42세 소작인 도조 삭감
1922년 45세 종제 나홍석 주도 수원소작인상조회 고문
1923년 46세 삼일학교 매향동 이전
―나중석이 운동장 부지 후원
―나중석, 교장 이하영, 교사 임면수가 주요 삼일학교 설립자
1927년 50세 봉담면 빈민들의 세금 30원 대납
1928년 51세 가뭄으로 봉담면 분천리 대지주 나중석과 그 외의 수원 지주들이 빈민들에게 쌀 양식 구호
1929년 52세 봉담면 빈민들 호세와 부가금 44원 60전 대납
1945년 68세 8월 15일 8•15해방.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여 미군정 실시
1946년 69세 북한 토지 개혁 실시. 3월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 일대 전답 26정보 7만 8천 평을 분천리 소작인 61호에 인구 비례로 분배하고, 토지 7,100평을 공유 경작지로 마을에 제공하는 토지 개혁 단행
―전체 소유 전답 30정보 가운데 자작 토지 4정보 1만 2천 900평을 제외한 전답 26정보 7만 8천 평과 집터 52곳 1만 4 천 50평을 무상 분배하고, 마을 공동 경작지로 전답 7천 100평을 제공하여, 총 9만 9천 150평의 토지를 무상분배했다.
―실제는 10만 3천 평의 전답과 집터 및 공동 경작지가 무상으로 분배되었으며, 남한 최초의 무상 토지 분배 사례였다.
―가작(家作)으로 4정보를 제외한 소유 토지 전체 무상 분배
―1912년 나중석의 소유 토지 9만 7천 391평(논 7만 4천 평 포함)을 기준으로, 1946년 당시 수원 대지주 나중석의 소유 토지는 109,391평 이상으로 증가해 있었다.
―나중석 저 『토지무상분배록』(土地無償分配錄) 서문에서 지주의 권세가 심하고 소작인은 농노처럼 가련해서,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할 경우에 20%만이 유상 구입 능력이 있는 소작인들이며, 나머지 80%는 유상으로 토지를 구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대다수 토지는 외부인들에게 팔리고,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외지로 떠나야 할 처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나중석은 일제에서 해방되었다는 국가의 독립 자체를 중시했으며, 따라서 소작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외지로 쫓겨나지 않도록 거대한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했다. 또한 나중석의 토지 개혁은 토지 개념을 경자유전(耕者有田), 곧 “농사짓는 자에게 토지가 있다.”는 개혁 사상을 토대로 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나중석의 무상 토지 분배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수원과 남한 지역 최초의 무상 분배 사례였다.
11월 『경향신문』에 나중석의 토지 무상 분배가 처음 보도됨.
1947년 70세 3월 봉담면 분천리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나중석송덕비」 건립
송덕비 앞면 중앙 “이당 나공 중석 자선송덕비”(耳音堂羅公重錫慈善頌德碑)
송덕비 앞면 좌우 측 사언 율시 한시
維公慈惠
活佛眞諦
替當租稅
割讓田契
見危必濟
扶困無滯
澤存斯世
德流後裔 <끝>
오직 공의 자비와 혜택으로,
살아 있는 부처의 참된 깨달음이라
조세를 대납해 주고,
밭문서를 할양하니
위험을 보면 반드시 구제하고,
곤경에서 돕는 데 지체함이 없어
당대의 윤택함으로 존재하고,
덕이 후손들에게 흐르리라 <끝>
송덕비 뒷면 “단기 4280년 3월 ○일 분천리 유지 일동 수립”(檀紀 四二八十年 三月 日 汾川里 有志一同 竪)
남한의 토지 개혁에 대해서 무상몰수-무상분배, 유상매수-무상분배, 유상매수-유상분배 등의 안과 소작제 폐지 논의
1948년 71세 3월 11일 미군정 과도정부법령 공포 및 신한공사 관리 일본인 소유 귀속농지에 대해 농지 개혁 단행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
―농가 호당 논밭 2ha 상한
―농지 가격은 연간 생산량의 3배에 해당하며, 연간 생산량의 20%씩 15년간 상환 조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헌법 제86조에 의거 토지 개혁이 논의되었고, 농지개혁법의 발효와 함께 악덕 지주들의 농단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1949년 72세 2월 중앙 언론에 나중석의 토지 무상 분배 크게 보도
1950년 73세 4월 농지 개혁 실시. 6•25전쟁 발발 직전 일부 농지 개혁 실행. 6월 25일 새벽 4시 한국전 발발
1954년 77세 갑오년 여름 나중석이 『나주나씨세승』(羅州羅氏世乘) 필사본 완성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빈손으로 집안을 일으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公家貧親赤手成家稱富名)라고 기록
―『나주나씨세승』에서 나중석은 나도범(羅燾範), 나홍석은 나도은(羅燾殷), 나경석은 나도헌(羅燾憲)으로 입적
