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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2013년 신년맞이 대마도 탐방
1부-히타카츠의 하루
-준비
지난 7월 백두산 기행 후, 여행에 맛 들린 회원들의 한번 더에 휘둘려 회장님께 승인을 여쭙는다.
신년맞이로 이름 붙일 것과 반드시 산행을 할 것을 이른다.
그리고 다시 여행사의 문을 두드린다.
마침 다른 모임에서 라오스 여행을 주선하라는 令이 있어 겸사겸사 함께 문의를 했다.
저번 우리 여행팀을 대단히 지적이고 멋진 고객으로 평가한 여행사에 정말 좋은 가이드를 간곡히 부탁하고, 우리는 관광 팀이 아닌 산행을 겸한 역사탐방 팀임을 주지시켜 둔다.
"알고 있습니다. 전번 백두산 가이드의 연락도 받았고..."하며 기분 좋게 그러마겠다는 답이 왔다.
마침 기본투어 보다 30%이상이 할인된 특가를 안내받아 우리의 계획에 탄력이 붙는다.
확정지어진 날짜가 1월 중순이후라 다친 다리를 회복 중인 국장을 생각, 시간을 좀 벌겠다 싶어 12월 금정산 송년산행을 한 뒤 참석 회원들의 의견을 타진한다, 거의 전원이 함께 하겠단다.
카페에 공지를 한다.
별다른 홍보 없이 20 명이 짜여졌다.
그러나 맨 먼저 회장님이 조카의 결혼식으로 난색을 표하고
다시 이상훈 박지현 선생님과 김명옥 재무국장이 불참하게 된 사유를 보내왔다.
-출발
그리그리 남자 8명, 여자 8명, 환상의 조합이라며 마음 가벼이 장도에 오른다.
7시 반 이른 시각,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가 준비해온 떡과 김밥, 초콜릿, 바나나 등으로 아침을 나누고, 가이드를 만나 승선티켓과 일정표등을 받는다. 이어서 정국장이 블루와 그린 포스트 잇으로 짝지를 정한다. 장난이란다, 그렇거나 말거나 웃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9시, 환송 차 나오신 문산 회장님의 잘 다녀오란 인사를 두고 공기부양선 비틀호는 대한해협으로 미끄러지듯 나선다.
전날까지 혹한이던 겨울은 언제냐싶게 화창하고, 바다는 잔잔하게 배를 띄워 1시간10분 만에 대마도 히타카츠 항에 우리를 부린다.
-도착
일본 땅, 여전히 지문과 사진을 찍는 개운치 못한 관례가 발목을 잡고 더디게 입국을 허락한다.
대마도, 일본 명 쓰시마,
이 섬 자체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가치를 지니다가 메이지(명치) 유신 이후 그 가치의 소멸로 잊혀졌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로 다시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곳,
여객터미널 옆 바다에는 해상보안청 배들이 떠있다. 또한 대마도 곳곳에는 자위대 기지들이 있다고 한다.
통관업무를 보는 세관직원들이 간단한 한국어로 분위기를 눙친다.
부산과 다름없는 바람이 쏴아 가슴에 든다.
우리를 싣고 갈 버스에는 <황백현 박사, 대마도 역사기행>이란 안내글이
굵은 고딕서체로 얼굴인양 붙어있다.
33인승 버스에 문산사람 16명과 다른 일행이 섞여 탑승한다.
처음 부산에서 출국할 때 우리를 도왔던 가이드 외에 또 한 사람, 대마도에 관한 연구로 최초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스루가이드 황백현 박사의 해박한 역사지식과 역사관으로 이미 우리의 여정은 충분히 속이 꽉 차리란 믿음이 선다.
다른 일행 중 어느 분은 황 백현 가이드를 기다렸다가
이번 여행에 참가했노라 해서 더더욱 마음이 족하다.
