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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개소리의 구분은 쉽다. ‘의하여’는 과학이고 ‘위하여’는 주술이다. '위하여'는 인과율을 어긴다. 결과가 앞에 오고 원인이 뒤에 온다. 이게 잘못이라는 사실을 1초 만에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어색하잖아. 이런 것은 언어감각으로 그냥 알아야 한다.
바른 생각 – 수저로 밥을 먹었다.
허튼 소리 – 밥으로 수저를 먹었다.
과학자들이 하는 소리가 대개 밥으로 수저를 먹었다는 식의 개소리다. 문법을 어겼으니 논할 가치도 없다. 필연성이 없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면 그렇지 않다고 보는게 맞다. 과학은 필연을 따라가야 한다. 반드시가 아니면 과학이 아니다.
위爲는 '하는' 것이다. '위하여'는 '하고자 하여' 곧 동어반복이다. 아무 뜻도 없는 말이다. 그냥 헛소리다. For는 앞이라는 뜻인데 앞은 미래다. 원인이 미래라면 후건긍정의 오류다. 이게 병맛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밥통들과 대화를 해야하는가?
마이너스(의하여) - 결핍은 밸런스를 파괴하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플러스(위하여) - 잉여는 전체 밸런스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자전거 바퀴가 하나 없다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바퀴가 하나 추가되면 세발자전거다.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위하여도 부분적인 의미는 있다. 배가 고파서(의하여) 먹는 것은 음식 전체이고 맛이 있어서(위하여) 먹는 것은 음식 중에 일부 초콜릿이다.
플러스 변화(위하여)는 부분을 건드리고 마이너스 변화(의하여)는 전체를 건드린다. 눈이 없다면 인생 전체가 바뀐다.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돈이 없다면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돈이 남으면?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과학은 사건 전체의 판도를 봐야 한다.
거짓 - 인간의 약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석기를 사용했다.
진실 - 강한 개체만 살아남으므로 신체가 약하면 강해지도록 진화한다.
필연성은 마이너스다. 500만년 전에 송곳니를 잃고 석기를 사용했다. 송곳니의 부재는 마이너스, 석기의 사용은 플러스다. 플러스는 필연성이 없다. 과학은 원인에 주목한다. 송곳니 상실은 원인, 석기사용은 결과다. 결과를 원인이라고 우기는게 '위하여'다.
기존 가설 - 인간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환경 변화(건조화, 숲 감소)에 적응하기 위해 직립 보행을 시작하며 진화했다. 두 손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사용하고, 뇌 용량이 커지며, 언어와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AI]
건조화와 숲의 감소에 대응하는 방법은 많다. 정글을 찾아 이동하면 된다. 야간에 활동해도 된다. 다른 동물은 왜 직립 보행을 하지 않지? 반드시가 아니고 필연성이 없우면 개소리다. 아무말 대잔치다. 침팬지나 고릴라도 대부분의 시간을 땅에서 보낸다.
고릴라 수컷은 낮동안 80퍼센트의 시간을 땅에서 보내며 두 손이 자유로운데 왜 도구를 사용하지 않지? 직립보행 당나귀, 직립보행 토끼, 직립보행 얼룩말 좋잖아. 주먹보행하는 침팬지가 인간보다 더 빠르다. 침팬지는 단거리를 시속 40킬로로 달린다.
인간은 남자가 빨라봤자 시속 20킬로다. 아기 딸린 여성은 더 느리다. 낙타는 털이 있지만 사막의 더위를 견딘다. 당나귀는 털이 있지만 지구력이 좋다. 인간이 지구력으로는 당나귀에 밀리고 체온조절로는 낙타에 밀린다. 필연성이 없는 주장은 개소리다.
기존 가설 – 인간이 털을 잃은 진화적 이유 (체온 조절): 뙤약볕이 내리쬐는 초원지대에서 사냥하고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인간의 조상은 몸에서 발생하는 열을 빠르게 식혀야 했습니다. 털이 사라지고 땀샘이 발달하면서 땀의 증발을 통해 효과적으로 체온을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AI]
원숭이는 털고르기로 염분을 섭취한다. 경마장의 말도 많은 땀을 흘린다. 인간의 장점이라는 것은 억지로 말을 꿰어맞춘 것이다. 햇볕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면 털이 있어야 한다. 머리카락은 머리를 보호한다. 필연성 없는 부분적 효과를 들이밀면 안 된다.
원숭이가 네 발로 나무 위를 걸어 다니려면 균형을 잡아줄 꼬리가 필요하다. 유인원은 체중이 무거우므로 나뭇가지 밑에 매달려서 이동한다. 매달려서 이동하므로 꼬리가 필요없다. 2500만년 전에 돌연변이에 의해 꼬리 없는 유인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돌연변이에 의해 털을 잃어 새끼가 어미 배에 매달릴 수 없게 된 것이 직립보행의 원인이다. 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새끼가 매달릴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해졌을 수도 있다. 백인은 몸에 털이 많다. 로빈 윌리엄스는 보노보에게 그다지 밀리지 않는다.
포유류는 주간시력이 뛰어난 공룡을 피해 밤에 활동하고 낮에는 동굴에 숨어 있었으므로 야간시력이 뛰어났지만 원숭이의 조상은 5천만년 전에 특별히 야간시력을 잃었다. 나무 위로 도망친 개체만 살아남았다. 밤에 땅 위에 있었던 원숭이는 모두 죽었다.
고릴라나 침팬지 수컷은 대부분 지상생활을 하지만 잠은 나무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자는데 털을 잃은 호미닌은 그게 불가능하다. 인간은 직립보행보다 동굴생활이 중요하다. 동굴곰, 동굴사자, 동굴하이에나, 동굴늑대와 충돌하여 그들을 멸종시켰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진화는 무엇을 얻는게 아니라 잃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연선택으로 무언가 이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득은 개뿔 그런거 없다. 있어도 약하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은 꼬리를 잃고 털을 잃었다. 유전자 엔진의 작용이다.
뉴질랜드 캠벨 섬의 고립된 양떼 실험을 보면 생존에 불리한 조건이야말로 진화의 기폭제임을 알게 된다. 인간이 사라지고 고립된 섬에 버려진 양들은 너무 길게 자란 털과 겨울의 가혹한 추위에 거의 죽었는데 살아남은 소수의 개체는 순식간에 진화했다.
불리하면 죽지만 살아남은 종이 환경을 독차지하므로 많은 변이를 일으킨다. 진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경쟁자가 죽어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격리설에 해당된다. 원숭이 무리가 떠난 사헬지대를 호미닌이 독점하며 급격한 변이를 일으켰다.