―『나주나씨세승』에서 이름 나도범(羅燾範), 초명 나중석(羅重錫), 자 성규(聖奎), 호 이당(耳堂, 耳音堂)•일몽(一夢)•매조(梅祖)
1959년 82세 12월31일 사촌 형제 독립운동가 공민 나경석 선생이 서울 종로 신교동 자택에서 서거(향년 70세)
1970년 93세 통정대부 이당 나중석 선생 서거. 향년 93세
묘역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 봉담면 분천리 일대
사당
나주(羅州) 나(羅) 씨 부사공파(府使公派) 종중(宗中) 사당(祠堂)
―소재지.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141-1번지
저서
『토지무상분배록』(土地無償分配錄, 1946년)
『나주나씨세승』(羅州羅氏世乘) 필사본(1954년)
송덕비
「나중석송덕비」(1947년)
―토지 무상 분배에 대한 보답으로 1947년 3월 수원시 봉담면 분천리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나중석송덕비」 건립
송덕비 비문-앞면 중앙
“이당 나공 중석 자선송덕비”(耳音堂羅公重錫慈善頌德碑)
2012년 구 송덕비 수원박물관 이전 및 신 송덕비 건립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마을 입구 소재 「나중석송덕비」가 오래되었고 주변에 도로 공사로 인해 구 송덕비가 수원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으며, 신 송덕비가 새롭게 건립되었다.
* 민족운동가 나중석 선생: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면, 남북한 분단 시대에는 민족운동과 민족운동가가 있게 마련이다.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헌신하는 민족운동은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당 나중석 선생은 민족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던 민족운동가로 자리매김된다. 나중석 선생은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대 종손으로 태어났음에도, 수원의 지역 유지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많은 활동들을 했다. 우선, 나중석 선생은 조선 시대 후기 관료 출신으로, 정3품 통정대부에 이르기까지 함경도관찰사(함경도관찰부주사 설), 정6품 참복완궤차비관, 감동관 등을 역임했다. 관료로 서임되었지만, 수원 나 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한양에 행사가 있을 때 임시직으로 관료 직책을 수행했다.
나중석 선생은 당시 수원의 유지 지사 강석호를 강하게 설득해서 그의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삼일학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삼일학원의 설립자이다. 또한 자신의 토지 900여 평을 기증해서 학교 운동장으로 제공했고, 현재 그 부지는 삼일학원의 삼일중학교 운동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현재 삼일학원 산하에는 수원시 소재 삼일공고, 삼일상고가 있고, 화성시에는 협성대학교가 있다. 나중석 선생은 민족계몽운동을 교육 사업으로 펼친 민족운동가였다.
수원 대부호 나중석 선생은 자선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고향 마을에는 「나중석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그는 수원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10만여 평의 대토지를 소유한 수원의 대부호였지만, 소작인들에게 저렴한 소작료를 받거나 소작료를 감해주었고, 세금을 대납해 주기도 했으며, 소작인들이 어려울 때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소작인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시행한 남한 최초의 무상 토지 분배는 대한민국 정부의 농지 개혁에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토지 분배는 전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지만, 그는 경자유전이라는 농지 소유의 원칙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저서 『토지무상분배록』과 당시 여러 신문의 인터뷰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당의 선례는 북한의 토지 개혁에 이어지는 남한의 농지 개혁의 모범이 되었고, 특히 6•25전쟁 발발 당시 쟁점이 되었던 이슈였다. 나중석 선생의 무상 토지 분배라는 혁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이라는 역사 전쟁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아쉬운 사례로 남는다.
