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전파 초창기에 조선교회는 성탄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발췌
성탄절 하면 “탄일종”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리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 “저 들 밖에 한밤중에”가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신명난 성탄절 행사, 성탄의 무드에 젖어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금번에는 성탄 이브를 꼬박 지새우며 그 옛날 교우들의 집을 돌며 새벽 송을 불렀던 때처럼 밤 새도록 성탄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소리를 가만히 죽여서 노래를 부르니 충만한 기쁨과 감사가 반감 되었다. 교회에 가서 마음껏 부르기로 하였는데 웬걸 성탄절 예배 순서지에 성탄 찬송이 하나도 없었다. 복음성가에 나오는 “축복합니다”와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이라는 노래가 적혀 있었다. 예배시간에 성탄 찬양을 마음껏 부르고 싶었던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하여 울고 싶었다. 성탄예배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 아기 예수가 계시지 않고 교우들 간의 즐거운 교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속이 상하였다.
시대의 흐름인가? 아니면 이 교회만의 특수한 상황인가를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약에 아기 예수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교회 한 구석으로 밀려났거나 아예 교회 밖으로 밀려난 것이라면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일 터였다.
카톡으로 오는 성탄 카드 대부분이 산타 할아버지와 포인세티아,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아기 예수와 요셉과 마리아가 그려있는 카드는 10장에 1장 정도였다.
카드를 사러 다이소와 문방구에 갔는데 아기 예수 그림이 없어서 결국 포인세티아와 성탄 트리가 그려져 있는 카드를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음이 전해진 지 겨우 129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 교회가 벌써 본질을 망각하고 정체성을 상실한 것일까? 과연 한국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아더 노블의 아내로 1892년 조선에 도착한 매티 노블이 쓴 일기를 엮은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에서 초창기 크리스천들의 성탄절을 엿보며 위로와 힘을 받았다. 물론 초기에는 선교사가 주도하는 성탄절에 조선인들이 초청을 받아 참여하는 성탄절 행사였다.
아래는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79쪽에서 발췌하였다.
189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의 즐거움
생략 …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때 남은 팝콘과 사탕을 즐겨 먹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사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우리도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이웃의 조선 여인 스무 명을 초청하여 탁자엔 맛난 걸 가득 차려놓고 나눠 주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 요리사와 아더는 이웃들에게 (성탄) 메시지를 전했고 이웃들은 모두 다시 오겠다고 해다. 난 케익을 만들었고 아더는 팝콘을 만들어 여기 배치된 미군들에게 주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부인들은 각각 미군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매일 밤 미군들은 우리 선교 부지를 순찰하고 노래를 부르며 보초시간을 보낸다.
크리스마스 아침엔 조선인 방문객이 몇 있었다. 방문객을 대접한 후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했다. 저녁 후엔 애오개에 가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아더는 그의 방에서 몇 명의 남자들을 맞았고 난 내 방에서 9명의 여성과 10명의 소년을 맞았다. 모두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아이들도 한 무리가 왔다 갔다. 우린 생전 처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 탄생)이야기를 전했고, (경청하는)그들 가슴에는 큰 기쁨이 있었다.
내가 조선말로 말씀을 전하자 한 부인이 왜 미국인이 자기들과 같은 ‘어머니, 아버지, 언니’라는 단어를 쓰는지 어리둥절해했다. 부인은 내가 줄곧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가 하는 조선말을 다 알아들었고 다들 맞장구치며 질문했다. 내 곁에 앉아 있던 한 소년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다 배우고야 말겠다고 했다. 한 부인은 한나처럼 아이를 갖길 원했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예배 후에 이웃들은 내 드레스와 손을 만져보았다. 한 소년은 미국에 자기들 같은 아이들이 있는지, 자기들처럼 놀이를 하는지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며 미국 아이들은 조선 아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조선 아이들이 예수에 대해 듣지 못한 걸 너무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자 흡족해 하는 듯했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79,80쪽
1897년 1월 2일. 크리스마스 날의 풍경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왔다가 갔다. 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성들을 집으로 초대했고 30여 명의 부인들이 아기들과 함께 왔다. 우린 기도하고 찬송하고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각 사람에게 케익과 사탕과 삶은 밤을 대접했다.
크리스마스 때 아침에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조선인은 밑부분만 빼놓고는 장식을 달지 않은 나무 발치에 선물을 가득 쌓아두었다. 예배실은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들이)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촘촘히 바닥에 앉거나 뒤편에 서 있었다. 우리 작은 예배당에 2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더가 크리스마스 설교를 한 후 김창식 목사의 사모가 짤막히 이야기하고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바로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조용히 질서를 잘 지키더니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아침을 매우 즐기는 듯했다. 아더는 이제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 같다.
