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정씨는 영일인(迎日人)이다,윗대에 고려때 습명(襲明)이란 분은 고려의 인종(仁宗),의종(毅宗)을 섬겨 명신(名臣)이 되었고, 그 후 시중(侍中) 夢周는 大節을 세워 文忠이란 시호를 받고 文廟에 배향되었다,
문충의 후예인 예문관 검열 휘 광윤(光胤)은 청현직을 지냈으나 고관의 지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분이 운(雲)을 낳았는데 雲은 파평윤씨인 첨정 휘 회정(懷)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정미년(1547년)에 의인을 낳았다,
의인은 어려서 부터 영특하고 총명하여 놀이하며 놀 때에도 女子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祖母 鄭氏는 가정 규범이 본디 고상하였는데 의인을 특별히 사랑하면서 그 현숙함을 자주 감탄하였다, 계해년에 구군사건(具君思건)에게 출가하였는데, 구氏는 능성(陵城)의 명문이다, 구군의 아버지 휘 흡(洽)은 전주판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평산신씨이다,
의인은 예절과 공경을 실천하여 시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판관공이 세 고을을 역임했는데,맏며느리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따라갔으며 오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시부모의 환심을 샀다, 국 같은 음식을 장만해 드릴때에도 반드시 때에 따라 따스하거나 시원하게 하여 입에 맞도록 하였다,
임신년에 판관공이 세상을 떠나자 대부인이 가사를 의인에게 맡기고 어떤 일도 묻지 않았는데 의인이 조리 정연하게 다스렸으며 자제를 교육 시키는 일,일가 친척을 대우하는일,비복을 부리는 일에 있어서 모두 절도에 맞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들의 태만한 모습을 보면 곧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침식을 전폐하기 까지 하여 훈육을 하였다, 具君도 일찍이 학문에 노력하지 않았는데,의인의 권유에 힘입어 마침내 太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여공(女工)을 부지런히 하여 많은 재물을 비축해서 별서(別墅)를 짓고 양천강(楊川江) 어구에 어선(漁船)을 마련해 두어 구군이 그곳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군이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구인들 내조(內助)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나 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실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였는데,이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왜구가 가까이 다가오자 온 집안 사람이 피난갈 곳을 상의하였는데,의인은 江華와 충청도의 內浦로 가려고 하였으나,구군이 따르지 않아 마침내 영북(嶺北)으로 피난하였다,
그런데 의인이 길을 인도하여 주선하였으므로 겨우 완전할 수 있었고,亂이 길어지자 1년이 지나서야 강화로 옮겨갔는데, 그곳에는 병화가 미치지 않아서 고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에 의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일찍이 자녀들에게 교훈하기를 "男子는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고,女子는 행실을 독실히 하여 시부모를 잘 섬겨야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하였다,
항상 아버지를 일찍 여읜것을 애통해하면서 어머니 윤씨와 조모 정씨를 섬기는 데에 성의를 다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病을 앓은 지 한 달이 넘도록 낫지않자 어떤 사람이 거처를 옮기라고 권하니 의인이 말하기를 "시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먼저 드렸고,병이 심해져서야 부축을 받아 자리를 옮겼는데,이는 시어머니가 있는 곳에서 죽을까 염려해서였다,
을미년 봄에 시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해 여름에 의인이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는데, 그가 별세한 날은 바로 조모 정씨의 제삿날이었다,
숨이 끊어지려 할 적에도 제사를 지냈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기 까지 하였으니, 지극한 효순(孝順)을 남들이 따를 수 없었다,
의인 迎日鄭氏가 7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선(璿),호(王扈),찬(璨),율(王栗),진(璡)이고,2인은 일찍 죽었으며,딸은 안인(安金寅),송응순(宋應恂),황식(黃寔)에게 출가했다,
이어 다음과 같이 銘한다,
德은 내려주고 복은 주지 않았으니
하늘인가 사람인가 기필할 수 없는 것이던가
씨를 뿌렸으면 응당 수확할 것이 있는 법이니
자손에게 쌓인 복이 발복되리라
銘으로 撰하노니 아마도 틀림이 없으리,
平山後人 大提學 申欽 撰
첫댓글 이런 자료 어디서 발굴했읍니까? 원보님 대단 하십니다^^
항상 그렇지만 우연히 남의 집 문집을 보고 발견하여 올렸습니다,,
신흠선생의 문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