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사인보드)1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당하여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 명랑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
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하였다.
낙안현청(낙안읍성)(순천시 낙안면 동내리)-1597년 8월9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군량과 전선확보
를 위해 순천과 가장 인접한 관아인 낙안현청(낙안읍성)에 입성한다.이순신은 옛 군관들을 모아 조선
수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군관들과 군사회의를 전개하였다.이순신을 환영하는 낙안의 남여노소
환영 인파가 멀리 2km 밖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낙안에 사는 모두가 나와 눈물을 흘리며 음식과
술을 내왔다.이순신 군대가 행군 중 많은 군관민을 만난 낙안읍성지역은 호남군민들의 나라를 걱정하
는 모습이 잘 나타난 곳이다.
구례 석주관-백의 종군길(7코스).지리산 둘레길 합류길-운조루-용호정-손인필비각(구례읍사무소)-
구례구역-압록오토캠핑장-가정마을-섬진강 기자마을-구례군청-구 옥과현청터(설산정공원)-석곡면
사무소(능파정터.석곡 강정마을)-창촌부유창-백의종군길(6코스)(순천팔마비.순천부읍성-남문터비)
-낙안읍성-벌교역-태백산맥 문학길-조양창터(고내마을)-박곡 양산원의집(박곡마을)-열선루(보성군청)
-율포.명교해수욕장-군영구미(군학마을)-정남진(전망대)-방촌유물전시관-회령포(회령진성)-노력도
천연학세트장-마량항-만덕호-가우도-마도진성-북일면사무소-이진성-땅끝희망공원-어란진항-우수영
관광지-명량대첩비-망해루-녹진관광지-진도타워-벽파항
조선수군 재건로 8경2
구례(장정과 병사를 모으다)-곡성(군관들과 수군재건을 논하다)-순천(무기와 화살을 구하다)-
보성(식량을 선적하다)-장흥(해산출전을 결의하다)-강진(해상기동추격전을 벌이다)-해남(아침
일찍부터 우수영 바다에서 명량대첩을 이루다)-진도(저녁 늦게까지 벽파진 바다에서 명량대첩을
이루다)
낙안읍성(사302호)(사인보드)3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삼한시대(마한).삼국시대(파지성)
고려말이후(낙안군)으로 성곽은 1397년(태조6년) 낙안출신 전라수군도절제사 양혜공 김빈길장군
이 흙으로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고 석성으로는 1626년(인조4년)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한 이후로 쌓았다.성곽은 장방형이며 길이1410m동.서.남에 문이 있고 4군데 치성이
있다.성안에는 90여 가구의 민가가 있으며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이곳은 198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총13점의 문화재(국가지정10.도지정3)가 있고 2011년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평지성의 하나로 읍성으로 불렀으며 백제 때는 波知城이라 불렀다.원래 관청건물로는
객사.빙허루.쌍청루.향교.아사.향사당.훈련청.사창.군기고.석교 등이 있었다.현재의 유적은 동헌
객사.임경업군수비각.중요민속가옥9동.노거수15주 등이 있다.
낙안읍성(사인보드)4
낙안팔경(사인보드)5
금강모종(금전산 금강암에서 들려오는 저녁종소리).백이청풍(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오봉명월(오봉산에서 떠오르는 밝고 둥근달).보람조하(제석산 허리에 피어오르는 아침안개)
옥산총죽(옥산에서 나는 곧은 신우대).원포귀범(산수앞 바다의 돛단배)
용추수석(용소의 맑은물과 깨끗한 돌맹이).안동화류(안동(내동)내의 꽃과 버들)
낙안읍지 효행편에 조선시대 이용화 라는 사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앓아
눕게 되자 밤낮으로 간호하며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병이 낫지 않자 하늘에 기도하고 자신의 살을 도려
내어 어머니에게 복용토록 했더니 금새 병이 씼은듯이 낳았다고 한다.그래서 이 두사람을 효자로 소개
하고 있다.
낙안의 인물로는 김주.김수.김빈길.배몽성.방덕룡.오착지.선정립.이관.라인영.안호영.안덕환.안규삼
정창하 등이 이고장을 빛내었다.