생략…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114, 115쪽
1905년 12월 26일. 즐거운 크리스마스
우린 아주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러나 고국에서 온 편지는 단 한 통, 자네트 오스본이 선물과 자기 사진을 동봉하여 부친 것 뿐이었다. 아이들은 산타가 양말을 채워주어 기뻐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제 동트기 전 눈을 떴다. 선교사들과 아이들이 보낸 선물이 오전 내내 왔고 10시에 조선인 예배에 갈 때까지 속속 도착했다. 교회엔 2,000명 웃도는 수가 있었다. 공연은 훌륭했고 교회는 아름답게 단장했지만 몰려들어온 구경꾼의 무리가 너무 웅성거리는 바람에 교회의 중간 좌석 뒷부분은 무대 소리가 파묻혔다. 부인 쪽 자리엔 가장자리와 뒤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문가에도 들어가지 못한 무리가 있었다. 공연은 저녁에 재연되었고 복음주의적 설교가 이루어졌다. 2천이 넘는 청중에게 ‘대단하다, 대단하다’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생략 …
여기 온 지 한 달 후, 나의 친지로부터 첫 번째 편지들을 받았다. 현지 속엔 내 자매 툴라와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있었다. 3주도 안 되는 기간에 둘 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난 아빠와 툴라가 이 땅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집에 있었음이 너무 감사했다. 조선인의 위로가 매우 위안이 되었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223, 224쪽
1907년. 크리스마스
올해 교회의 크리스마스 단장은 무대 앞에 세운 큰 아치로 했다. 아치엔 알록달록한 종이꽃을 붙였고 남녀 분리막 위아래에도 종이꽃을 붙였다. 강대상 양쪽엔 소나무로 꾸몄다.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은 순전히 조선인들이 진행한 것이며 근사한 프로그램이었다.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찬송 “기쁘다 구주오셨네”- 성도들
2. 기도 – 베커(A. L. Becker) 씨
3. 성경 봉독 – 강씨
4. 중창 – 청년 4명(베커 부인 지도, 화음을 넣어 찬양)
5. 인사말 – 꼬마 남자 아이 두 명
6. 중창 – 약 14명의 여자 어린이들 (루퍼스 인 지도)
7. 어린 여자 아이의 암송(헤이(Hey) 양 지도)
8. 맹인 소녀가 점자로 영어책 낭독(로제타 홀 부인 지도)
9. 인사말 – 두 명의 남자 유아
10. 7명의 소녀와 미혼 여성들 간의 대화(노블 부인 지도, “예수를 향한 사모함”과 검정색 의 상을 입고 “밤”(Night))
11. 소년 12명의 대화 – 초등학교 (노블 부인 지도)
12. 맹인 소년 합창
13. 중고등부 소녀들의 대화 (헤인즈(Haynes) 양 지도)
14. 청년 4명 중창 (김역수(Kim Yuksu) 지도)
15. 성도들 다함께 찬양
16. 소년들의 대화 또는 연극(대본 : 노블 부인의 “지혜, 목자들과 양”)
17. 성도들의 찬양
18. 축도
중고등부 소녀들이 프로그램을 맡아 무대에 오른 건 지난 봄 초등학교 1기 졸업생들을 제외하곤(그게 최초였고 대성공이었다)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양장을 하는 닥터 에스더 박을 제외하곤 기혼 여성들이 남녀청중 앞에 두고 무대에 선 건 우리 자매교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조선은 여러 방면에서 진정한 진보를 이루고 있다.
크리스마스 밤엔 크리스마스 발표를 몇 차례 했지만 사람을 모으려고 교회 바깥 주변에 등불을 내어달지는 않았다. 작년에 너무 많은 수가 몰려와 예배가 중단되고 모두 착석할 수 없어 이리저리 배회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번엔 사람이 많았지만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었다.