-미우다 해수욕장
미우다 해변은 일본의 100대 해수욕장에 선정된 작은 바다로,
입자가 유난히 고운 모래길 건너 작은 섬에 한 그루 소나무가 귀하고 귀한 존재란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우리 땅의 흔한 소나무와 달리 보여서
바다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모두들 기념사진을 찍는다.
섬인데도 차는 계속 산길을 간다. 해변으로 난 길이 거의 없이 산속으로 길이 난 것은 본래 대마도의 길들이 포부대 진지를 포진하기 위해 닦았기 때문이란다.
-도노자키
미우라 해변으로 가기 전 러․ 일 전쟁 격전지 도노자키를 차속에서 본다. 전쟁발발 100주년을 맞아 러․ 일전쟁해전기념비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이야기가 새겨진 동판이 서있다.
우호와 평화를 염원하는 그런 비, 반성과 재발방지에 대한 경각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승전보를 자랑하기 위함이리라.
-왕인박사현창비
잠시 왕인박사현창비에 차를 댄다.
왕인박사는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으며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던 때, 백제는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왜의 응신천황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도왜한지 7년만에 백제의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한 바, 왕인박사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다. 일설에는 일본글자의 초안을 왕인박사가 했다고 전한다.
왕인박사가 본토로 갈 때 잠깐 들렀다가 간 것을 기념해서 대마도에 왕인 박사의 현창비를 세워 기리는 것은 우리나라와는 뗄 수 없는 대마도의 특성과 우리 관광객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흔적을 진정한 우호관계의 디딤돌로 생각하기보다 그저 관광수입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을, 그래도 흔적을 왜곡하고 말살하는 중국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달수 고문님의 말로 달래본다.
-한국전망대
와니우라로 한국전망대를 가는 길
울창한 나무 모두가 활엽수로 우리나라의 것과 다름이 없다.
산길 옆에는 삼나무(스기木 )의 장대한 키와 편백나무(히노키木)가 하늘에 닿을 듯 뻗어 있고
바다를 낀 언덕바지에는 잡목들과, 산다화(애기동백)가 지천이다.
색깔도 붉거나 분홍, 흰색 등으로 다양한데 더러는 울타리가 되거나, 거리나 집 앞 어디에서건 자태가 곱다.
와니우라는 로밍하지 않아도 어느 지점에 서면 휴대폰도 터질 만큼 부산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 옛날 6,000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들과 해방 후 밀항 등을 통해 일본에 들어온 사람들이 고국에 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부산을 바라보았단다. 60년대 즈음에 거류민단이니 조총련이니 하며 주변에 일본밀항 가족들이 흔했던 시절이 내 기억 안에도 있었다.
부산이 육안으로 보이는 곳, 내 나라 내 땅이 눈에 보이지만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망망대해 수평선 너머 고국 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료에는 전망대 건물을 한국형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재를 가져오고,
설계도 우리가 했다고 씌였으나 팔각정 기와지붕이
그들의 제국주의 전투의 상징인 권위적인 투구를 이고 있다.
여름이나 밤에는 육안으로 광안대교와 부산항의 불빛이 보인다는데
날씨가 흐려 해무가 낀 탓인지 전시된 사진으로 부산을 눈요기 하고 내려온다.
한국전망대 팔각정에 오르기 전, 조선역관사순난비 앞에서 잠시 숙연해 진다.
1703년 조선역관사-지금으로 말하면 외교관 108명이 탄 배가 와니우라 해변에서 침몰한 것을 위령하기 위해 108개의 받침돌 위에 위령비를 세워놓았다.
그 곁에 무궁화 두 그루가 우뚝하게 지켜서 있는데 이 무궁화를 오늘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황백현 박사님이 심었다 한다.
황 박사님은 영어를 전공한 어학자로 동의대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대마도의 한어학습(韓語學習)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이완용이 한일병탄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 고위 관료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자필비명(碑銘)을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완용의 친필 비문은 뒤에 이즈하라의 국분사(고쿠분지) 납골묘에 가서 보게 된다.
