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농사에 물은 중요했다. 조선왕조의 농업이 수전농법으로 전환되면서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우리 조상은 일찍부터 저수지를 제(堤)라 하고, 보를 언(堰)이라하여 언제나 물을 준비하고 이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산지방에서도 예전부터 제언(堤堰)과 교량이 많이 건설되었다. 예산현에 있던 저수지로는 엄하제·원통제·종경제·성화제·판교제·저지제·파교제·유등제·왕자지·무가산제·일흥제·전죽제·아지제·오리제·장승제 등이 있었다. 보(堡)로는 국사당보·좌이천보·돌천보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덕산현의 저수지로는 성동제·저지제·국지제·저동제·판교제·성방제·탄전제·저정제가 있다.
예산현 지역에는 역천교˙·종경교·석교가 있었는데 예산에서 덕산으로 왕래하는 곳에 설치되었고, 덕산현에는 삽교와 현화교가 있다. 삽교옆에는 교량중수비가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덕산의 불교신자와 유림과 평민이 힘을 모아 다리를 건립하는 데 시주하여 다리를 중수했다고 한다. 대흥현에는 내천교·석교·거변교로 불리우는 달천석교와 금막천교·광시교가 있었다.
수해와 한해등 각종 자연재해는 조선왕조의 농업기반을 흔들었고, 이런 현상은 농민이 이농하는 사회문제로 파급되었고, 중앙정부는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전국적인 진휼책을 강구하였다. 대표적인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19년(1437) 3월에 충청도에 대기근이 들어서 기민의 수가 70만에 이르러서 전라도에서 구휼미 5만석을 옮겨 구휼하였다.
이후 세종 27년(1445)에 충청도지방의 2500호에 의창미 8,000여석을 분급하였고, 세조 10년(1464)에도 충청도에 기근이 들어 이듬해 대규모 구황을 하였다.
이외에 성종 17년(1486)·명종 3년(1548)·선조 3년(1570)에 기근이 들어 진휼책을 실시했다. 또 수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을 보면, 명종 2년 (1547) 6월 장마가 대단하여 금강물이 범람했다. 이런 자연재해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진휼을 실시했다. 세조 2년(1456)에 군자곡 5,000석 등을 충청도와 경상도에 내렸고, 성종원년(1469)에 군자곡중에서 충청도에 8,300석을 대출했다. 중종 19년(1524)에는 진휼사를 호조판서가 겸하도록 했다가 별도의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고 진휼을 위한 곡식을 광흥창·풍저창에 보관하였다.
한편 세종이래 독립관청으로 운영하던 상평청(常平廳)은 진휼청과 청사를 같이 사용하고 관원도 두 관청의 일을 겸하게 하여 양 관청은 동체이명(同體異名)의 관부로 되어 평상시에는 상평청의 이름으로 물가의 조절을 담당하였고, 재해가 드는 해에는 진휼청의 이름으로 관곡의 대부와 빈민의 구조사업을 전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堤堰, 洑등을 막아서 항시 농업용 물을 비축했다. 땅에 씨앗을 파종한 후 수분과 물이 부족하면 식물이 말라 죽는다. 농작물 수확량도 기대치 이하이다. 하늘에서 알아서 단비를 내려주면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마음이 편한 세상이다. 천지조화 이치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농업용 물이 부족하면 이웃 간에 물고 시비로 상대방과 싸움을 했다. 사람들은 옛적부터 물이 있는 곳이라면 재물을 모아 보를 쌓았다. 조선 후기 예산은 물의 확보를 둘러싸고 마을간 무한천과 삽교천에서 洑분쟁이 심했다.
보는 계곡이나 천을 막아 물을 저장하는 일종의 담수시설로 예산현 오가면에는 국사당보(國賜塘洑)라는 수리시설이 존재했다.
