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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15)
말씀을 따라 행한 요시야
왕하 22:11-13, 23:21-25
I. 서론
지난 주일, 이집사님 내외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요한 선교사님 가정과 노스 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에 거주하시는 선교사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지난 주간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찾아보면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 린튼 선교사님 가정, 그리고 블랙 마운틴 선교사님 거주지… 이런 영상들을 본 다음, 3가지 생각이 제 마음 속에 들었습니다. 모두 “부”로 시작합니다.
1) 부끄럽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끄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의 가정은 4대째 한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의 증조 외할아버지가 유진 벨 선교사님이시고, 할아버지가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입니다. 이분들은 191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약 50년간,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에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선교를 한다면, 우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대한민국은 유진 벨 선교사님과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신 1900년대 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은 좋아하는 분에게는 한국에 엄청나게 많은 맛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1912년 이분들이 한국에 왔을 때에는 한국은 안전한 곳도 아니었고, 살기 좋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맛집은 고사하고, 굶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감사한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그분들은 한국에 와서 일생을 바치신 것입니다.
저희도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저희 교회도 선교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매달 헌금의 십일조로 두 분의 선교사님을 섬기고 있고, 미국 교회와 연합으로 지역 인근에 있는 선교센터에서 홈러스 분들을 섬기는 사역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린튼 선교사님 가정과 비교하면,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2) 부럽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부럽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하시고, 노스 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에 정착한 선교사님들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이 분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한국 선교를 위해서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많은 열매를 보게 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백발의 노인이 될 것입니다. 몇몇 분들은 이미 백발이 되신 분도 계십니다. 우리가 지나 온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 볼 때에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사용해 주셨다는 것보다 더 값지고 감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 선교사님들의 삶이 부러운 것입니다.
3) 부전자전이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부전자전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렸듯이 린튼 선교사님 가족은 4대째 한국을 섬기고 있습니다. 유진 벨 선교사님부터 시작해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 그의 아들인 휴 린튼 선교사님, 그의 아들인 스티브 린튼 선교사님과 형제들. 휴 린튼 선교사님은 192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서 전라남도 도서 지역에 600여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첫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 선교사님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서 현재 의료 대북지원단체인 ‘유진 벨 재단”의 회장으로 북한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1979년부터 북한을 80회 이상 방문했었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김일성을 만날 때는 통역까지 했던 분입니다.
저는 이상의 세 가지 중에서 “부전자전”이 제일 신기하고도 감동적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일평생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입니다. 하지만, 첫 세대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역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15주 동안, 열왕기하를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를 보면,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거나 그 사역이 올바로 계승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다음 세대에게 왕권을 이어주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이대 왕 다윗은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그의 신앙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수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 수많은 이방 우상들을 이스라엘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장본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는 설상가상으로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고 말았고, 나라가 나누어진 채로,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대를 이어서 내려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히스기야 왕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므낫세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을 통틀어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지만, 가장 악한 왕 중의 한 명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우상을 숭배하고 악행을 일삼다가 2년만에 신복에 의해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 아몬의 아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시야는 할아버지 므낫세나 아버지 아몬과는 달리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와 같이 선한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신앙이 세대를 이어서 계속 계승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린튼 선교사님 가정의 사역은 놀랍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유다에 마지막 신앙의 부흥을 이끌었던 요시야의 신앙개혁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첫째,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다.
요시야의 신앙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때 발견한 율법책을 모세 오경 중에서 “신명기”라는 것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22장 1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2: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요시야(16대 왕)는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16세에(재위 8년),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20세에(재위 12년), 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적인 우상숭배를 금했습니다. 26세에(재위 18년), 성전을 수리하면서,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의 신앙 개혁은 율법책을 발견한 다음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신앙 개혁을 하던 도중에 율법책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옷을 찢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절망을 표현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요시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아 슬픔에 잠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NIV 주석에서는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하여 유다의 죄악과 이방 나라로의 추방에 대한 심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22장 13절에서도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요시야는 신명기 말씀을 통하여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를 봤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발견한 신명기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의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습니다.
2. 둘째, 말씀대로 유월절을 국가 단위로 격상시키다.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가 행한 첫 번째 개혁은 유월절을 국가 단위로 격상시켰다는 것입니다. 23:21-23,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말씀은 사시 시대부터 요시야 왕에 이르기까지 유월절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유월절은 각 가정마다 지켰지만, 국가 차원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말씀은 신명기에 분명히 나와 있고,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한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유월절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최초의 유월절은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출애굽기 본문에는 유월절을 각 가정마다 지켰습니다. 각 가정마다 양을 잡아서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국가적으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신 16:1-8,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이 본문을 읽어 보면, 세 번이나 장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2, 6, 7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이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왜 국가 행사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을까요? 그 이유는 모세가 출애굽기에서 말한 청중과 신명기에서 말한 청중이 다랐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출애굽한 1세대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통하여 직접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명기에는 출애굽한 1세대가 모두 죽고 난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한 사람들의 2세대 혹은 3세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월절의 의미와 감동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세대를 이어오면서 유월절을 지키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 지켰고, 가정마다 지켰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행사를 주도하면, 모두가 참여할 수 밖에 없고, 모두가 그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세가 이것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요시야와 요시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출애굽기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의 말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신명기 말씀에 의거해서 유월절을 국가 행사로 치른 것이었습니다.
3. 셋째, 말씀대로 우상을 제거하다.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가 행한 두 번째 개혁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우상들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23: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는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야에게 열왕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한다”는 말씀은 어디에서 많이 본 말씀이 아닙니까? 이 말씀이 바로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요시야는 자신이 발견한 율법책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표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막 12:29-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똑 같은 말씀입니다. “목숨을 다하고”만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이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지키고 있습니까?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려대 불어과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답안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황소가 손에 거울을 들고 제 얼굴을 비춰보는 그림 아래에 “황소가 □□□ 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문제는 이 비어 있는 네모 칸을 채워 넣는 것이고, 정답은 ‘거울을’입니다. “황소가 거울을 봅니다.” 그런데 어느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은 “미쳤나”라고 답안지에 썼다고 합니다. 황소가 손에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황소가 미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황교수님는 이 답안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답은 문제를 낸 선생의 의도와 동떨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미쳤나’를 쓸 수 있는 학생이 ‘거울을’을 쓰지 못할 리가 없으며, 그 학생이 그림 속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어린 학생은 동사 ‘보다’의 용법을 폭넓게 알고 있다.” 저도 황교수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비어 있는 네모칸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로 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한 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거행했고,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순종합시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