우리는 직접 원인과 부수적 효과를 구분하지 못한다. 도구사용과 지능발달은 부수적 효과다. 호미닌은 돌연변이로 털을 잃어 새끼가 어미 등에 매달리지 못하자 나무에서 내려와 동굴을 차지했다. 동굴에서 생활하면 멀리까지 사냥과 채집을 나가야 한다.
개코 원숭이는 무리가 하루 4킬로를 이동하는데 호미닌은 최대 하루 40킬로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동안 아기와 엄마는 동굴에 남겨진다. 아기가 열살이 될때까지 수렵과 채집을 하지 않고 엄마와 동굴에서 놀았던게 지능과 사회성을 발달시킨 것이다.
원숭이.. 5천만년 전에 야간시력을 잃고 나무 위로 도망쳤다. 나뭇 가지 위를 네 발로 뛰어다니며 꼬리를 사용하여 균형을 잡는다.
유인원.. 2500만년 전에 꼬리를 잃고 원숭이에서 갈라졌다. 나뭇가지 아래에 두 팔로 매달려 이동한다. 간헐적인 직립을 하고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주먹보행을 한다.
호미닌.. 700만년 전 털이 부족해져 새끼가 매달릴 수 없다. 연년생(유인원은 4년마다)으로 낳은 아기를 양팔에 하나씩 안고 직립으로 이동한다. 수면과 육아는 동굴을 이용한다.
직립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본질은 새끼를 등에 업고 도망치는가 아니면 팔에 끼고 도망치는가다. 새끼를 등에 업으면 주먹보행이 되고 팔꿈치에 끼면 직립보행이 된다. 유인원은 직립이 가능하지만 주먹보행이 더 빠르므로 직립보행을 하지 않는다.
호빗족 플로레스인의 발견으로 지능과 도구에 관한 기존 가설은 모두 무너졌다. 지능발달과 도구사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능과 도구의 연결은 인간의 주관적인 관념이고 5백만년 전에 송곳니를 잃은게 본질이다. 송곳니가 없으면 돌칼을 써야 한다.
꼬리 중심의 원숭이, 매달리기 중심의 유인원, 걷기 중심의 호미닌은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원숭이가 꼬리를 잃었을 때 인간은 탄생은 결정된 셈이며, 유인원이 여러 종인데 비해 호미닌이 한 종만 남은 것은 호미닌이 생활할 동굴이 부족해서다.
아프리카에 동굴이 많다면 인간 종도 다양했을 것이다. 새끼가 매달릴 수 없게 된 시점이 직립보행의 격발 시점이다. 털은 120만년 전에 잃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새끼가 매달릴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해졌을 것이다. 보노보도 어미의 가슴 털이 부족하다.
구조 가설 - 원숭이는 5천만년 전에 야간시력을 잃어 포유류에서 갈라졌고, 유인원은 2500만년 전에 꼬리를 잃어 원숭이에서 갈라졌고, 호미닌은 700만년 전에 털을 잃어 유인원과 갈라졌다. 마이너스가 진화를 격발한다. 마이너스는 강제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호미닌은 동굴에서 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털과 동굴생활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자의 체온조절 타령은 필연성이 없지만 동굴 생활은 필연적이다. 새끼가 어미의 털에 매달리지 못하게 되면 동굴 외에 살 수 없다. 야간시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인원은 나무에서 잠을 자는데 인간은 동굴에서 잠을 잔다. 나무는 많고 동굴은 드물다. 동굴곰이나 동굴사자, 동굴늑대에게 동굴을 뺏기지 않으려면 일부 인원을 동굴에 남겨둬야 한다. 엄마가 어린이를 계속 동굴에 붙잡아둬서 유년기가 길어진 것이다.
유인원은 4년마다 한번식 출산을 하고 새끼는 즉시 독립한다. 인간은 어린이가 아빠의 사냥에 따라가지 않고 엄마 곁에서 동굴을 지킨 결과 성장기가 길어졌다. 지능이 높아지고 사회성이 발달한 것은 부수적인 효과다. 플로레스인은 지능이 높지 않았다.
원숭이가 꼬리를 잃을 수 있다면 유인원이 털을 잃을 수도 있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결정적인 진화는 무언가를 잃는 데서 시작된다. 지능, 도구, 언어 등, 사회성 등의 플러스적 요소는 진화의 본질이 아니고 부수적 효과다. 본질이 되는 엔진이 반드시 있다.
진화는 자연선택으로 된게 아니라 DNA의 변이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자연선택이 전혀 없는게 아니라 부수적 효과라는 말이다. 잃는게 엔진이고 얻는 것은 바퀴다. 엔진은 DNA에 있다. 유전자가 바뀌어야 진화가 격발된다. 야간시력과, 꼬리와, 털을 잃었다.
유리한 개체가 살아남은게 아니라 불리한 개체가 죽은 것이다. 털을 잃는 순간 새끼를 키울 수 없게 된다. 재빨리 동굴을 찾아내지 못하면 죽는 것은 무조건이다. 암컷과 아기가 동굴에 남겨졌으므로 아빠는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굴을 뺏기면 죽는다.
동굴에 정착하므로 인간의 사회성과 지능이 발달하게 되었다. 돌아다니면 매일 새로운 먹이를 발견하므로 학습이 필요없지만 정주생활을 하면 매번 같은 곳에서 채집을 해야 한다. 매년 가을마다 같은 장소로 사슴 무리가 이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높은 지능은 동굴생활의 결과다. 이동생활을 하면 먹이의 위치를 기억할게 아니라 풀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발달시켜야 한다. 그냥 풀을 먹으면 되는데 왜 뿌리식물의 위치를 기억하고 뿌리를 캐는 도구사용법을 학습하는가 말이다. 아프리카에 돌도 귀하다.
인간에게는 원숭이와 유인원에 공통되는 털 고르는 습관이 없다. 털을 골라주는 대신 도구를 고르게 된다. 털을 만지는 습관이 남아 무언가를 만지게 된 것이다. 진화의 엔진은 야간시력의 부재와 털의 부재와 매일 같은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굴생활이다.
침팬지 새끼는 배에 매달리다가 자라면 등에 매달린다. 새끼가 배에 매달릴 때는 어미가 한 팔로 안으므로 빠르게 도망칠 수 없다. 이때 부터 곤란해졌다. 차라리 지상을 달려버려? 직립하면 새끼를 등에 태울 수 없다. 주먹보행은 새끼를 등에 태우는 자세다.
털을 잃은 돌연변이가 체온 조절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지만 플러스 사고다. 마이너스로 보면 불리함에 주목해야 한다. 유리했다면 모든 종이 털이 사라져야 한다. 털 없는 말, 털 없는 기린, 털 없는 소, 털 없는 멧돼지? 그런거 없다. 털 없는 코끼리는 있다.