약 2,100만평의 몽리구역을 가지고 있던 국사당보의 유래는 현재 오가면의 주민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설화인 '노씨부인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노씨부인 설화는 18세기를 전후한 시기 예산현 오가면에 거주하던 광산김씨 김만진과 그의 부인인 광주노씨가 무한천에 국사당보를 만들어 예산군민에게 많은 농업생산력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794년(정조2) 충남 예산군 오가면 노계리(오촌리) 시대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예산의 설화』 집에 실려있고, 1999년 예산문화원에서 '광주 노씨와 국사당보' 설화집을 발간했다. 광주노씨는 국사당보 설화의 중심인물로, 예산군 오가면 신장리에 국사당보를 건립하여 조선시대 蒙利구역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하여 논농사 수확량증대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녀의 노력은 예산지역 일부 마을의 경제적 번영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한 공과를 예산현 마을주민들은 추모하는 사당을 오가면 신장리에 건립하고 신으로 받아드렸다.
1758년 봄 예산지역에 대가뭄이 발생했고, 가을에 한해로 인하여 오가평야지역 농민은 농사에 타격을 받았다. 그해 6월 1일 예산현감 韓警이 신장1리 마을 중심부 지장말 국사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759년 오가면 분천리 ‘광장제’(광쟁이 방죽)를 놓고 수년간 예산현과 덕산현 사이 보洑 수리분쟁이 있었다. 동일 하천에 洑를 잇달아 수축하면 물수량이 부족하여 분쟁이 일어났었다. 조선후기에 덕산현(삽교읍 성리, 하포리)사람과 예산현 주민들간의 수리분쟁이 심했던 ‘새보’는 성리천에 있었으나 하천정비로 사라졌다.
국사당보는 1785년(정조 9)에 정조가 예산현의 백성을 위해 하사한 보이다. 그전까지 국사당보의 한자표기는 ‘國寺’또는 ‘國祀’였으나, 나라가 내려준 보라는 뜻에서 '국사(國賜)'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고, 이때부터 나라가 백성을 위해 보를 내려주었다는 의미에서 ‘國賜’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정조 2년 1794년 예산군 오가면 노계리(오촌리) 마을에 국사당보에 얽힌 ‘金萬珍’과 ‘廣州老氏부인’ 설화가 있다. 예산현 오가면 광산김씨(28세손) ‘김만진’과 그의 처 ‘광주노씨’가 국사당보를 처음으로 축조했다는 설화와 제사를 지냈던 ‘노씨부인사당’과 ‘노씨부인의 묘’가 있었다. 노씨부인은 국사당보를 만들어 식량의 곡창지대인 오가평야에 농업용 수로를 만들어 원리뜰을 옥토로 바꾸는 등 농업생산력에 증대에 기여했고, 국사당보는 조선후기 충청도의 최대 규모로 예산지역 최대 수리시설이자 농업기술의 정수 와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는 시설이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시대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암행어사, 관찰사, 군수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오가초등학교 앞 도로변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暗行御史洪公徹周永世不忘碑는 1866년(고종 3) 공충도(公忠道) 암행어사로 파견된 洪徹周를 기린 비다. 1867년 4월 건립하였다.
暗行御史 洪公徹周永世不忘碑
上體國賜 / 성상의 용모로 나라에서 하사하시고
下念民命 / 아랫사람 생각하시어 백성들에게 명하였도다.
一糖還舊 / 한 번에 보를 옛날 것으로 복귀하였으니
千襁歸正 / 이는 천 번 엉킨 실 줄이 바르게 돌아온 것이로다.
年季春水 / 새해 봄 끝에 농사 물은
公擇不褐 / 그대의 공적으로 마르지 않고 가득하다.
字字藥石 / 글자를 갖추어 즐겁게 비석을 새기노니
輿頌勿智 / 베푼 성덕을 칭송하고 잊지 말지어다.
1866년(고종 3) 조정에서는 탐학행위가 극악해진 지방의 奸吏, 토호의 특별히 廉察, 懲治하기 위하여 경기, 경상, 전라, 公忠道에 암해어사를 일제히 파견하였다. 파견된 암행어사 홍철주는 武斷 토호를 파악, 죄를 주고 수령 중 선치한 자와 실정한 자를 파악하여 보고하였다. 오가면 신장리 주민들이 국사봉 기슭을 지나는 수로를 트집을 잡아 주민 간 분규가 크게 발생을 했다. 오가 역말 일흥역을 지나던 암행어사 홍철주가 수로문제를 잘 해결을 했다.