임진왜란 때 출정지라는 오우라 해변을 지나 식당에 닿았다. 해변에 내렸으나 전혀 바닷내음이나 갯내가 없다. 이는 생선이나 쓰레기 등 부패되는 것을 해변에 두지 않기 때문이란다. 일본은 어느 갯마을을 가도 우리가 말하는 갯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고파진 배 앞에 차려진 식단은 이곳이 일본임을 다시 일깨운다.
유부초밥 2개, 단무지만 든 김밥 2조각, 덴뿌라(튀김) 조각, 그리고 우동 한 그릇과 단무지 2조각, 두 조각을 부쳐야 은행잎 만한 사과 조각이 전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종지만한 접시에 붉은살 생선회가 쬐끔 나왔다.
어쨌거나 우리는 준비해간 양주를 돌리며 즐겁게 주린 배를 채운다.
-은행나무 킨
다시 삼나무와 편백, 측백나무가 울울한 좁고 굽은 산길을 간다.
우리와 반대로 통행하는 길을 가며 곡각에 들면 영판 앞차와 충돌할 듯한 착시현상에 몇 번을 놀라면서, 1,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킨을 만나자 나무도 저쯤 되면 신목 아닐까 싶다.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으며,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잎이 금화처럼 쏟아지겠다 싶다.
아마 이 나무도 한반도에서 흘러흘러 왔으리라.
안내판에는 한국어로 그런 설명이 있으나, 자국어에는 그런 표기가 없단다.
영어, 중국어 보다 이곳에서는 한국어가 가장 중요한 외국어로 대접 받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과연 이곳 사람들은 한반도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보시다케 전망대를 향해 계단을 오르면서 곳곳에 전망대가 많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도 일본식인가, 관광객을 위한 것인가 잠시 머리를 굴린다.
계단을 오르자 발아래 아소만에 점 점 점, 섬이 떠 있는 모습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섬들은 우리 다도해의 그것을 닮았으나, 그보다는 촘촘히 박혀있고 바위섬이 아닌 초가지붕을 덮어쓴 듯 나무들로 온통 치장을 하고 있어 부드러워 보인다.
세종 때 쓰시마를 정벌한 이종무가 승리 후 여기저기 숨어있는 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더니 저 많은 섬들에 숨어들면 찾기가 힘들었겠구나 싶다.
부산이 어느 방향일까 물으며 눈을 거둔다.
다시 좁고 굽은 길을 조심스레 차는 간다. 달린다기 보다는 간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주 안전하게... 교행할 수 없는 길에서는 서로 양보하면서 차분히 간다.
-와타즈미 신사
내가 제일 보고싶었던 와타즈미 신사로 가는 길에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해신 풍옥희의 무덤을 본다. 설명이 없어도 우리 당산목 같은 거목과 새끼에 끼워진 종이가 우리의 서낭당을 생각하게 한다. 형형색색의 천조각이 흰 종이로 치환됐을 뿐....
신사 앞 도리이를 지나기 전 신사 본전 앞의 또 다른 한그루의 소나무는 그 뿌리와 줄기가 꼭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다만 입에 물 여의주가 없을 뿐, 그 여의주는 하루에 한 번, 태양이 지나갈 때 용의 입에 물려서 여의주가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가이드의 조크가 기억이 남는다.
이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 입구 좌우에 고려견(高麗犬:고마이누)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의 해태를 닮아 이 역시 우리의 문화가 도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암수의 상징인 생식기를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으로 수컷은 입을 벌리고,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린 상은 ‘아(阿)’상, 다문 것은 ‘홈’이라 하는데 산트크리스트어에서 아는 입을 벌리는 최초의 음성이고 홈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이라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고 한다.