위하여는 선택이고 의하여는 강제다. 진화는 불리한 조건에 의해 강제된다. 유리하면 번성하는데 인간의 조상은 번성하기는 커녕 멸종 위기에 몰렸다. 한때는 지구 전체에 1천개체까지 줄었다. 남부 아프리카에 쓸만한 동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틀린 생각 - 인간이 직립하게 되자 손을 쓸 일이 없어서 손을 놀리느니 도구를 사용해봤다.
천만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일단 아니라고 봐야 한다. 과학에 온정주의는 없다. 엄격해야 한다. 털이 없어 새끼가 매달릴 수 없으니 새끼를 동굴에 둔다. 늑대도 새끼를 굴에 숨긴다. 늑대는 1년 만에 다 자라지만 인간은 유년기가 길다.
수확한 먹이를 새끼가 있는 동굴로 가져가려니 직립보행과 손의 사용이 강제된다. 직립은 도구사용의 원인이 아니라 털을 잃은 결과다. 석기는 사냥감을 손질하는데 사용된다.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데 왜 석기가 필요한지 생각하자. 동굴생활 때문이다.
송곳니의 퇴화는 500만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 석기가 사용된 것이다. 사냥 현장에는 바위가 없어 석기를 구할 수 없으므로 송곳니를 사용해야 한다. 석기로 쓸만한 돌은 동굴 주변에 널려 있다. 송곳니의 퇴화는 호미닌이 동굴 생활을 했다는 증거다.
과거에는 송곳니가 작아지면서 직립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화석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직립 보행이 더 근본적인 변화였음이 밝혀졌습니다.[AI]
인간의 직립보행은 동굴생활 때문이고 동굴생활은 털이 없어서 새끼가 매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털이 없어 체온조절이 어려우므로 온도가 일정한 동굴을 찾는다. 동굴은 석회암 바위산에 있으므로 돌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동굴이 진화의 엔진이다.
사냥감을 현지에서 먹어치우면 도구가 필요없다. 그냥 먹으면 된다. 사냥에 앞장선 대장이 먼저 먹는다. 늑대는 대장이 먼저 내장을 먹는다. 사냥감을 집으로 운반하면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공평하게 나누려면 정교한 석기가 필요하다. 이때 송곳니를 잃었다.
고도로 발달된 석기는 가죽을 해체하여 옷감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동굴생활을 하므로 석기가 필요할 뿐 침팬지는 송곳니로 충분하다. 석기의 사용은 송곳니의 퇴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곳니로 고기를 찢다 보면 그 자리에서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진화적 압력: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뇌에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지적 과제를 제시했고, 이 과정에서 뇌가 발달(좌반구 하두정엽 등)했습니다.[AI]
이런게 주술적 사고다. 소설 쓰고 있네. 역할을 분담하는 동굴생활이 서로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켜 사회성을 발달시킨 것이다. 사회성의 발달이 지능의 발달로 나타났다. 일부는 육아를 맡고, 일부는 동굴을 지키고, 일부는 채집을 하며 역할분담을 했던 것이다.
1. 원숭이는 야간시력을 잃어 나무를 떠나지 못한다.
2. 유인원은 꼬리를 잃어 나무 위로 걷지 못하고 아래에 매달린다.
3. 호미닌이 털을 잃어 새끼가 어미에 매달리지 못하자 나무를 떠났다.
4. 아기를 두고 동굴을 떠나지 못해서 먹거리를 찾아 배회하며 직립한다.
5. 직립하면 하체가 지렛대 힘점이 되고 손은 작용점이 되어 도구를 쓴다.
6. 사냥감을 동굴로 옮기면 사후 근육경직 때문에 석기를 사용하게 된다.
7. 사냥조, 채집조, 육아조 역할분담에 의해 사회성과 지능이 발달한다.
침팬지가 직립하지 않는 이유는 새끼를 등에 태워야 하기 때문이다. 새끼를 등에 태우지 않는다면 직립은 자동이라고 봐야 한다. 인간이 특별히 직립한게 아니라 침팬지가 특별히 직립하지 못한 것이다. 밤에는 나무 위에서 수면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바나가 건조해지면 이동해야 한다. 왜 이동하지 않았을까? 동굴이 아깝기 때문이다. 동굴을 뺏기면 죽는다. 이동을 통해 생존을 꾀할 것인가, 끝까지 동굴을 지킬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이동한 자들은 침팬지가 되었고 동굴에 남은 자들은 인간이 되었다.
단군신화가 힌트를 준다. 호랑이는 동굴을 떠났고 곰은 동굴에 남아 사람이 되었다. 직립의 시점부터 매달리는 인력에서 밀어붙이는 척력의 사용으로 힘의 방향이 바뀌면서 도구사용이 시작되었다. 석기의 제작은 사냥감을 집에서 처리하면서 시작되었다.
틀린 생각 - 직립하며 손이 놀게 되어 도구를 사용했다. (도구를 얻었다.)
구조 진실 - 집에서 사냥감을 해체하면 송곳니 대신 석기가 사용된다.(송곳니를 잃었다.)
사냥한 고기를 나눠먹을때부터 도구가 필요해진다. 사냥 현장에서 즉시 먹어치운다면 사후 근육경직이 일어나기 전에 송곳니로 물어뜯으면 된다. 사냥감을 동굴로 운반하면 사후 근육경직이 일어나서 송곳니로 해체가 안 되고 날카로운 석기가 필요하다.
매달리는 동작을 하는 침팬지는 신체를 지렛대로 이용할 수 없으므로 손으로 할 수 있는게 적다. 당길 수는 있는데 밀지를 못한다. 돌팔매질이나 투창을 할 수 없다. 하체가 약하므로 나무창으로 찌를 수 없다. 도구를 사용하기 전에 힘의 사용법이 바뀐 것이다.
진화는 마이너스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추적해야할 필연성이 의하여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털을 잃어 매달릴 수 없고, 송곳니를 잃어 도구를 쓰지 않을 수 없고, 나무에 보금자리를 만들 수 없어서 동굴생활이 필요했다.
야간시력을 잃었다. - 나무에서 과일을 얻었다.
꼬리를 잃었다. - 매달려 이동하는 능력을 얻었다.
털을 잃었다. - 밤의 추위를 피해 동굴생활을 얻었다.
매달릴 수 없다. - 주먹보행을 버리고 직립보행을 얻었다.
당기는 근육을 잃었다. - 하체를 이용하는 던지기 근육을 얻었다.
