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자, 상처를 치유하는 자이다 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랬습니다.
저는 상처가 많은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치유사역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 분들을 세워나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만난 내담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 집사님을 보면서...저의 과거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붙이시는 분들을 대략 보니까, 제가 겪은 상처와 비슷한 경우에 있는 분들을 붙여주셔서 상대를 보면서 저를 돌아보게 하시고 또, 집사님의 상처의 아픔이 어떤지 알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역자로 세워지기 전에 나에게 느껴지는 내 인생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오히려 자책할 수 밖에 없는 아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지나고 나니 우울증이었고, 지나고 나니 낮은 자존감이었습니다.
이제 부름을 받아 순종하여 나오니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이 실패작이었으니, 고백하기가 단순해져서 좋긴 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상처가 많고, 당신은 아프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선교사입니다. 당신은 문제가 많아서 선교를 못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문제가 많기에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그것을 하나님이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로 인한 상처 때문에 당신은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이전부터 당신을 이 상황 가운에서 건지셔서 당신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시려고 문제에서 건지셔서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아픔은 그 아픔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상처받은 자만이 상대방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마리아인이 그동안 사마리아인으로서 겪은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강도 만난 자를 보며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긍휼의 샘이 생겼을 뿐입니다.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은 내면에서의 아픈 상처에서 솟아나는 샘입니다.
예수는 Wounded Healer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채찍과 침뱉음을 통해 겪은 고초는 우리의 상처를 능히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 가운데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겪은 그 고통을 생각해보아라..”
또,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당황해 하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피뿌림으로, 피뿌림으로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셨기에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고초를 보고, 너도 견디어 인내하여라...내가 한 것처럼 너도 능히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울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