낙안읍성 동문(낙풍루)6
낙풍루(현판)7
낙안읍성(고인돌군)8
낙안읍성(우마차)9
오태석 명창생가(가야금체험장)10
오태석 명창생가11
임경업 장군비각12
이곳은 1628년(인조6년) 군수인 임경업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각과 그 안에 서 있는 비로
구성되어 있다.임경업(1594-1646)은 인조4년(1626년) 이곳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했다.
인조6년(1628년)3월 내직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정묘
병자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러므로 매년 정월보름이면 큰 제례가 이어지고 있다.
비각 앞면에는 전군수임장군비각 영건표적비 앞면 윗부분에는 차임장군비각판상운
(次林將軍碑閣板上韻)(1893년 신병우(愼炳佑).비각문관중건기(碑閣文官重建記)1952년 김상
언) 이라 새긴 두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24(1748년)에 비각을 세운 후 1893년.1952년 보
수를 했다.임장군이 낙안읍성을 떠나던 1628년(인조6년)에 세웠음을 알 수가 있다.
임경업장군은(본관-평택(平澤).시호-충민공(忠愍公).호-고송(孤松).자-영백(英伯)이고
태어난 곳은 충주 달천촌 이다.
군수임공경업선정비(郡守林公慶業善政碑)(문47호)13
앞쪽-전군수임장군경업비각 영건표적비(前郡守林將軍慶業碑閣 營建表蹟碑)14
동헌(홍살문)15
동헌(자전거 행렬)16
낙안읍성(민속의상)17
낙안읍성(관광용품)18
낙안읍성(유치원생)19
낙안음성 동헌문(낙민루)20
남원의 광한루.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1951년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84년 낙안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건립되었다.정면3칸.측면2칸의 2층 누각건물로 1층은 12개의 사각형 돌기둥을 세
워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2층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서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그리고
중앙에는 낙민고를 .천장은 연등천장.내부는 모로단청을 하였다.현판은 남계 신계우 전 승주군수가 썼다.
낙민루 앞 뜰에는 느티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나주부사가 각군을 순회할 때 아홉 번째로 들러 쉬며 머물
렀다고 하여 九停뜰 이라고도 한다.
동헌의 출입문(낙민루 현판)(남계 신계우 전 승주군수) 21
낙안읍성(동헌앞 수문장)22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서 감사.병사.수사.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서쪽은 관리.중앙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했다.지금의 동헌 사무당
은 1990년에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했다.동헌은 사무당이라고도 불리는데 使無
는 논어 안연편에 이르기를 지방수령이 송사까지 책임을 지고 있어 더러 백성의 피해가 많아 권력
을 남용하거나 백성들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낙안읍성 당호에 담고 있다.
낙안읍성 동헌(사무당)23
동헌에 끌려온 죄인24
동헌인 사무당(중앙-수령)25
동헌(사무당 현판)26
동헌의 부속건물(내아-내동헌 사랑채)27
동헌의 좌측에 위치한 이 건물은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 이라고도 한다.
평지에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놓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앞면7칸 측면2칸의 대청마루 방
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54.69평의 팔작지붕이 있으며 서쪽에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대청
마루를 기준으로 동쪽(우측)은 고을 수령이 일상적으로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책을 읽는
사랑채. 서쪽(좌측)은 안채 단 아래에는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내아 역시 1990년 동헌과
함께 옛기록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내동헌 사랑채28
동헌(선덕문)29
자료전시관30
자료전시관(임경업군수추모제)31
1594년(선조27년) 충청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자는 영백.호는 고송이다.1626년 5월에 낙안군수로 부임
하여 많은 선정을 베풀어 이에 대한 추모제를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
낸다.추모제는 임경업 군수의 비각에서 올려지며 초저녁부터 농악놀이
가 열리고 인근마을의 사람들도 많이 참석한다.특히 부녀자들은 가면이
나 변장을 하고 나와 흥을 돋우며 성대하게 제향을 올린다.