그 외에도 나중석 선생은 수원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으며, 초기에는 숙부 군수 나기정이 국채보상금 모금 사무실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기호흥학회에서 활동을 했으며, 수원전기와 팔달은행의 설립에도 참여했다.
1915년 분천 낙향 이후에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일제 시대를 나며, 종중 사업과 저술 및 후손 교육에 전념했다.
나중석 선생은 10만여 평의 대토지를 소유한 수원의 나 씨 대부호였지만, 조선 말기를 거쳐 일제 강점을 겪고 1945년 8•15해방을 맞으면서, 민족의 해방을 기념해서 기꺼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했으며, 그것은 당시 북한의 토지 개혁 및 남한의 농지 개혁과 개혁의 노선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당 나중석 선생은 관료 출신이자 수원의 유지로서, 민족계몽사업으로 삼일학원 설립 등의 교육 사업과 후손 교육 및 지역민 교육 사업을 했다. 또한 자강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민족 사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빈민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인 자선가였으며, 남한 최초로 토지를 무상 분배해서 농지 개혁에 앞장선 우리나라 농업 발전의 초석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석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선사업가였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운동가였다.
나중석 선생의 민족운동과 사촌 나경석 선생의 독립운동은 많은 사회적 귀감이 되는 선행 사례이며,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8•15해방과 민족 독립을 성취했고, 남북한에서 양 공화국으로 탄생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역사적 결함과 한계로 인해서 민족의 비극인 1950년 한국전이라는 역사 전쟁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계로 남으며, 그러한 한계의 극복이 나중석 연구의 과제로 남아 있다.
*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수원파: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는 17세기 나주 나 씨 11대손으로 수원부사를 역임한 나성손(羅誠孫)을 중시조로 한다. 수원부사 나성손의 처는 함평 이 씨 병조판서 이극명(李克明)의 여식이다.
이극명은 함평 이 씨 중시조로서, 함평군으로 봉해져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세거했다. 나성손과 이극명의 분묘는 전남 나주에 소재하며, 이극명의 손자 삼도수군통제사 함천군 이량(李良)의 분묘가 경기 화성 봉담읍 분천리에 소재하며, 이때부터 함평 이 씨의 분천리 세거가 시작되었다.
나주 나 씨 수원 입향조는 중시조 나성손의 손자 나한수(羅漢守)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나주에서 수원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조부 중시조 나성손이 수원부사를 역임했었고, 조모 함평 이 씨 집안이 분천리에 입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비롯된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는 중시조와 입향조를 거쳐 19세기에 부사공파 22대손 참판공 나영완 시절부터 경제적 기반을 장악하면서 지역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때부터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판공 나영완의 아들 중추부사 나기원과 용인군수 나기정, 중추부사 나기원의 아들 종손 통정대부 나중석으로 가문이 계승되었다. 용인군수 나기정의 아들 나홍석은 일본 와세다대를 유학했고, 아들 나경석과 딸 나혜석은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나경석 선생의 두 딸 나영균과 나희균은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와 서울대 미대 교수 및 여류 서양화가가 되었다. 경기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 입구에는 대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거나 공동 경작지로 제공한 통정대부 나중석을 기리는 「나중석송덕비」가 당시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도로 공사로 송덕비를 새로 세우게 되면서 옛 송덕비는 수원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부사공파 22대손 참판공 나영완(羅永完, 1825년~1890년)과 연안 차(車) 씨 사이에서 3남 2녀, 1남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 2남 나기형(羅基亨), 3남 용인군수 나기정(羅基貞), 1녀 전하준(全河駿)의 처, 2녀 이규성(李楏成)를 두었다.
참판공 나영완의 첫째 아들 나기원과 철원 송(宋) 씨 사이에서 1남 3녀, 1남 외아들 통정대부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 1녀 지성원(池性源)의 처, 2녀 남양 홍 씨 홍사우(洪思友)의 처, 3녀 김해 김 씨 김석환(金晳煥)의 처를 두었다.
나중석과 충주 지(池) 씨 사이에서 2남 1녀, 1남 나갑균(羅甲均, 1903년 생~1969년 몰), 2남 나재균(羅載均, 정균(正均), 1909년 생~1974년 몰), 1녀 나여균(羅姒均, 박만희(朴萬熙)의 처)을 두었다.
