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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조양각(朝陽閣)의 역사와 삼남의진비(三南義陣碑 大將 鄭公 兩世 殉國紀念) 그리고 와계정(瓦溪亭)이 있다,
영천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17.1369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부사 이용(李容) 그리고 영천유림들이 힘을 합쳐서 건립한 영천의 대표적인 樓로 우리나라 누각으로 손꼽히는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등과 영남의 3樓 라고 불리며,또 안동의 영호루,울산 태화루,양산 쌍벽루,김천 연자루와 합쳐서 영남의 7樓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조양각 樓 벽에는 영천의 대표적인 인물인 포은선생을 비롯하여,수 많은 명현들이 영천 조양각을 거쳐 갔으며, 그들이 지은 詩가 63편, 기문15편을 목판으로 편액 되어 樓벽에 걸려있다,
이 조양각은 조선시대 때에 부산에서 한양에 까지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점으로 이용했고,마상연(馬上宴)등 크고 작은 행사를 벌이기도 했던 장소 로써, 위에서 말하듯 고려 공민왕 때 최초로 창건했고,조양각의 명원루(明遠樓)라는 당호는 당나라 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詩文 중에 원목증쌍명(遠目增雙明)= 훤희 트인 먼곳에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 조차 더욱 밝아오는듯 하다,,,라는 구절을 따온 것이라 한다,
그 후 조양각은 1482년 군수 신윤종(郡守 申允宗)이 동서별실(東西別室)을 고처 동실은 청량당,서실은 쌍청당 이라 했고,1485년에 명원루를 중수하고 포주와 구영(包廚,九盈)은 별도로 지었던 것을, 조선 선조임금 임진년에 임진란 때에 소실됬다가 1638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서 조양각 이라 했다,
이를 1676년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했고,1702년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했었고, 1742년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중창하고 누각을 서세루(瑞世樓), 내문을 남덕문,외문을 곤구문(昆邱門) 이라 불렸고, 1762년 군수 조재득(趙載得)이 중수,1804년 군수 이의교(李義敎) 때에 외문인 곤구문이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 10월에 중건하여 래의루(來儀樓)라 했다,
그 후에도 1870년과 1886년에도 각각 중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7년 한말의 의병장 오천 東엄 鄭煥直 장군께서 조양각에서 왜놈헌병에게 사형 된 자리 이기도 하였다,(鄭將軍)이야기는 아래 비석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고,,, 또 일제 강정기인 1921년 가을에 군수 장윤규(張潤圭)가 수선 하면서 오랜 역사를 지탱하다가 왜놈들이 조양심상소 학교를 건립하며, 누각의 내의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모두 철거해 버렸던 것을 8.15 해방 후인 1947년도와 1983년도에 군수 최효경,군수 박돈양, 시장 마용수가 중수 했었고, 최근 2006년도 손이목 시장 때 초석 일부 교체 작업과 室 방의 창호벽을 복원,서까래 교체,단청등 전면 해체 하고 수리 중수하여 현재에 영천 조양각 樓에 이른 것입니다,
위의 현판은 조양각,아래 현판은 강쪽에서 바라보이는 서세루,,,
명원루의 측면도 바라보고,,,
포은 선생의 시문으로 부터,부사 이용,금계 황준량,노계 박인노,의 시문 등등도 걸려있다,
*영천 조양각 樓 바로 앞에 세워진, 오천 정공(烏川鄭公) 산남의병 대장 정환직(鄭煥直)과 아들 정용기(鄭鏞基) 대장의 산남의진 비가 세워져 있다,
*정환직(鄭煥直,형양공26세손.1844~1907년)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초휘는 치우(致右)요,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바윗집 엄.자),본관은 오천정(烏川鄭)씨로 임진왜란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鄭世雅)의 12대손으로 1844년 영천 자양면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공의 관직은 고종24,1887년에 의금부의 도사,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고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로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1900년 도찰사가 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 하려다가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 되었다가 석방 되고는 관직을 버리기로 사수하나,다시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정용기(鄭鏞基1862~1907년)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로 동엄 정환직의 장남으로,영천 검단리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 부터 영특했고,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무엇 보다도 공은 孝를 으뜸으로 여기며 섬겼다,