송곳니를 잃었다. - 사후 근육경직 때문에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
유년가 길어서 이동을 못한다. - 사회성과 지능이 발달하게 되었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다.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가다. 인과율을 충족시키려면 마이너스에 주목해야 한다. 플러스에 홀리는 사람은 과학자의 자격이 없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박스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이 아니다.
마이너스(의하여)가 원인이고 플러스(위하여)는 결과다.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과학의 출발점이다. 무언가를 상실하여 대체재를 마련하는 과정에 진화가 일어난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므로 의식적으로 마이너스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부재에 의하여(마이너스)는 밸런스를 움직여 전체를 건드리고 존재를 위하여(플러스)는 밸런스를 다치지 않는 부분에만 영향을 미친다. 의하여가 원인이고 위하여는 결과다. 인과의 분별이야말로 과학의 첫 단추다. 이게 자동으로 안되면 과학은 하지마라.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밸런스의 복원력 때문이다. 어떤 결핍에 의해 계의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그것을 채워 밸런스를 복원하는 과정에 변화가 일어난다. 계의 밸런스는 사건 전체에 관여한다. 밸런스 이동은 사건 전체를 건드리므로 과학적 필연성이 있다.
붉은 여왕과 내시 균형
입체적 사고로 도약해야 한다. 선형사고에 갇히면 피곤하다. 진보가 옳고 보수가 그른게 아니다. 진보는 앞에서 길을 열고 보수는 뒤를 받친다. 둘 다 필요하나 때와 장소가 중요하다. 네거리가 시장원리라면 막다른 골목은 내시균형이다. 지정학적 요지는 애덤 스미스가 먹고 고립된 지역은 존 내시가 먹는다. 시작단계는 자유무역이 먹히고 결말단계는 보호주의가 먹힌다.
공격수와 수비수는 적이 아니다. 역할이 다를 뿐 같은 팀의 동료다. 진보가 공격수라면 보수는 수비수다. 보이지 않는 힘과 내시균형을 합쳐서 하나의 이론을 완성해야 한다. 질-입자-힘 단계는 자유주의 공격수가 먹고 힘-운동-량 단계는 보호주의 수비수가 먹는다. 초반의 포석단계는 오청원의 신포석이 필요하지만 막판 끝내기 단계는 이창호의 두터움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대칭된 선 위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제로섬 게임의 단선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수직적 사고, 입체적 사고로 도약하는 방법을 모른다. 자유주의와 보호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유주의가 먼저 가고 보호주의가 나중에 가는 수순을 모른다. 일머리를 모르고 무작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무조건 진다. 상대가 내 패를 다 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뇌 용량이다. CPU가 부족한지 메모리가 딸리는지 제로섬게임은 아는데 윈윈게임은 모른다. 상생상극의 원리를 모른다. 레버리지와 리스크 헷지의 작동방식을 모른다. 저울의 좌우 두 접시가 수평대결하는 것은 아는데 하나의 축과 두 접시의 상하대결은 모른다. 인간들이 시스템 아이큐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작동방식을 모른다.
깔때기 입구에서는 윈윈게임이 벌어지고 출구에서는 제로섬게임이 벌어진다. 두 명이 사는 무인도에서 소득을 두 배로 증가시키는 방법은 한 명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상피의 원리다. 정치인이 특히 동향 출신과 상성이 안 맞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상성 개념을 알 것이다. 김상현은 동교동 황태자로 불렸다. 그런데 같은 호남 출신 김대중이 옆에서 비벼대면 피곤하다.
이해찬은 왜 유시민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다고 했을까? 자기 보좌관인데 좀 키워주면 어때서? 노무현과 유시민은 상성이 맞다. 고졸 노무현은 서울대 유시민을 키워주고 싶어한다. 보사부장관으로 밀어준다. 그런데 서울대 선배 이해찬은 후배 유시민을 씹어댄다. 서울대 출신 진중권도 조국과 유시민이 못마땅하다. ‘국이 걔는 안돼.’ ‘시민이가 뭘 안다고?’ 이런다.
알고 보면 이런 미묘한 서열본능이 정치판의 많은 것을 결정한다. 이유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개도 오빠개와 누이개를 같은 견주가 키우면 싸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실험에서 입증되었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오빠와 여동생처럼 방귀 트고 싸운다. 서로 조심하는게 없다. 이건 동물의 본능이므로 어쩔 수 없다. 진중권은 동물이었던 것이다.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소년공 이재명과 하버드 김민석은 상성이 맞다. 전라도 김대중과 경상도 노무현도 상성이 맞다. 권노갑이 똥파리 짓을 하는 이유를 말안해도 알만하다. 상성만 알아도 정치인의 행태를 거진 맞출 수 있다. 상성이 맞는 것은 붉은 여왕의 법칙이고 상성이 안 맞는 것은 내시균형에 갇힌 것이다. 상성이 안 맞으면 제로섬 게임이 된다. 문제는 착각이다.
상성이 안맞는데 상성이 맞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김건희가 나경원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냥 알잖아. 남의 결혼식에 흰 드레스 입고 가면 안 되는 것과 같다. 들러리가 신부보다 돋보이면 안되잖아. 그런데 친하다고 그런 짓을 한다. 걔랑 나랑 어떤 사이인데 다 이해할거야. 결국 찢어진다. 친한 사이에 원수되는게 이유가 있다. 동물의 서열본능이 내시균형을 끌어낸다.
가족이 웬수되는 일도 흔하다. 딸이니까 이해하겠지. 아들이니까 괜찮아. 가족들이 함부로 대한다. 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다. 친한데 윈윈이 되는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끼리 의기투합해서 똘똘 뭉쳐서 모두가 잘 된다. 잘보면 그 안에 서열이 있다. 잘 되는 경우는 어떤 사건의 시작 때다. 뭔가 시작할 때는 윈윈게임이 되고 결말을 지을 때는 너죽고 나죽고 이판사판이 된다.
똥파리가 저러는 이유를 알만하다. 그들은 지금을 결말 단계로 보고 우리는 민주당 20년 장기집권의 시작 단계로 본다. 우리가 이재명 정도의 능력자를 5년 마다 한명씩 배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대선후보를 많이 키워놔야 된다. 똥파리는 지금이 수확철이다. 청와대에 아첨해서 낙하산 한 자리 해야 한다.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똥파리를 설득하는게 불가능한 이유다.
처음 일을 벌일 때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따르고 시장이 레드오션으로 바뀌면 내시균형을 따른다. 세가지 법칙이 있다. 경쟁할수록 잘되는 먹자골목 법칙. 경쟁하면 다 죽는 오징어게임 법칙. 먹자골목에서 오징어게임으로 변하는 법칙이다. 먹자골목이 붉은 여왕이면 오징어게임은 내시균형이다. 법칙 갈아타기는 오청원의 포석에서 이창호의 끝내기로 게임이 바뀐다.