서기530년 일본의 안무천왕 재위 시 거래가 잦았던 백제에서 사냥개를 수입해 갔다는 설과 일본 사서인 『속 일본기』에 732년 신라사신 김장손이 성무천왕에게 개 한 마리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2년(1438년)에 대마도에 큰 개 한 마리를 하사했다, 문종 때 일본의 청에 의해 개 두 마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개가 아닌가 싶다. 이 개가 오늘날 일본에서 자랑하는 ‘재패니스 찡’이라 하니 도래인과 함께 일본은 한반도와 함께 해온 민족임을 알 수 있겠다.
모래 둔덕을 만들어 차양을 해 둔 스모장은 이곳이 스모의 본고장임을 상징한다는 자료가 생각났다. 스모를 시작할 때 발을 탕탕 치는 것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신호라고 한 정보와 와타즈미의 와타가 우리말 바다가 변형된 낱말이란 것도 어렴풋 떠오른다.
신사에 들기 전 손과 입을 헹군다는 음수대의 돌도 특별한 모습이었고
바다에 발을 담구고 선 도리이가 일본본토가 아닌 서쪽으로 서 있는 유일한 신사라는 것에 애착이 갔다.
바다에 세 개, 육지에 두 개인 도리이는 우리 솟대의 변형이며
고대 신라 서라벌을 향해 있다 해서 우리 선조들의 향수가 서려있는 듯해 애틋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보았다.
섬 어디를 가도 보이지 않던 소나무가 신사 주변에 도열해 있는 것이, 우리와의 뗄 수 없는 인연을 보여주는 듯 해서 뒷걸음으로 걸으며 조금 더 눈에 담아 둔다.
첫째 날의 일정이 대충 접혀질 즈음, 여정의 하루를 닦기 위해 일행들은 해수탕으로 향하고 김무영 씨와 홍동곤 국장(전 음악협회 )을 대동 수퍼마켓으로 오늘 걸출한 밤을 위해 장을 보러 간다. 수퍼마켓은 생각보다 크다.
해산물의 값이 유난히 싸긴 한데, 아침에 여객터미널로 가는 택시안에서 일본의 개불우럭에 세슘인가 하는 방사능 물질이 허용치의 280배가 검출되어 그것만으로도 방사능 중독에 이른다는 뉴스가 자꾸만 생각나서 망설이자 무영씨는 많이 사라사라 채근하고....
결국 히라스 회와 아사히 맥주를 사고, 홍국장님은 선물용 단무지를 무지 많이 사고, 무영 씨는 씨종자가 될 고구마를 사고,
다시 약국에 가서 파스 등 몇 가지 약을 사는데, 문맹이 따로 없다.
통하였느냐고? 통하지 못하여 결국 원하는 것을 사지 못하고 버스를 향해 종종걸음,
때 빼고 광 낸 일행과 함께 해물 바비큐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간다.
-만제키 다리
해넘이로 역광의 빛이 내린 만제키 다리는 대마도를 두개의 섬으로 가른 운하 위에 붉은 모습으로 있다.
그 다리 아래 바다 위로 갈매기가 유유한데 우리들의 머리 위로 부리가 굽고 예리한 매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활강을 하고 있다. 어느 것은 매의 눈이라는데 저 새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큰 나래를 펼친 모습이 장관이다. 이 지역이 먹이가 풍부한지 매가 많이 보인다고 한다.
멀리 러 일 전쟁 때 발틱함대를 관통시킨 운하를 보며 근처의 양어장에서 활어들을 구경했다. 크고 둥근 수조에 전복, 복어, 갑오징어, 해삼, 아나고, 꼼장어 등 그 크기가 엄청나다. 그러나 비린내 하나 나지 않고 주변에는 그 흔한 횟집 하나 보이지 않는다. 흥청하고 밝고 시끌한 우리의 것에 비에 이들의 문화가 꼭 좋고 바람직한 것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지만 아무튼 청결하고 기분이 괜찮다.
차를 달려 이즈하라를 간다. 호텔에 닿기까지 도무지 길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인구 삼만정도의 한적하고 외진 곳이지만 이리도 사람의 모습이 없다는 건 이 섬이 늙어 가고 있다는 것과 갈수록 줄어드는 인구 때문인가 싶다.