*한말의 동엄,단오 장군 부자분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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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중추원의관이 된 정환직은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고종황제는 공을 불러 짐망(朕望) 이라는 밀지를 내리면서,고종은 공에게 말하기를,"화천의 물을 부탁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옛날 중국궁성에서 적국의 침범을 받고 유능한 신하가 왕과 옷을 바꿔 입고 목이 마르니 화천의 물을 떠오라 하고 이리하여 옷을 바꿔입고 물 심부름을 하려 간 왕은 피신을 하였고,신하는 대신해 잡혀 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궁내에는 친일파 관리들이 우걸우걸 거렸기에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종의 재치라 하겠다, 공은 임금의 뜻을 음미하며 사저로 돌아가 아들 용기(鏞基)를 불러서 밀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서 말하기를,"나라의 형세가 민족 존망이 이에 있다, 우리는 선조대대로 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는데,임난에도 호수 할아버님(鄭世雅)과 백암(鄭宜藩) 할아버님 형제분(鄭安藩.鄭守藩)들도 그러하시지를 안았느냐?, 나 또한 앉아서 나라의 망함을 보고서만 있겠는가? 죽음으로써 선조님이 주신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려고 하니,너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안을 잘 보살피도록 하여라!,"고 말씀을 하시니, 아들 정용기는
분연히 입을 열어 말씀을 올리거늘,"임금께서 신하에게 내린 명령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분부하는 이치가 같사오니 나라를 구함은 후에도 사가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한 줄 압니다,
이 일은 젊은 소자가 할 일이오니 바라옵건데, 大任을 소자에게 맡겨 주시오면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여 우리 일문을 보존 하겠습니다,"하고 아들 용기는 3일 동안 한결같이 간청하기에 선생은 자식이 나라위해 대의를 행하고자 하는데,小일을 걱정하며 만류할 이유가 없어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즉시 영남에 내려온 정용기는 그 뜻을 동의 하는 출중한 사람을 뽑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집결장소를 강원 오대산으로 정하여 무기와 곡미를 배정해 주고 진호를 산남의진 이라 정하여 광무10.1906년 3월에 각 지방 분대를 모두 북진하도록 전령하고,본진은 인근 고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의기를 북돋우면서 북진을 하려던 중에,간사한 무리가 있기 마련인가, 왜놈의 앞잡이인가, 어쨋든 이 때 경주 신참령으로 부터 부친이 서울서 체포되었다는 거짓 간교에 넘어가 정용기는 그만 체포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할 수 없이 중군장 이한구(李韓久)는 의진의 임시 해산을 통고하고 정용기(鄭鏞基) 장군은 부친 동엄선생의 보고로 고종은 그가 잡혔다는 소식에 칙령을 내려 곧 석방되어 5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난다,
옥사에서 풀려난 즉시 1907년 4월 정용기 장군은 산남의진의 긱발을 다시 높이 세워 군령을 선포하고,의병을 소집하여 북상 할 때는 왜놈들이 벌써 고을마다 분파소를 설치하여 수비대를 주둔해 두었기에 의병들이 북상하는 길은 험하고도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고,의병장군 정용기는 게릴라 전을 벌려,왜놈들의 수비대를 급습하여 무기를 노획하며 북진을 박차하였다,
전투를 벌이며 북상하던 정용기 장군은 어느날 저녁식사를 하던중에 척후가 보고 하기를 왜놈들이 청송으로 부터 입암에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장군은 긴급출동 명령을 광천에 복병 해 있는 이세기에게 내리고,명령을 전달받은 이세기의 의병들은 입암으로 달려가 보니,왜놈들이 과연 저녁을 준비하는 숫자가 얼마되지 않았기에 이세기의 분대 병력으로 공격하니,매복을 하고있던 적병들이 벌때처럼 솟아져나와 대응하니,조총소리가 하늘 천지를 요란스리 찌르고있었고, 이때 정용기 장군은 매현에서 보병분대를 파견하고 정보를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입암에서 포성이 요란한것을 듣고 군기가 누설됨을 짐작하고 행군을 독촉하여 입암으로 도착하니 밤의 삼경이 넘어 하늘엔 먹구름이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적들은 석벽을 의지하여 백색 의복을 분별하며 사격을 하고있었고, 장군은 전군을 독전해 용감히 싸웠으나,끝내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정용기(鄭鏞基)장군도 함께 장렬히 전사하니 이날이 1907년 음력9월1일 양력10월 입암에서 전개된 왜놈 헌병대와 영천수비대와의 전투 이었다,