먹자골목 법칙 - 경쟁할수록 시장의 파이가 커져서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단 넓은 배후지가 있어야 한다. 상권이 좋아야 한다.
오징어게임 법칙 - 경쟁할수록 팍팍해진다. 배후지가 없다. 상권이 나쁘다.
갈아타기 법칙 - 초반 블루 오션은 붉은 여왕, 막판 레드 오션은 내시균형이다. 점차 배후지가 감소한다. 점차 나빠져서 오징어게임이 된다.
이재명은 많은 대선주자를 경쟁시켜야 한다. 세자를 책봉하는 순간 신하들이 줄서기를 하고 임금을 무시한다. 동궁에만 출입하고 대궐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역사책의 허다한 피비린내가 다 이유가 있다. 많은 대선주자는 지렛대로 이용된다. 위기가 오면 이 대선주자를 죽여서 저 대선주자를 살린다. 이인제 죽여서 노무현 살리고 이낙연 죽여서 이재명 살린다.
모르는 사람은 이인제가 나쁘다거니 이낙연이 썩었다거니 하지만 하수 생각이다. 원래 정치판은 누군가를 죽여서 불쏘시개로 쓴다. 정청래, 조국, 추미애, 송영길, 김민석을 다 모아놓았다가 나중에 불쏘시개로 써먹는게 고급기술이다. 수박은 반드시 나타난다. 수박을 처단해서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이 바닥에서 정치 아이큐가 떨어지면 죽는게 맞다. 살벌한 판이다.
상부구조 - 움직이면 코어에 가까워진다. 외부압력 흡수
하부구조 - 움직이면 코어에서 멀어진다. 내부압력 배출
알고보면 물리학이다. 깔때기 입구는 움직일수록 동료가 지렛대 받침점이 되어 이득을 본다. 깔때기 출구는 움직일수록 모래시계 밑으로 추락한다. 진보는 움직일수록 활력을 얻고 보수는 움직일수록 목숨을 재촉한다. 장동혁이 저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개혁은 원래 진보가 하는 것이다. 보수가 개혁을 시도하면 처참해진다. 신돈의 개혁이 실패한 데는 이유가 있다.
진보는 집단 중에서 가장 앞선 사람이 기준이므로 움직일수록 흥하고 보수는 집단 중에서 가장 뒤처진 할배가 기준이므로 움직이면 몰살당한다. 단 진보는 열린계라야 한다. 일본과 같은 닫힌계에서 진보전략은 불가능하다. 바둑판이 비어있을 때 오청원의 신포석이 쓰이는 것이다. 반상이 메워진 다음에는 이창호가 나서야 한다. 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된다.
붉은여왕의 법칙 - 깔때기 입구. 일의 시작단계. 열린계. 진보는 움직여야 흥한다. 대열의 선두에 서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 상생 효과.
내시균형의 법칙 - 깔때기 출구. 일의 결말단계. 닫힌계. 보수가 움직이면 죽는다. 맨 뒤에 있어야 한다. 존 내시 이론이 적용된다. 제로섬 효과.
마이너스의 법칙 - 붉은 여왕은 충분한 배후지가 필요하므로 시장이 점점 커져야 한다. 시장이 더 커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어 순식간에 레드오션이 된다. 상투 잡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갈아타기의 법칙 - 시장은 결국 포화상태에 도달하여 파멸하므로 지속가능한 진보를 이루려면 창의와 혁신에 의해 새로운 시장이 계속 등장해줘야 한다. 문예사조나 대중문화의 유행이 돌고 도는 이유다.
하나가 맞고 하나가 틀린게 아니다. 시장의 머리와 꼬리를 잘 구분해야 한다. 머리는 붉은 여왕의 길을 가고 꼬리는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다. 시장에 자유를 줄수록 흥하는 타이밍이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지정학적으로 닫힌 나라들은 내시균형에서 탈출할 수 없다. 일본은 지금 갇힌 나라가 되었다. 한국과 같은 반도국가들은 붉은 여왕이 흥한다. 한국은 진보가 숙명이다.
내가 지렛대의 손잡이를 잡았는지 아니면 빠루(지렛대)에 뽑히는 못이 되어 있는지 잘 판단해야 한다. 열린계는 지렛대 손잡이를 잡았고 닫힌계는 못이 되어 결국 뽑혀 나간다. 손잡이가 되는 방법은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혼자가 되면 결국 뽑히는 못 신세가 된다. 국힘은 지금 뽑히는 못의 신세다. 가만 있으면 천천히 뽑히고 까불수록 정당해산으로 빨리 뽑혀 나간다.
빈익빈 부익부는 자연의 법칙이다. 부익부는 지렛대 손잡이를 잡았고 빈익빈은 뽑히는 못 신세다. 부자는 다른 부자가 도와주므로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다. 내가 망하면 다른 부자도 같이 망한다. 은행은 망할 수 없다. 빈자는 옆집이 망해야 내가 산다. 내 가게가 망하면 내 가게 손님이 옆집으로 같다. 먹자골목은 반대로 서로 경쟁하며 기술을 훔쳐서 같이 흥한다.
자신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상피에 갇히면 죽고 내시균형에 갇히면 죽는다. 고립주의로 가면 죽고 보수에 갇히면 죽는다. 뽑히는 못은 용케 버텨봤자 다음에는 더 센 빠루가 온다. 인디언은 뽑히는 못 신세다. 백인 한 명을 죽이면 백인 열 명이 온다. 참으면 서서히 죽고 저항하면 빨리 죽는다. 뽑히는 못이냐 자명한 운명이냐. 게임의 구조를 바꿔야 산다.
주변에 털어먹을 만만한 배후지가 있으면 자명한 운명 포지션이고 그게 없으면 뽑히는 못 포지션이다. 젊어서는 동료에게 의지할만 하고 나이가 들면 동료의 존재가 부담스럽다. 인간들이 배신하고 변절하는 이유다.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모두 지렛대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이 가운데서 뽑히는 못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매력과 열정을 잃었을 때다.