차창 밖에는 오로지 키 큰 나무들과 대나무의 도열만 있을 뿐 논도 밭도 보이지 않는다.
곁에 앉은 김무영 시인은 아마도 이들이 게을러서 개간을 하지 않은 것 같다며 거제 섬사람 농군의 눈으로 가늠하면서 어쩌다 손바닥 만한 밭에 겨울을 견디는배추가 보이면 밭농사가 될텐데 하며 창밖을 연신 내다 본다.
이 척박한 땅에서 먹을 것이 변변하지 않아 그리도 한반도로 와 약탈과 노략질을 했던 게지 싶다.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한반도, 해류때문에 가기 어려웠던 자기네 땅보다 쉽게 갈 수 있었던 조선 땅, 그래서 진짜 먹을 것이 없을 때 목숨 걸고 갔던 땅 - 한반도가 그 땐 아마도 꿈의 땅, 풍요가 있는 땅이었을 테다.
그리고 이즈하라의 그 밤, 일러 무삼하리오
귤중지락橘中之樂 - 추사는 "귤 속에서 두는 바둑돌 소리, 학처럼 가벼운 꿈을 꾼다'며 바둑의 재미를 시로 읊었다지만(추사의 詠棋)
좁은 방에서의 우리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고딴 즐거움에 비기오리이까.
좁은 다다미방에서 우리의 그 즐거움은 가상00, 노래자랑, 왁짜지껄 껄 껄 껄,
조용하고 고요한 일본 땅에서 안 쫓겨 난 게 이상한 밤이었다.
이미 천성수 선생님이 등 뒤로 돌아간 배꼽과
정정희 국장의 잃어버린 배꼽으로 대충 정리된 바
누구는 너무 웃어 광대뼈가 한 뼘쯤 돌출되어 다음날 꾹꾹 눌러 넣었다는 후문
그 밤, 다다미 방에서 소금을 열서 말 구운 이야기
김대환 선생님의 문석경 선생님 부부 방 습격 이야기
문석경 선생님, 난방기를 에어콘인줄 알고 끄고 주무시며 떨었다는 후문 등은 잠시 두고
박달수 고문님, 그 열정 존경합니다.
임종찬 교수님, 분위기를 위한 그 추임새 닮고 싶습니다.
김재원, 이정자, 김영달 님, 모두모두 하나되어 분위기에 빠지신 거 고맙습니다.
김덕남 선생님, 단정하면서도 풀어져 함께 하시는 모습,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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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기행기 1부 여기서 그만 씁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그래도 창밖 바다는 너무너무 아름답습디다.
미迷어른이 될 뻔한 무영 씨, 홍동곤 국장님과 단 둘이 이즈하라 한 복판에 떨어져 그 행적이 수상쩍은 정 국장 이야기, 우산 속의 그 하루,
자분자분 비 내리던 이즈하라의 다음 날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첫댓글 알뜰살뜰 살림 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긴 글 2부를 기대 합니다.
문산이여 영원하라 국제여객터미널에 십 육인의 일 없는 애국자만 모였다. 문산 회장님께서 배웅 차 오셨다. 이쯤에서 “제비뽑기” 이것은 단순 멀미 방지용 스티커 같은 것이다. 배 멀미를 할 때는 음극과 양극이 만나면 멀리를 안 한다는 이유가 있어서 제비뽑기먼저 시작했다.라지는 그런 메뉴판이다.
1번부터 8번까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문산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번여행에도 여지없이 맞아 떨어졌다. 뭐 맘에 들고 안 들고 상관없이 멀미 방지용이니까 배만 내리면 또 상황이
하나 하나 빠트리지 않고 참 재미있게 쓰셨습니다. 다시 한 번 대마도 둘러보고 공부하는 기분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말라선생님, 화이팅!!!
한 곳씩 짚어가며 정리해 주셔서 저에게는 다녀온 곳에 대한 도움이 되어 좋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