1856년(철종7) 양장원이 서울에 거주하는 이판서택과 결탁하여 국사당보의 권리권을 가져가자 1867년(고종4) 충청남도 암행어사 홍철주가 정조 연간의 고사를 근거로 국사당보의 권리를 예산군민에게 되돌려 주었다.
오가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국사보와 관련한 공적비는 1936년 건립했다. 국사당보계 이사 오시영, 국사보감시 현남규, 국사보계장 권영섭 기념비이다. 그중 1936년 5월 건립한 수리계이사 오시영 기념비 비문내용을 소개한다.
國賜糖洑修利稧理事 吳公始泳紀念碑
掌理洑事 / 보 일을 관장하여 잘 처리하였고
事無不匡 / 일에 빈틈없고 어그러지지 않았네.
賦課輕減 / 부과되는 세금을 경감시켜주었고
赴役公平 / 부역은 공평하게 하였네.
積幣消盡 / 누적된 폐단을 없애 사라지게 하였고
夢裏增旺 / 몽리지역은 더욱 늘어났네.
損己益衆 / 자신은 손해지만 농민들은 이익이 되었으니
功德可頌 / 그대의 공덕을 가히 기리네.
국사당보계이사 오시영은 국사당보 수리계 이사로 활동하면서 매년 봄에 시행하는 ‘보막이’사업과 수로 관리사업 총괄하면서 성실히 수행하여 농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위 공적 비에서 예산은 농업을 중시하며 물을 모아두고 관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풍년을 위해 堤堰, 洑수리시설 등 물 관리 비중을 두고 최선을 다했던 기록이 문헌에 많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사당보계 조직을 결성하고 보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1946년 2월 예당수리조합의 주관으로 "예당호"공사를 재개하여 1964년 예당저수지 수리시설이 완공되고 국사당보의 기능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예당호"는 전국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데 일제가 농민수탈에 이용한 국사당보를 모체로 1962년에 착공하여 1964년 12월 31일 다시 축조한 최대 인공 농업용 저수지로, 예산군과 당진군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 한다고 하여 두 군의 앞 머리글자를 따서 예당저수지로 명명했다.
예당저수지는 전국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일제가 농민 수탈에 이용한 국사당보를 모체로 1964년 12월 31일 다시 축조한 인공저수지로 총면적이 329만 평에 달하며 예산군 신양.광시.대흥.응봉 등 4개면에 접해 있고, 만수위는 22.5m이고 둘레는 40km, 너비는 2km, 저수면적은 약 10.88㎢에 달하며, 저수량은 4천6백7만톤이며, 홍수조절을 위해 만든 길이 313m, 높이 13.3m의 뚝과 26개의 수문도 볼거리다.
또한 대흥현의 실존인물인 의좋은 형제가 살았던 인심 좋고 산자수명한 이곳 예당저수지는 병풍처럼 둘러친 수려한 백제의 역사가 깃든 암존산성의 풍광이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마치 그 옛날 우아하고 섬세함으로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예술혼 인양 잔잔한 호반에 긴 여운을 남기며 장엄하게 타오르는 일출이 장관이다. 뿐만 아니라 수문과 무한천 하류엔 물고기가 많아 해마디 수천 마리의 백로떼가 날아들어 물과 숲과 백로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신천지를 이룬다..
※참고문헌
1. 『오가면지』
2. 『예산의 脈』-재단법인 오성장학회
3. 『노씨부인과 국사당보 고증연구 용역 결과물』-예산군,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4. 충남 여성문화사 총서Ⅱ, 충남 여성의 삶과 발자취/역사에 남긴 유산 중 『광주노씨와 국사당보』- 박범(건양대학교연수교수)
첫댓글 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탐방하고 자료를 공유하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