어린이는 움직일수록 강해지는데 노인은 움직이면 뼈가 부러진다. 천하인이 되어야 한다. 천하 단위로 보면 누구나 어린이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팀에 들어야 한다. 팀 안에서는 누구나 어린이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티끌 모아 청소부 되고 변부자에게 1만냥을 빚져서 허생은 부자가 되었다. 이왕 빚을 지려면 신에게 빚을 져야 한다. 신은 빚진 것을 반드시 받아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내부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고 사회주의는 이미 망해 있는 상태로 출발하여 망하는 속도를 늦춘다. 생명은 내부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죽지만 생태계는 다양성으로 죽는 속도를 늦춘다. 지속가능한 것은 시간을 벌어 변신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화다. 자본주의가 사는 방법은 없고 사회주의가 시간을 벌어주면 그 사이에 진보하는 방법은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상부구조가 무너지면 하부구조에서 그것을 채우려는 보상이 프로그램이 작동한다. 상부구조의 변이에 의해 무언가 결핍이 일어나면 변이가 활발해져서 채워넣는 프로그램이 유전체계 내부에 원래부터 존재한다. 그것이 진화의 엔진이다.
상어나 복어는 물고기 중에서 특히 변이가 많다. 복어는 바위에 붙은 불가사리를 뜯어먹고 사는데 바위의 종류만큼 다양하다. 고등어는 큰 바다를 돌아다니므로 다양성이 부족하다. 고등어가 황제 한명이 통치하는 중국이라면 복어는 군주가 많은 유럽이다.
인생의 의미
인간들 중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 진지하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사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어떤 생각을 투척하지 말고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들의 99 퍼센트는 개와 다를 바 없다. 개도 단어는 알아듣는데 문법을 모른다. 단어를 투척하지 말고 문법을 조직해야 한다. 그게 되는 사람이 없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 0은 아니다. 0이라면 이런 말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대략 허튼소리지만 드물게 번뜩 스쳐가는게 있다. 단어에서 문법으로 도약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 말고 더 높은 세계가 있고,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사람은 있었다.
행복이니, 사랑이니, 성공이니, 쾌락이니 하며 달달한 단어들을 주워섬기는 사람은 모두 사건의 결과측을 보고 있다. 쏘는 활이 아니라 맞는 과녁을 본다. 명중이 잘되는 좋은 과녁을 찾으려고 한다. 어리석다. 왜 원인측을 보지 않는가? 왜 쏘는 활에 주목하지 않는가? 문법이 맥락을 쏘는 활이라면 단어는 화살이다.
짜증나는 것은 함부로 단어들을 투척하면서 문법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노자, 장자, 니체의 부류 는 코미디언에 불과하다. 그들은 진지하지 않다. 그들은 잘난척 하는 엘리트의 우월주의를 비웃는 포지션을 잡고 점포를 열었다. 지나가는 사람 소매를 잡고 장사를 시작한다.
'잘난 척 하지마!' '그러는 너는 잘났냐?' '사실은 나도 못났어. 나도 아는게 없어. 나도 바보천치에 쑥맥이라고.' '어쩌라고?' 바보들의 신세한탄에 불과하다. 재담을 포장해서 책이나 팔아먹자는 장사꾼이다. 그나마 플라톤이 뭔가를 봤다. 그의 그림자와 이데아의 차이는 단어와 문법의 차이다. 그러나 갇혀 있다.
그는 단어에서 문법으로 차원의 도약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데아 개념 역시 마구잡이로 투척되는 단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왕자병에 나르시시즘이다. 노자, 장자, 니체 부류가 비웃는 대상이 바로 플라톤의 엘리트 우월주의인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은 구름 위에서 노니는 소크라테스를 비웃는다.
더 높은 단위로 올라서는 사람을 비웃는게 그들의 장사 아이템이다. 풍자와 야유와 부정은 철학이 아니라 반철학이다. 그들은 이데아의 세계라는 더 높은 세계를 비웃는 상품을 판다. 이데아는 멋진 생각이지만 플라톤은 서구에서 오해된 인물이다. 서구에는 깨달음이 없다. 이데아를 유토피아로 잘못 해석했다.
행복, 사랑, 쾌락, 성공이 과녁에 박힌 화살이라면 이데아는 그것을 쏘는 활이다. 단어가 화살이라면 깨달음은 개별 단어에 맥락을 부여하는 문법이다. 이데아의 세계가 하늘나라 어디에 짱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엔진이다. 이데아는 의미의 자궁이다. 자궁에서 낳는다.
활이 잉태하여 화살을 낳고, 엔진이 잉태하여 바퀴를 굴리고, 문법이 잉태하여 단어를 투척하는 것이다. 그것을 낳는 자궁이 낳아진 아기보다 차원이 높다. 원인과 결과는 같은 차원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데아다. 사랑, 행복, 쾌락, 성공은 낳아진 바퀴다. 사랑의 엔진, 행복의 엔진, 쾌락의 엔진이 이데아다.
사건의 메커니즘, 언어의 메커니즘, 생각의 메커니즘, 존재의 메커니즘을 깨달은 사람이 서구문명에 없다는 사실이 플라톤의 불행이다. 이데아는 존재의 차원에 있고, 개념의 추상에 있고, 언어의 문법에 있고, 사건의 경로에 있다. 기승전결로 가는 사건의 두번째 단추가 그림자라면 첫번째 단추가 이데아라 하겠다.
플라톤도 직관적으로 무언가를 느꼈지만 깨닫지 못했다. 깨달음이라는 입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선 위에 나열한다. 동양에서는 석가가 더 높은 단계를 봤다. 석가는 아트만을 부정하면서도 윤회를 인정했다. 아트만이 없는데 뭐가 윤회한다는 거야? 앞뒤가 안 맞다. 한계가 있다.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엔진이다.
엔진과 바퀴는 세트를 이룬다. 바퀴의 부정은 엔진의 긍정이다.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부정적 사고에서 긍정적 사고로 올라서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화살의 부정은 활을 긍정하는 데 필요한 장치다. 바퀴의 부정에 머무르지 말고 엔진의 긍정으로 도약해야 진짜다. 노자와 디오게네스의 부정적 사고는 반철학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활을 쏘는게 중요할 뿐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맞는지는 상관없다고. 내가 의무를 다하는게 중요할 뿐 성과를 내는지는 확률이 결정한다고. 내가 활을 똑바로 쏘았는데 명중하지 않으면? 석궁을 쓰거나 컴파운드 보우로 진화시키면 된다. 이것이 엔진이다. 내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면 된다.
과녁을 더 크게 그리면 되잖아 하고 개그 치는 자들이 보통 철학자라 불리는 밥통들이다. 행복, 쾌락, 사랑, 성공, 명성, 불로장수 따위 똥같은 소리를 투척하는 사람은 화살이 빗나가니까 과녁을 키우는 짓이다. 석가는 이데아의 세계를 얼핏 봤지만 운전석에 앉아봤을 뿐 엔진을 작동하지 못했다. 그 시대의 한계다.