* 나중석의 3단계 생애: 자선사업가 나중석 선생의 생애는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1878년~1914년 사이로 출생부터 분천 낙향 이전까지 자강 운동기이다. 삼일학교 설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수원의 전기회사와 은행 설립 활동이다.
2단계는 1915년~1945년 사이로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 낙향부터 8•15해방까지 일제 시대이다.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자제하고, 양심적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했으며, 이 당시에 대지주 나중석의 소유 토지는 7만여 평에서 10만여 평으로 증가했다.
3단계는 1946년~1970년 사이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이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 전후에 대한민국 최초로 토지 무상 분배를 실시해서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나누어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지역 유지로서 존경받는 노후를 보냈다.
사실상, 나중석 선생의 3단계 생애는 한 인간의 “자족적”(自足的, self-made) 삶의 대표적인 역사적 본보기이다(한동민, 「근대 수원의 지식인 나중석의 삶」, 유교 아카데미, 수원향교. <http://skk–suwon.com> 참조).
* 나중석 선생의 삼일학원 민족 계몽 운동: 1906년 5월 삼일학교가 재정적 위기에 처하자, 나중석 선생이 학교 운동장 부지로 매향동 부지 900여 평을 기부했다. 이러한 부지의 기부는 삼일학원의 초창기 건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현재도 그가 제공한 부지가 학교법인 삼일학원 삼일중학교의 운동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중석 선생은 명실공히 삼일학원의 설립자로서 우리나라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이다.
삼일학원의 설립자였던 수원의 청년 유지들은 나중석, 이하영, 임면수, 차유순, 최익환, 이성의, 김제구, 홍건표 등이었다. 1907년 5월 7일 종로교회에서 시작해서, 1973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삼일학원 운영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현재 삼일학원은 수원시 소재 삼일중학교, 삼일공업고등학교, 삼일상업고등학교가 있고, 화성시 소재 협성대학교가 있다.
* 나중석 선생의 토지 개혁: 1946년 나중석 선생이 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집터 53좌 1만여 평과 논 9만여 평을 60여 호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하였다.”고 자신의 저서 『토지무상분배록』에서 쓰고 있다.
나중석 선생은 토지 분배를 나름의 소신과 원칙에 따라 실행했다. 무엇보다, 그의 토지 무상 분배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농토는 농민의 것이다.”는 경작인 소유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역사적인 선례이다. 또한, 그의 분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농지개혁법의 제정과 실행에 선구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 선생은 자신의 토지 무상 분배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 나경석 가문: 나경석 가문은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로서, 17세기 조선 시대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중시조 나성손이 수원부사가 되고 나성손의 처 함평 이 씨가 수원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을 피해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입향조 나성손의 손자 나한수가 나주에서 화성으로 피신하면서 수원 지역에 나주 나 씨 부사공파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주 나 씨 11대손부터 수원 지역에서 부사공파 가문이 이어지며, 19세기 조선 말기까지 ‘관료형 대지주 부호’로 특성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수원에는 수원 최 씨, 남양 홍 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있었고, 이들도 관료형 가문의 특성을 보였지만, 나주 나 씨는 대지주로서 농업 산업에 기반한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부호로 명문 가문을 떨치게 되었다.
나경석 가문은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으로서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에 대대로 호조참판을 증직하던 집안의 관례가 있었다고도 한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증직했다는 설도 있고, 조부 훈련원봉사•훈련원참군 나영완(羅英完)은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2대손으로서 종2품 호조참판을 했다는 설과 아들 중추부사 나기원의 덕택으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증직되었다는 설이 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台安面) 구봉산(九峯山)이다. 나경석의 외조부는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수원 최 씨 관료 최성대(崔成大, 1834년 생~1909년 몰)이다. 조부 나영완에게는 자녀 3남이 있었으며, 1남 나기원(羅基元), 2남 나기형(羅基亨), 3남 나기정(羅基貞) 3형제이다.
