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한 기분이야
영화 <3 Days to Kill(2014)>에서 비밀요원 에단 러너(케빈 코스트너 분)은 뇌종양 판정을 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하고 일을 정리하려 한다. 그는 고등학생 딸에게 보라색 자전거를 사주고 타고 다니라며 고집을 부린다. 결국 싫다는 딸의 학교 앞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서 듣게 되는 한마디. "아빠가 자전거 타는 거, 안 가르쳐 줬잖아요!" 종양보다 더 아픈 딸의 외침이 아빠의 가슴을 때린다.
영화를 보면서 남편에게 한 마디 던졌다. "이런 거였어? 딸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것이." 남편은 고개를 끄떡이며 웃는다. 결국 영화 속 아빠는 다 큰 딸에게 사과하고 자전거를 가르쳐준다. 늙고 병든 아빠가 다 큰 딸의 자전거 뒤를 붙잡아준다. 보라색 자전거가 햇살에 반사되어 빛난다. 나도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도 11살 때 나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셨다. 길쭉한 꽃무늬 의자가 있는 하늘색 자전거였다. 변두리 우리 동네에서 보기 힘든 멋쟁이 자전거와 비밀요원 주인공처럼 그리운 아빠다.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네 명의 딸들 중에서 늘 밖으로 돌아다니는 아들 같은 나에게만 자전거를 가르쳐 주셨다. 하루 만에 자전거를 잘 타게 되었다.
팔 다리에 넘어진 상처가 훈장처럼 남았다. 나는 매일 자전거로 동네를 벗어나 작은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빠가 그리울 때에는 자전거를 처음 타던 날을 생각했다. 자전거 뒤를 잡고 격려하던 아빠의 음성이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내 빰을 바람처럼 어루만졌다.
남편은 늘 곁에 있는 아빠였어도 두 딸과 오손도손 놀아주는 때가 별로 없었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일은 종종 있지만 여느 아빠들처럼 어린 딸들과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 남편이 2008년에 <Treasure Hunt>라 이름 붙인 미국 여행을 준비했다. 온 가족이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며 낯선 땅에서 미래의 보물을 찾는 여행이다.
그 해 봄부터 큰 딸에게 자전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딸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것은 아빠의 특권이다.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시간이다. 남편은 여행 후에 딸아이와 자전거 타기에 대한 글을 썼다. 전문을 여기 올린다. 아빠와 딸이 함께 떠난 보물찾기여행의 성공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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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성취했다. 이번 보물찾기의 욕심 가운데 하나 요세미티에서 자전거 타기. 특히 첫 딸 햇님에게 자전거를 태워주려고 요세미티를 찾았다. 2001년 받은 감동 때문에 다시 찾았고 나의 가족들에게도 선사하고 싶었던 것. 두 바퀴 자전거의 숙명. 달리지 않으면 쓰러진다. 달리는 자전거만이 Maximum Freedom을 누린다.
6학년인 햇님이는 자전거를 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있었다 해도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앞사람이 끌어주는 자전거를 즐겼을 뿐이다. 한강고수부지에서.
요세미티 자전거 모험을 맘에 두었다. 4월26일 자전거를 사 주기에 앞서 자전거 타기 연습에 돌입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린이용 자전거를 밀어주고 세워주고 당겨주기를 10여 차례. 햇님이는 스스로 욕심이 난 듯 승부를 내려고 핸들을 놓지 않았다. 그러기를 30여분. 스스로 넘어지지 않고 10미터, 20미터, 100여 미터를 가더니 이제는 주차장 한 바퀴를 돈다.
아빠는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갈 테니 계속 연습하고 와라.” 이후로 자전거를 혼자 즐기게 된 햇님에게 5월1일 어린이날 선물로 성인용 자전거를 새로 사 주었다. 연습용 자전거는 보조바퀴를 달고 7살 동생 샛별에게로 넘어갔다.
이제 7월2일 두 바퀴 자전거를 타고 요세미티 빌리지 일주에 나선다. 아침 9시 헬멧을 착용하고 자전거 높이를 조절한 후에 시동을 걸었다. 요세미티의 Air 요정의 노래가 귓가를 스치고 빛나는 태양이 길을 인도한다. ‘소원 성취’ 하나님의 축복을 또 한 차례 만끽하는 시간이다. 햇님이와 아내가 각각 1대, 나는 샛별용으로 뒷바퀴에 별도 좌석이 달린 트레일러 바이크를 빌렸다. 샛별이는 이 트레일러를 '신데렐라 공주님 마차'라고 불렀다.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일곱 살 샛별이는 공주님 마차를 타고 싶어 했다. 하루 임대 합하여 91달러. 자전거 1대/일 대여 비용은 24.5 달러이다.
이제 페달을 밟아 해피 아일(행복한 길)을 달려간다. 아니 행복한 통로가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잠시 흙길도 밟고, 약간의 언덕도 지나고, 데스밸리를 지나면서 경험한 DIP(어울렁 더울렁 길)도 하늘을 날듯이 넘는다. 내가 멈춰 서면 뒤에서 부딪치고 넘어지고. 몇 번 겪더니 자연스럽게 거리를 유지하고 4인조가 함께 수월하게 운륜한다. 해피 아일에서 자전거를 던지듯이 옆길에 세우고 베르날 폭포에서 내려오는 계곡에 발을 담갔다. 사촌식구들까지 데려온 듯 히스패닉 가족이 놀고 있었고 우리도 함께 어울렸다. 페달로 달구어진 발을 빼 차가운 계곡물에 담갔다가 이내 다시 페달로 발을 옮긴다.
세콰이어 그늘 아래, 차가 없는 요세미티 거리를 질주한다. 샛별공주님을 마차에 태우고 지나려니 눈물이 나온다. 너무 아름답고 행복하다. 어떻게 아름답냐고? 얼마만큼 행복하냐고? 이 때 여행의 달인이 대답해 주었다. “요세미티에서 자전거 타 봤어요? 자전거 타면서 회색 곰하고 놀아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엉뚱하고 무책임한 답변이라고 하겠지만 어찌 하랴.
눈에 들어오는 태양광선. 귓가를 스치는 요세미티의 Creek의 선율. 가족이 함께 하는 가슴 벅참. 가슴을 파고드는 청명한 숨결. 선글라스에 마주쳐오는 자전거 타는 요세미티 빌리지 피플의 미소, 눈인사. 어디 멀리서 온 손님이 신기해 하는구나하며 모른 척 지나가는 회색 곰. 요세미티 영상을 담고 고요히 흐르는 머시드강 물결. 태양햇살을 구김 없이 반사하는 메도우의 이름 모를 풀과 야생화들. 그리고 떨어지는 폭포의 베이스 사운드. 하늘의 예술을 어찌 글로 담을 수 있겠으며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오햇님, 메도우에 자전거를 세우며 하는 일 평,
“와! 나 세계일주한 기분이에요!”
그래, 요세미티 빌리지 한 바퀴 도는 것이 세계를 돈 것과 진배없어. 와우~
첫댓글 멋집니다! 오집사님의 글이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되는군요?
그렇게 되네요. ^^~ 책에 적절하게 얹어보려구 해요.
집사님의 글은 언제나 생동감을 주고, 생생합니다~ 나중에 좋은 책 기대합니다^^
여행의 풍성함을 이렇게 착하게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걸요. 응원합니다. 보는 이가 저절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