석가의 구원은 소승의 개인구원이다. 그것은 행복, 쾌락, 성공, 명성, 사랑 만큼 의미없다. 내가 깨달은게 어쨌다고? 누가 물어봤냐고? 그걸로는 신을 호출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자랑이 아니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천하를 깨우지 못한다. 다만 석가는 나중 대승의 집단구원으로 발전할 단서를 남긴게 의미있다.
소승적 개인구원은 유치한 것이다. 그게 자기자랑이다. 왕자병에 나르시시즘이다. 석가의 깨달음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나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고통을 벗어난 것은 당신 사정이고 그걸로는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없다. 자아도취라면 곤란하다. 만인이 공유하는 것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 천하인은 다르다.
개인이 바퀴라면 집단은 엔진이다. 인류문명의 집단구원이 신의 계획이다. 그것은 널리 공유되는 것이므로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은 거짓이고 개인은 반드시 죽는다. 집단을 진보시켜온 것이 인류 문명사 1만년의 성과다. 인류가 한 걸음 더 전진했는지가 중요하다. 인류문명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는 쳐줘야 한다. 아는 사람이 인류 중에 한명도 없다면 허무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발견한 것은 빈 깡통이지만 내가 내용을 채운다. 누가 틀을 만들어 놓으면 뒤에 누구라도 와서 내용물을 채워주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진짜는 힘이다. 정확히는 그 힘을 쥐어짜는 엔진이다. 단 남의 힘이라야 한다.
인생의 정답은 남의 힘을 빼먹는 기술이다. 나의 힘이 바퀴라면 남의 힘이 엔진이다. 개인의 등을 떠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은 집단의 무의식이다. 석가는 남의 힘을 빼먹는 엔진을 깨달았다. 예수의 사랑은 남의 힘을 빼먹으려면 접촉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인의는 남의 힘을 내것으로 하는데 필요한 절차다.
플라톤 – 바퀴(그림자) 말고 엔진(이데아)이 있다.
석가 – 내 것(아트만)은 없지만 남의 것(시스템-윤회)은 있다.
예수 – 일단 서로 연결해야 힘을 빼먹을 수 있다.
공자 – 그것은 집단의 의사결정 권력이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노자, 장자, 니체 – 사랑, 행복, 쾌락, 성공, 명성 따위는 엔진이 아니라 똥이다. 엔진이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모르겠지만 바퀴가 똥이라는 것은 알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서로 마주보고 합을 맞춰봐야 빼먹을 것을 빼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엔진은 나의 힘이 아니라 남의 힘이다. 부자의 돈은 나의 힘이므로 고갈된다. 내가 죽으면 부귀영화도 끝이 난다. 항우의 힘도 내것이므로 고갈된다. 유방의 팀플레이는 내것이 아니다. 의리는 천하의 것이다.
내것은 고갈되지만 서로 공유하는 것은 무한하다. 노자의 이유극강이나 장자의 무용지용, 곧 쓸모없음의 쓸모도 같다. 도구는 내것이므로 쓸모가 없고 메커니즘은 낳음의 자궁이므로 쓸모가 있다. 노자의 강이 도구라면 유는 메커니즘이다. 강이 단어라면 유는 문법이다. 아기는 결국 죽지만 자궁은 계속 낳는다.
노자, 장자, 니체도 뭔가를 보기는 봤다.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은 빈정거린 것이 문제다. 남의 생각이 부족하면 거기에 내 생각을 보태어 완성시켜야 한다. 남을 흉보고 빈정대는 부정적 사고는 철학이 아니라 반철학이다. 그들은 사람과 마주앉지 않으므로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없다. 군자가 아니라 소인배다.
미인의 미모는 내것이므로 쓸모가 없다. 부자의 돈은 내것이므로 쓸모가 없다. 한번 쓸 수는 있지만 반드시 고갈된다. 미녀가 결혼을 하면 그날로 인기가 떨어진다. 부자가 과시하면 빡큐를 먹는다. 쓸수는 있는데 써서는 안 된다.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은, 동료와의 의리는 무한하다.
의리를 쓸수록 사이가 굳어지고 팀플레이가 발전한다. 사랑은 사용할수록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된다. 동료와 합을 맞추는 집단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진짜다. 그것이 낳음의 자궁이다. 샘은 쓸수록 채워지고 버려두면 수맥이 막힌다. 물을 모아두는 것은 물통이지 샘이 아니다. 소비하면 사라지는 것은 물통이다.
부자의 돈, 미인의 얼굴, 폭력배의 완력은 샘이 아니라 물통이다. 인생의 엔진이 되는 진짜는 게임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신과의 대결이다. 존재의 엔진이고, 자궁이고, 샘이고, 문법이고 차원의 도약이다. 집단이 공유하는 것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차원의 도약을 일으켜야 한다. 엔진은 바퀴가 공유하는 것이다.
점은 점을 공유하지 못하나 선은 점을 공유한다. 면은 선을 공유하고, 입체는 면을 공유하고, 닫힌계는 입체를 공유한다. 하나의 자궁이 여러 아기를 공유한다. 공유한다는 것은 조절한다는 것이다. 선 위에 대치하던 것이 입체에서 조절되고 화쟁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차원의 도약에 의해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
인생은 자유와 의무 사이의 조절이다. 자유가 넘치면 허무해지고 의무가 넘치면 고통스럽다. 자유와 의무는 서로 침범하고 공유한다는게 다르다. 자유가 커지면 의무도 덩달아 커진다. 부가 커지면 빈이 줄어들고 미가 커지면 추가 감소하는 것과 다르다. 레버리지와 리스크가 같이 커지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다.
미인이 과시해봤자 파리떼가 달려들어 피곤해지는게 허무다. 부자가 돈을 벌어봤자 사기꾼들만 몰려든다. 연예인 중에 사기 한번 안 당해 봤다는 사람이 없더라. 그것은 자유의 덫이다. 엔진을 운전할 자격이 모자라는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꼴이 우습게 되는 것이다. 자유는 혼자 두는 바둑과 같아 의미없다.
신과의 대결에서 이기면 자유를 얻고 지면 의무를 진다. 이겼다면 자유를 얻어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졌기 때문에 의무를 져서 여태 빚을 갚는 중이다. 권력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의무다. 자유의 크기에 비례하여 빚이 커지는게 권력의 덫이다. 권력자가 빚이 없다고 여기는 순간 폭군이 되는 이치다.
문재인은 빚이 적기 때문에 나빠졌다. 노무현은 스스로 국민에게 큰 빚을 졌다. 탄핵을 당했지만 국민이 살려냈다. 이재명도 빚이 많다. 유권자들은 약점이 있는 후보를 선호하는 이유다. 약점이 있다는 것은 빚이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이 폭주하면 퇴임 후에 구속되므로 길은 정해져 있다. 우리가 그를 믿는 이유다.