생략 …
아침에 조선 부인 한 명이 날 보러 왔다. 부인은 황해도 두무골 출신으로 숭실여자신학교 학생이다. 평양의 크리스마스가 재밌었냐는 나의 질문에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아, 굉장했어요. 절 여기에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계속 찬양을 올렸어요. 그리스도에 대한 아기들의 발표를 듣고, 쓸모없어 내다버릴 짐짝 취급했던 맹인소녀들이 사랑과 인내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공공연히 하나님을 찬양하다니요. 나같이 무지몽매한 사람이 이런 구경을 하는 게 감격스러웠어요. 아, 이 멋진 종교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어요. 전 죄인의 괴수였어요. 너무 사악했죠. 남편을 여의고 아홉 살 난 아들 하나 키우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데려가셨어요. 전 하나님을 거역하고(당시엔 하나님을 몰랐지만) 독약을 왕창 먹고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앍[ 되었어요. 그리고 여기로 와서 그 분에 관해 공부학[ 하셨지요. 옛날 제 악함에 대해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종종 제 죄로 슬퍼하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날 구원하심을 찬양할 거예요. 우리 고향의 불쌍하고 어두운 사람들 모두가 그 분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공부하는 게 신나요. 하지만 귀가 너무 둔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데 더뎌요.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부도 쉬워지겠죠. 하나님을 찬양해요.”
아, 하나님이 빛으로 인도하시는 어둠의 인생들. 그렇다.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행복한 크리스마스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282, 283, 284, 285쪽
1911년 1월 6일. 크리스마스 공연
정동제일교회 어린이 주일학교는 존스 부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영아부는 매티 윌콕스 노블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 어린이들은 공연 시간에 크리스마스 그린스 칸타타를 멋들어지게 해냈다. 조선 어린이들의 칸타타도 수려했다.
알데, 헤럴드, 베네딕트 양은 월요일 밤 일본 감리교회 축하행사에 갔다. 그 행사도 매우 근사했다. 일본인들은 조선 어린이들의 수화노래 공연을 보고 이들을 초청하였다. 함께 초청을 받은 청년들과 어린이들은 멋진 공연으로 찬탄을 자아냈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354쪽
1915년 크리스마스. 758구절을 암송한 소녀
정동제일교회에서 성경구절을 가장 많이 암송하여 1등상을 탄 소녀가 암송한 구절 수는 758구절이다. 황심리(왕십리)에서 어린이주일학교를 시작했을 때 학생 수는 여학생 20명, 남학생 20명이었다. 애오개 주일학교에서 50명의 새 친구를 데여온 소년이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데려온 학생은 30명이었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378쪽
에필로그 : 우리 한국교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좋은 유전인자를 받았다.
그의 일기 속에 성탄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우리는 1894, 1897, 1905, 1907, 1911년과 1915년의 기록을 통해서 초창기 성탄절 예배와 행사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오늘 한국 교회가 드리고 있는 성탄절 예배와 행사의 체계와 틀이 기독교 선교 초창기에 20, 3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선교사 주도의 성탄절이 1900년대부터는 차츰 조선인들과 함께 하는 성탄행사가로 바뀌어 갔다는 것이다.
셋째, 남녀유별의 유교문화에도 불구하고 축하행사에 유아부터 청년들, 여신도들까지 참여하 였으며 1907대에 이미 교회는 여성들이 남녀노소 대중 앞에서 연극과 대화극을 할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넷째, 맹인들이 성탄 축하행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당시 맹인이나 장애우들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 시대에 맹인들이 성탄절 축하 행사에서 발표를 한 것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 교회의 전보정신,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선입관과 편견을 극복한 당시 교회의 성숙한 인권의식, 평등의식을 보여준다.
다섯째, 성탄절에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넘어서 일본인 교회와 한국인 교회가 서로 교류했다는 것이다.
여섯째, 주일학교에서 성경암송과 전도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교회학교들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곱째, 초창기 교회의 성탄절 행사가 외부, 넌 크리스천들에게 널리 개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남녀유별의 사회에서 교회가 지향한 성탄절 예배와 행사의 혁명성과 진보성, 열정과 개방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한국 교회가 조상들에게 혁명성과 진보성, 열정과 개방성, 평등의식과 자유정신을 유전인자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지속적인 개혁을 위해 잠자고 있는 유전인자를 깨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초창기의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한국 교회를 만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준 배티 노블과 번역을 해준 손현선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조선 선교현장에서 일기를 기록한 매티 노블은 1872년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배리에서 태어났다. 1892년 와이오밍 신학교에서 만난 윌리엄 아더 노블과 결혼을 하였고 같은 해에 감리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감리사로 일하는 남편을 도와서 교육사업과 전도부인 사역에 헌신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로 여성성경공부모임,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육과 체제를 체계화시켰다.
2023년 12월 26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참고도서
매티 노블저, 손현선 번역,⌜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좋은씨앗,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