나경석 선생의 백부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에게는 아들로 함경도관찰사•정3품 통정대부•삼일학교 설립자 등을 역임한 종손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이 있고, 나중석의 아들로 나세균(羅世均), 나재균(이명 나정균) 등이 있다. 통정대부 나중석은 봉담 분천리 일대에서 대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배분하고 공유 농지를 제공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나중석송덕비」를 세워서 그의 송덕을 기렸으며, 자선사업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경석 선생의 아버지 수원면장•경기도관찰부주사•환소도감위원•친일파 시흥군수•용인군수 나기정(羅基貞)은 일본 총독부 치하에서 시흥군수를 연임한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선영이다. 5남매의 아버지로서, 이복 딸 나계석을 제외하고, 두 딸 나혜석과 나지석에게 집안에서 한학 교육을 시켰으며, 나혜석에게 삼일학교와 진명여고보 그리고 일본 유학까지 신여성 교육을 시켰다. 4형제 자매를 모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조선 최초의 신학문(공학, 미술, 음악 등)을 도입한 대표적인 명문 유학 가문이다. 모 수원 최(崔) 씨 최시의(崔是議)는 경기도 남양군 서여제면장(현 화성시 서신면 서부 지역) 최성대(崔成大)의 여식이다.
용인군수 나기정의 1남 나홍석(羅弘錫)은 백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했다. 집터는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에 소재한다. 2녀 큰누이 서녀 나계석(羅稽錫)은 이복 큰누이로 알려져 있지만,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세에 수원의 영향력 있는 가문 수원 최 씨 이복 매형 최기환(崔基煥)과 조혼함으로써, 수원 유지 최기환과 조혼한 나계석이 서녀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3남 본인 나경석(羅景錫)은 독립운동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과대 유학생으로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며, 일제 때 과학기술자•사업가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했고, 중앙학교 과학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으며, 나용균과 함께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이었고,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정부에서 문교부 편수관을 지냈다. 4녀 나혜석(羅蕙錫)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여류 단편 소설가이다. 여류 독립운동가로서 2•8선언과 3•1운동, 그 밖의 독립운동에 주도 및 참가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부근이라고 알려져 있다. 5녀 나지석(羅芝錫)은 막내 여동생으로서 일본 음악학교에 유학했으며, 평안도 곽산 부호 김창곤과 결혼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의 처 송남(松南) 배숙경(裴淑卿)은 개성상인 집안 출신으로 동아부인상회에 근무했다. 나경석 선생과 배숙경 부부 사이에 자녀 1남 3녀를 두었으며, 1녀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나영균(羅英均)이고, 2녀는 서울대 미대 교수•여류 서양화가 나희균이다. 이들 두 딸은 모두 나혜석의 여조카이며, 나영균은 후에 대학교수가 된 부유한 사업가 전민제와 결혼했고, 나희균은 화가 안상철과 결혼했다. 나영균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를 지내고, 한국영어영문학과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화여대 명예교수이다. 나희균 교수는 당시에도 여전히 드물던 프랑스 파리 미술 유학을 했으며, 귀국해 중앙여고 미술교사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고,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3남 나상균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거주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나혜석의 프랑스 파리 근교 마을 풍경화를 소장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나경석과 나혜석 오누이는 둘 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나기정의 큰아들 나홍석의 손녀로 여류 영화배우 겸 연기자 나문희가 잘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나경석 가문은 전통적인 관료형 대지주 부호였으며, 조상 대대로 참판공으로 이어지는 증직을 받아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으로 수원 지역을 대표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화국 체재로 전환되면서 공학도 사업가 나경석은 고무와 유리 산업을 선도하기도 했다. 나경석 선생은 독립운동 이후에는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그리고 북한 해주 지역에서 농업 간척 및 농장 경영을 하거나 공장 경영으로 사업을 했다.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의 영향으로 중앙학교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
* 독립운동가 나경석과 나혜석: 나경석 선생과 나혜석 선생은 수원 부호 나 부잣집 오누이로서, 조부 참판공 나영완과 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 나기정의 자녀들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공학도이자 미술학도이다. 이들은 둘 다 독립운동에 관계했으며, 나경석 선생이 사회운동가와 사업가로 활동했고, 나혜석 선생은 서양화가와 작가로 활동했다. 둘 다 3•1운동에 깊이 관여하거나 주모했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나경석 선생은 대한민국 공화국 정치체를 주장한 논문을 쓴 저술가이며, 나혜석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이다.
