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레이더] "우리는 청춘이다"…나이 잊은 'K-할배·할매' 종횡무진 활약
박세진2024. 8. 25. 07:01
한글 배워 래퍼로 변신·교육부 문학상 수상…"재능 찾았네"
특산품·나만의 굿즈 만들어 판매…수억 매출 올리기도
(전국종합=연합뉴스) 전국 곳곳에서 나이를 잊은 'K-어르신' 할배·할매들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청년층 부럽지 않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할매 래퍼'로 활동하는 등 고령화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산품이나 나만의 상품을 만들어 판매해 '억대 수익'을 내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할 일을 찾고 있다.
'수니와 칠공주' 랩 공연 [칠곡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수니와 칠공주' 랩 공연 [칠곡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배움에 나이가 있나요"…열정 넘치는 만학도들
25일 경북 칠곡군에 따르면 현재 칠곡군에는 70∼90대들이 모인 할매 래퍼 그룹 6개가 활동 중이다.
'수니와 칠공주', '보람할매연극단', '우리는 청춘이다', '어깨동무', '텃밭 왕언니', '밥심으로 랩때린다' 등으로 톡톡튀는 그룹명도 관심을 끈다.
특히 2023년 8월 결성한 그룹 수니와 칠공주는 국내외 언론과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며 주목받았다.
수니와 칠공주는 칠곡군 지천면 신4리 할머니 8명이 멤버다. 그룹명은 리더 박점순(86) 할머니의 이름을 땄다.
칠곡군의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워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일화' 등 애환을 담은 시를 썼고 이를 랩 가사로 옮겼다.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글씨체를 '칠곡할매글꼴'로 만들어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도 정식 탑재되도록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취임 후 첫 새해를 맞아 공무원들에게 보낸 연하장의 서체로 칠곡할매글꼴을 사용했다.
랩 대결하는 칠곡 할머니들 [칠곡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랩 대결하는 칠곡 할머니들 [칠곡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전남도에서는 최근 지역 문해 학습자인 박화자(73·보성)·한순자(84·해남) 어르신이 교육부의 전국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최고상인 사회부총리 상을 받았다.
박화자 어르신은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글을 배우며 겪는 어려움을 '도적놈'으로 비유해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한순자 어르신은 '요로코롬 좋은 시상도 있는갑소'라는 시를 통해 휴대전화로 문자와 사진을 보내며 세상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경남지역 6곳 문해교실을 졸업한 어르신 30명은 지난해 2월 '82세 문학소녀, 박경리를 꿈꾸다'를 주제로 경남도교육청에서 시화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깊은 겨울 속에 숨죽인 내 인생/가방 메고 학교에 가는 길에/목련화가 봄을 알린다/그대 목련화처럼 내 인생에도 봄을 맞아/글자 꽃이 오목 오목 피어난다/꽃봉오리처럼 내 글자 꽃이/오늘도 내일도 한 송이 두 송이/ 70세 어르신이 작성한 '숨죽인 내 인생'이라는 작품이다.
이들은 시화전에서 작품을 엮은 시집과 자서전도 전시하며 학업 성취를 위해 의욕을 보였다.
부산 '어묵168사업단' 어르신들 [부산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부산 '어묵168사업단' 어르신들 [부산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우리 지역 특산품' 활용해 억대 매출 올리기도
강원 춘천시 사북면 송암리에는 평균 연령 69세의 어르신 31명으로 구성된 솔바우영농조합법인이 운영되고 있다.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생산한 쌀을 단체 급식용 등으로 판매해 연 매출 8억원을 달성했다.
송암리는 지난해 12월 전국 첫 재생에너지 사용 농촌마을로 전환해 올해 3월 솔바우마을발전소를 준공, 월매출 1천만원의 수익도 올렸다.
부산 동구가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기획한 '어묵168사업단'도 주목을 받고 있다.
초량의 대표 관광지인 168계단과 부산의 명물인 어묵을 연계해 어묵 세트와 어묵꼬치 등을 생산해 판매한다.
2022년에는 네이버의 사회적 가치 플랫폼인 해피빈에 참여해 목표액 100만원의 20배에 달하는 2천만원어치의 주문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올해 초에는 어묵을 한 번 더 판매하는 앙코르 펀딩을 진행해 목표액 100만원의 6배인 603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경북 영주시의 할매묵공장은 할배목공소와 함께 대표적인 도시재생 성공 사례로 꼽힌다.
삼삼오오 모여 화투 치며 소일하던 70∼80대 할머니들 사이에서 야산에서 구할 수 있는 도토리로 묵을 쒀 팔자는 아이디어가 시작이었다.
할머니 16명이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고 묵과 두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2017년 3월 영주시가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만들어준 묵 공장이 터전이 됐다.
서울과 제주도 등 전국에 입소문이 나며 연간 매출이 1억원을 넘기기도 했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에서는 평균 연령 70세 이상 할배·할매 디자이너들이 활약 중이다.
지난해는 나만의 기획상품(굿즈)을 디자인해 홍성 글로벌 바베큐페스티벌에서 판매했다. 판매수익금 150만원은 산불 피해주민 등을 위해 기부했다.
이들을 돕는 신작로문화예술연구소는 홍성에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비영리단체다.
할매묵공장 초기 조합원들 [영주시 도시재생센터 제공]
할매묵공장 초기 조합원들 [영주시 도시재생센터 제공]
고령화 시대 모델 제시…"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체적 활동"
'할매 래퍼'를 기획한 박종석 칠곡군 홍보팀장은 "할머니들이 나이가 들고 연로해져서 사회로부터 소외됐다는 생각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랩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체적 활동을 하게 돼 굉장히 즐거워하신다"고 강조했다.
그는 "할머니들이 손주들과 랩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하시거나 광고 촬영 등으로 소정의 수익을 올리면서 보람을 느끼시기도 한다"며 "이제 고령화를 피할 수 없다면 고령화 시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이라고 전했다.
부산 동구 어묵168사업단 관계자도 "사업에 참여하는 어르신 대부분은 금전적인 부분보다는 소속감 등 사회활동을 위해 참여한다"며 "어르신들은 주문이 들어오지 않을 때면, 적극적으로 메뉴 개발을 하는 등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령층의 적극적인 사회 활동은 치매나 우울증 예방 등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호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는 "노래 가사를 외우고 가볍게 춤을 추면서 말을 하듯 노래하는 것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며 "젊은 세대와 소통해 사회적 고립감을 해소하고 노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랩이 많은 어르신에게 보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