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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청년들이 안중근, 이상설, 김구도 모르더라
그곳에 가면 딩구는 돌멩이도 조상들의 독립전쟁을 노래하고 산과들의 풀과 나무들도 그 날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서로 증언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막연히 해방 이후 서로 다른 운명을 살게 된 남한의 한국인, 북한의 조선인 그리고 연변의 조선족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역사의 장이 일제의 강점기인 독립전쟁의 시기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북간도와 서간도를 공부하며 그리워하였다.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두 개의 노래는 나를 역사의 장으로 이끌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고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그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선구자를 부를 때 마다, 식민지 백성의 좌절과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이 해란강변에서 방황하며 고뇌하는 모습과 독립에의 열망을 품은 의기에 찬 젊은이들의 결연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름 모를 그분들에 대한 감사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 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서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망국 백성의 설움과 한이 사무친 장부들이 길을 찾아서 남몰래 두만강을 건너고 난 뒤, 소식이 없는 님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의 눈물과 한이 맺힌 노래는 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은 나로 하여금 북간도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책들을 통해서 만난 독립 운동가들의 삶과 더 깊이 조우하고 그들을 품어 주었던 강산에 대한 그리움 끝에 작심하고 용기를 내어 연변으로 왔다. 중국어를 배우는 한 편으로 독립운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를 길잡이 삼아서 연변지역의 항일전쟁과 투쟁의 장소들을 차례로 순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의 교사가 될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고국을 찾겠노라 맹세하고 독립전쟁에 산화된 영혼들과 조우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드 없이 단독 여행을 떠나기에는 나의 언어 능력이 너무 부족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출발된 ‘서전서숙’의 터가 있는 용정기행을 결정하고 동행할 사람을 찾았다.
놀랍게도 이 곳의 청년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장소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독립운동에 대하여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다고 하였다. 학교에서 중국 역사를 역사로 배웠으니 가외로 조선족의 역사를 배울 일이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어떤 연유로 조선을 떠나서 중국 땅으로 흘러 들어와 살게 되었는가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전혀 없었다. 어느 하루 지도를 펼쳐 놓고 항일전쟁이 있어났던 장소들을 짚으며 설명을 하였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생각이 정지되었다. 외모는 단군의 후손임에 분명하고 사용하는 언어는 세종대왕이 반포한 한글임에 분명하지만 역사에 대한 인식은 너무 달랐다. 동족이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눌 공통분모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 역사를 모른다 해도 상식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태두인 안중근 의사는 알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알지요?” “모르는데 누군가요?” “그럼 이상설 지사는 아세요? 그 분은 용정에서 신식학교를 처음 시작하신 분인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 분이 용정에서 신삭학교를 시작하신 분이라고요. 오늘 처음 들었어요. ” “그럼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선생은 모르나요?” “몰라요.” “그럼 서시를 쓴 윤동주라는 시인은 모르나요?”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요.”
청년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조선족 청년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 3대 또는 4대째 후예로서 벅찬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중국이라는 우산아래서 소수민족으로 외롭고 서럽기도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전쟁 위기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었고 대국인 중국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의 기대와 상상은 깨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일독립전쟁에서 차지하는 북간도와 서간도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순례 또한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용정은 나의 항일독립전쟁 순례 1번지다. 선구자의 노래로 유명한 용정은 1886년에 발견된 용두래 우물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족이주민들이 모여 집단촌을 형성하였다. 1906년에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에 의해 근대민족 교육의 산실인“서전서숙”이 세워졌으며 명동학교, 정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은진학교, 동흥학교, 명신여자학교, 성경학원 등등이 민족학교로서 자리를 잡아 항일 인재들을 양육하였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으로 3.13 만세 시위가 서전대야에서 일어났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패배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대량학살이 일어난 경신참변에 민족학교들이 불타고 강제로 문을 닫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이 세워져서 전 만주가 직접적인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기 전까지 연변의 민족학교들은 사회주의 영향아래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항일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지금은 그저 그런 변방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용정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새벽별처럼 빛이 나는 곳이다.
비록 이 땅의 청년들이 안중근, 이상설, 김구 선생님을 몰라도 뜻이 있으면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용정이 항일독립전쟁의 새벽 별이 되도록 서전서숙을 세워준 이상설 지사의 뜻이 묻힌 용정을 공부하면서 21세기, 평화 공존과 공생의 시대를 지혜롭게 열어갈 수 있는 우리 후손들이 되리라 믿는다.
2018.4.8.주일 아침 우담 초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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