자료전시관-(효열보천록孝烈藵薦錄.투구.두장갑주.패랭이.백립.탕건.갓)32
자료전시관-(갓.정자관.유건.남바위.건.주거문화용품.생업용품.낙안읍성 조감도)33
자료전시관-(돌-제1주생일)34
예전 풍습에 의하면 먼저 아이가 태어나서 백일이 지나 돌이되기 전까지 배냇저고리를
입혔고 돌이 되면 돌빔으로 색동옷을 새로 지어 입혔다.이 때 남자는 복건.여자는 조바
위를 씌웠다.돌상에는 떡.쌀.붓.책.실.국수.엽전 등을 놓는데 실과 국수 돌 떡은 아이의
수명과 부귀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아이에게 물건을 집게하여 만일 책을 집으
면 나중 커서 학자가 되고 엽전을 집으면 부자가 되는 것으로 여겼다.
자료전시관-(혼례)35
혼례는 남자와 여자가 공식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가정을
형성하는 것을 축하하는 의식이다.신랑이 신부집에서 행하는 대례와 신부와 신랑이
신랑집에 와서 행하는 후례가 있다.시부모는 치마에 대추를 던져주며 부귀다남하라
고 덕담을 한다.혼례는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즉 의혼.납채.연길.납폐.대례.현구례
등으로 나누어진다.
자료전시관-(상례)36
상례는 주검을 처리하는 방법인 동시에 옆에서 주검을 지켜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가정의 결손을 점진적으로 메워주는 의식이다.만 2년이 지나면 죽은 사람은
하나의 신위로서 후손들로부터 제사로 받들어지는 대상이 되었다.상례의 과정은 초혼
발인.안장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초혼은 나간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과정이고 이 때
안깨어나면 사자밥을 차리고 시신을 수습하여 향물로 깨끗이 씻긴 다음 수의를 입히는
습렴의 과정을 거쳐 수의를 입혀 관에 옮긴다.그후 발인을 한다.분묘가 완성되면 성분제
우제.소상.대상의 순서를 거쳐 상례가 마무리된다.
자료전시관-(제례)37
제례는 원래 삶과 죽음의 세계.신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종교행위였다.
우리는 조상신앙을 가장 중요한 의례의 하나였다.예를 들면 고구려의 동맹.조선
시대 조상신앙은 유교식 제례로 남아있다.돌아가신 날을 기준으로 하여 밤에 지
내는 4대조상 제례인 忌祭祀.명절 또는 일정한 절기에 4대조상 범위하에 낮에
사당에서 올리는 茶禮.모든 조상을 1년에 한번씩 찾아가서 낮에 올리는 時享祭
특히 차례와 시향제는 축문이 없이 단헌으로 되어 있다.일반적으로 제례의 절차
는 신위가 내려오기를 청하는 강신.축문을 읽는 독축.제물을 잡수시게 하는 헌작
과 음향.그리고 조상을 모셔보내는 사신의 3단계이다.제물은 홍동백서.어동육서
등 격식에 따라 치러지는데 가가례라고 하여 집안마다 제물의 내용이나 진설방법
이 달라서 어느 정도 정형이라 하기는 어렵다.
낙안읍성(장승)38
낙안읍성(기미독립운동기념탑과 장승)39
낙안읍성(장승)40
자료관(동영상)41
(2018.09.28)
첫댓글 낙안 읍성을 30년 전 쯤 현작에 있을 때갔었고 그후 4-5년 전 초등동기회 관광영행 때 가서 나름대로 세세하게 둘러 보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여기 사진들을 보니 못보고 지나쳤던 것도 많았네
요즈음은 여행 다녀온 것 작성을 못하여 엄청나게 밀려 있다네...이제 작성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네...너무늦게 댓글을 넣었다네...요즈음은 어디든지 엄청난 변화가 있어서 새롭게 가볼 곳이 너무 많을걸세...
내 컴퓨터가 이상한지 여기도 마찬가지네
낙안읍성은 나도 3회 정도 갔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참 고즈적하야 보기 좋던데..
여기도 PC나 스마트폰 모두 사진이 잘 보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