깨달은 사람은 일부러 빚을 진다. 티끌 모아 태산은 바보들의 기술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그러하듯이 먼저 변부자에게 큰 빚을 내고 조금씩 갚는게 기술이다. 빚을 갚는 과정에 자신이 커지기 때문이다. 티끌을 모아봤자 자신은 기슭에 머물러 있다. 빚을 내서라도 더 높은 세계로 올라와 천하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자유와 빚이 있었다. 자본금과 청구서가 있었다. 공짜로 주어진 재능과 무대가 모두 빚이다. 내 빚의 주인에게 이름을 부여하면 '신'이다. 종교의 신과 다르다. 신은 수염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당신에게 빚독촉을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신이다. 빚을 갚는 방법은 자유를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개인의 재능으로는 빚을 갚을수 없다. 남의 것으로 갚아야 한다. 남의 것을 훔치면 도둑질이 된다. 정확히는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있는 것은 인류의 공유자산을 빼먹는 것이다. 지브롤터와 수에즈는 인류의 길목인데 영국이 틀어쥐고 해먹은 것이다. 공유도로에 톨게이트 세우고 요금 받는 자가 흥한다.
이데아 = 의리 = 사랑 = 다르마 = 에너지를 쥐어짜는 메커니즘 = 엔진
그것을 의리라고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고, 다르마라고도 한다. 인간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빼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 동물이다. 말을 들어야 남의 것을 빼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인이다. 남이 내것을 가져가도록 허락하는 것은 의다. 남과 마주보고 합을 맞추는 것은 예다.
빼먹을 타이밍을 아는 것은 지다. 빼먹을 기회가 올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신이다. 인생의 정답은 천하의 공유자산을 교대로 빼먹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엔진이다. 억지로 훔치면 연결이 끊기므로 빼먹을 기회를 잃는다. 인, 의, 예, 지, 신으로 불화 없이 정당하게 빼먹을 수 있다는 것이 공자 선생의 가르침이다.
게임의 주최측은 신이다. 신이 세상을 그렇게 설계했으므로 게임의 참가자는 빚을 진 것이다. 시드 머니를 받는 순간 문명의 진보라는 이름의 깔때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세상은 넓고 바보는 많다. 인간들 중에는 심지어 종교를 믿는 자도 있다. 그들은 자기 뇌에 생각금지의 족쇄를 채운 것이다.
절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가 인류의 90퍼센트라면 아찔하다. 무려 90퍼센트가 자신이 똥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조금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인생은 게임이고 게임의 파트너는 신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선과 악의 대칭관계가 아니다. 같이 우주를 공유하는 관계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다. 채무자가 파산하면 채권자도 망한다. 말이 쓰러지면 기수도 곤란해진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는 제로섬 세계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선 위에 대치하는 관계가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관계, 곧 활과 화살의 관계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고 권력은 빚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빚을 졌다면 내게 권력이 있다. 변부자는 허생에게 빌려준 1만냥을 받아내려고 허생의 파산을 막는다. 우리는 저울의 좌우대칭을 알지만 축과 접시들 사이의 상하대칭을 모른다. 게임의 주최측인 축은 권력을 쥐려고 두 접시 사이에 균형을 잡는다.
주최측이 편파판정을 하면 저울은 망한다. 주최측이 승부조작을 하면 카지노는 문닫는다. 서구철학은 흑백 이분법에 빠져 두 접시들 사이의 제로섬 게임만 알 뿐 서로를 공유하는 상생상극의 관계, 레버리지와 리스크의 관계로 가는 게임의 법칙을 모른다. 죄수의 딜레마는 알아도 붉은 여왕의 딜레마를 모른다.
붉은 여왕과 내시균형
붉은여왕가설과 내시균형은 대칭된다. 둘을 합쳐야 완전한 이론이 된다. 그것은 자명한 운명이다. 자명한 운명은 단일한 에너지원을 가진 사건의 기승전결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필연성이다. 에너지원은 하나다. 구조는 깔때기다. 사건의 기승전결은 자명성을 따라간다. 에너지는 약한 곳을 때린다. 사슬은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밑바닥에서 독박 쓰는 자는 정해져 있다. 경로는 정해져 있다.
죄수는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확률적으로는 죽어 있다. 게임을 반복하면 반드시 죽는 것은 죄수의 자명한 운명이다. 내시균형에서 죄수의 딜레마는 칼날을 잡았고 경찰의 딜레마는 칼자루를 잡았다. 경찰은 붉은 여왕이다. 붉은 여왕은 계속 달려야 한다. 멈추면 죽는다. 경찰은 계속 달려야 한다. 사건은 계속 커져야 한다. 씨름선수가 들배지기 기술을 걸었다면 들어 올린 다음 돌아야 한다.
둘 다 침묵했을 때 .. 둘 다 석방
한 명만 자백했을 때.. 한 명이 독박 6년 형
둘 다 자백했을 때.. 감형받아 3년 형
그냥 들고 있으면 되치기에 당한다. 경찰의 딜레마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게임이 일회용으로 끝나면 죄수도 승산이 있다. 그러나 게임이 반복되므로 자명한 운명이 된다. 경우의 수는 셋이고 셋 중에 둘은 경찰이 이기는 게임이다. 2 대 1로 경찰이 이기는 게임을 반복하면 죄수는 결국 죽는다. 죄수가 서로 내통하는 것을 막으려면 경찰은 더 넓은 범위를 커버해야 한다. 죄수보다 경찰이 많아야 한다.
죄수가 3명이면 경찰은 네 명이어야 한다는게 붉은 여왕의 달리기다. 깔때기의 입구는 출구보다 커야 한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모두가 손해본다. 반대로 부하를 경쟁시키면 보스가 이득을 본다. 경찰은 죄수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붉은 여왕은 더 앞에 있어야 한다.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보스는 멈출 수 없다. 눈은 선두에 있어야 한다. 눈이 엉덩이에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다.
죄수의 딜레마 – 협력하면 살고 경쟁하면 죽는다.
경찰의 딜레마 – 경찰이 죄수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국가가 경찰이 되어 기업을 죄수 위치에 두는 것이다. 기업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경찰은 죄수의 내통을 막아야 하고 국가는 기업의 담합을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붉은 여왕의 가설에 의해 기업은 끊임없이 신규로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 혁신이 멈추면 자본주의는 죽는다. 신기술과 신발명이 없고 재벌이 독점하면 자본주의는 죽는다. 죄수가 경찰을 이기면 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