한 가문의 오누이가 둘 다 일본 유학으로 신학문을 도입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경우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 민족운동가 나중석과 독립운동가 나경석: 정3품 통정대부 나중석은 중추부사 나기원의 외아들로서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손 종손이다. 조부 참판공 나영완의 손주로서 수원 나 부잣집 대지주 출신이다. 그가 생전에 보유한 토지는 10만여 평에 이르렀고, 그의 재산은 일제 시대에도 계속 증가했다.
이당 나중석 선생은 생전에 자선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대한민국 농지 개혁의 선구자로서 1946년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 무상 분배를 스스로 실행했다. 당시에는 대지주가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했고, 다수의 소작인들이 소작농을 영위했다. 나중석 선생은 1945년 8•15해방에 이어서 1946년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자신이 보유한 10만여 평의 대토지 가운데 1만여 평의 토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9만여 평을 무상 분배나 공유 경작지로 제공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북한의 토지 개혁과 함께 농지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던 남한의 실정은 나중석 선생의 선구적인 토지 분배 시도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주장한 경자유전의 토지 소유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할 만한 우리나라 농업에 대한 지혜로운 지식인이자 농업인의 해법이다.
13세 연하 사촌 남동생 나경석은 일본의 공대 유학 이후에 3•1운동에 연루된 후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을 떠나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연해주와 만주 지역 해외 동포들의 애국계몽운동과 농업 운동 및 근대 공업화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 농장과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사실상, 나경석 선생은 일제 시대 우리나라 이북의 북방 진출의 개척자였다.
부사공파 종손 나중석 선생이 토지 개혁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면, 나혜석의 작은오빠 나경석 선생은 북방 진출과 개척에 몰입했다.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두 사촌 형제가 대표하던 농지 개혁과 북방 진출은 우리나라 농업 진흥의 교두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 발전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석 선생의 토지 개혁 또는 농지 개혁과 나경석 선생의 북방 개척과 산업화는 1950년 6•25동란을 겪어야 했고, 남북한이 분단되는 결과가 되었다. 토지 개혁과 북방 진출이 우리나라 농업 발전과 산업 발전을 가져왔다거나, 남북한 분단 시대의 초래가 중요하다기보다 농지 개혁으로 인한 농업 발전의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이 중요하다. 남북한 분단 시대의 도래보다도 북방 진출 이후에 남북한 시대의 변화를 올바르게 예측하는 혜안이 중요하다. 나경석 선생은 북방 진출 와중에도 날카롭게 분단 시대를 미리 대비하고 해외 동포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나중석 선생의 사회적 농지 개혁과 나경석 선생의 남북한 북방 진출은 민족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중요한 건 정치와 경제를 얼마나 올바르게 개혁하고 혁신할 것인가 하는 이정표이며, 또한 남북한 민족의 미래를 올바르게 예측하고 미리미리 대비하는 슬기로운 혜안(慧眼)이다.
* 한국의 나중석 연구 성과: 이당 나중석 선생의 민족운동에 대해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검색되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국내 학술 논문으로는, 한동민, 「근대 수원지역 유지 나중석의 생애와 활동」, 『나혜석연구』 제3권, 나혜석학회, 2013년이 있고, 단행본으로는, 박환, 『잊혀진 민족운동가의 새로운 부활: 국내 민족운동의 숨겨진 이야기』, 선인, 2016년; 권현용, 『수원지역학』, 알음, 2014년; 삼일학원, 『삼일학원 65년사』, 동중상업고등학교, 1968년이 있다. <끝> <2024년 2월 28일, 아산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대손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한동민, 「근대 수원지역 유지 나중석의 생애와 활동」, 『나혜석연구』 제3권, 나혜석학회, 2013년. 75-112. (논문); 한동민, 「근대 수원의 지식인 나중석의 삶」, 유교 아카데미, 수원향교. <http://skk–suwon.com>; 최용석 글•사진, 「농지는 응당 경작인의 것이다-수원박물관 경내 이당 나중석 선생 자선송덕비」, 수원의 재발견, 『주간수원』, 2020-08-12; 박창수, 「나중석 선생과 제2의 토지개혁」, 자유게시판, 예수원, <www.jabbey,org>; 박창수, 「나중석 선생 관련 농민 가족의 인터뷰와 지난 역사에 대한 성찰」, 자유게시판, 예수원, <www.jabbey,org>; 나종혁, 「나경석(羅景錫) 연보」, 『진로정책상담연구소』, 다음카페;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