*정환직(鄭煥直)대장의 활동과 조양각 마당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된 죽음,그리고 절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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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엄 정환직은 아들이 전사하기 전 1906년4월에 용기가 대구 옥사에서 풀려나고 가을에 잠시 고향 영천 검단리에 내려와 의진들의 활동을 도우며 무기와 군량미를 조달하면서 아들의 의진들과 내년5월에 강릉에서 산남의진을 만나 서울로 진격 할 것을 약속하고 1906년9월 초에 와 있었다, 1907년 5월에 강릉에서 약속한 일 때문에 먼저 도착했으나 아들과 언약한 5월도 지났지만 약속이 어긋나자,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올라오는 출전이라 지연된다는 보고를 접하고서,기다리다가 8월에 다급하게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 검단리로 도착하던 그때 그날 아들 용기는 고향 자향에서 왜놈과 싸우고 있었고,왜놈을 무찌른 용기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강릉 집결지에 지연되는 사연을 아뢰면서 눈물로써 사죄하고, 선생은 아들을 달래고 한자리에 앉아 동지들을 격려하며 다시 뒷일을 기약했다,
그날이 1907년8월24일 부자가 만나는 마지막의 날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를 못하고,닷새 후 아들 정용기장군이 입암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네가 나보다 먼저 죽었으니,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받쳤으니,장하다,,"그러나 누구와 이 일을 도모할꼬,,하시며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직접 산남의진의 깃발을 잡았다,
친일파 세력들의 앞장에 왜놈들의 난동에 힘없이 쓰러지려는 조선,이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64세의 늙은 몸으로 칼을 잡고 앞장선 모습을 보고 모두가 선생의 뒤를 따랐다,
선생은 적과 싸우고 싸우면서,9월24일 흥해를 쳐서 무찌르고,9월28일 신령에 주둔한 적을 쳐서 총기 400정을, 다음날 의흥을 쳐서 총기150정을 빼앗았고, 10월3일은 청송 말방에서 전투를 이기고, 10월12일 다시 흥해를 또 치고, 11월3일 영덕에 있던 왜놈을 공략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가는곳 마다 일본헌병을 잡거나 내쫓고, 분파소를 불태워 백성들을 위로 격려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의 대병력들이 청하,청송,기북의 3면으로 선생의 산남의진을 좁혀가며 표위하고 조총으로 진격해 오니 선생의 의진들은 부득이 병력을이끌고 동대산으로 들어갔다, 며칠 뒤 적정을 살피려고 하산하다가 일본헌병대에 포위되어 12월3일 청하에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왜놈 헌병들은 잡고보니 백발이 성성한 선생을 말에 태워 여러곳을 다니며, "너희들의 대장을 잡았으니, 모두 나와 항복하라,"고 외치고 다녔다,
산남의진 대장 동엄 鄭煥直은 영천으로 이송되고,또 대구로 이송되어,일본군 군법에 따라 종신형을 선고받고,1907년12월11일 다시 영천으로 이송되어,영천 조양각앞 천변에서 오경(五更)에 왜놈 헌병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907년 12월11일 오경 산남의진 동엄 鄭煥直 대장이 사형집행 될 당시 이 때 하늘에서도 노여움이 크서일까,,, 난데없는 광풍이 불어닥쳐서 조양각 지붕 기왔장이 날라 집행사격수 일본헌병의 머리를 쳐 즉사 시켯다고 한다,
이 또한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지않겠습니까,,,
산남의진 鄭대장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이 선생과 아들 정용기 장군 부자분의 충절을 기려서 조양각 樓앞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영천 산남의진 대장 鄭煥直 장군의 절명시===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하지 않으리
意重死猶經(의중사유경)..... 의리는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 대의의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무언좌오경)..... 뜻을 못전하고 임종이 다가왔네!
1907年12月11日 五更에 烏川 鄭煥直
*鄭煥直대장의 절명시를 살펴보면,,,내뜻이 망하여 죽으나 조선까지 통째로 다 받쳐 주겠느냐身亡心不變라고 했고,
*詩구절 말미에... 글자 그대로 풀이 한다면...무언좌오경.말도없이 가만히 앉아서 오경이 지나네.가 되지만,,,
*위의 선생의 활동과 업적을 살펴본다면,,,
왜놈헌병들께 잡혀서 감시를 당하니 나의 처지가 무언무경으로 앉아서 조선이 바라는 대의(大意)의 말을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도 못하고 1907년12월11일 五更(새벽3시~5시 사이) 사형집행될 시간을 말함,
*그래서 선생께서 無言坐五更 이라 했다, 그러니,,,나의 뜻도 못 전하고, 나의 후사 대의의 일을 부탁 못하고,가 되고요,
*오경은 죽는 시간이 다가왔다,임종이 다가왔다,의 뜻이 됩니다,
선생 부자분이 순국 하신 후에 선생의 고향마을 이름을 검단리에서 충효리로 바꿰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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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 분 의병장 정말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