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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기 - 김종직 사명당 김원봉
양백산인 박희용
2008년 8월 17일 아침 8시에, 저녁때 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아내와 함께 애마 뉴스펙트라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가야할 곳은 경상남도 밀양의 密城以友漢詩會가 주최하는 <제20회 전국한시백일장>이 열리는 영남루이다. 시내에서 핸들이 이상해 점검해보니 며칠 전에 고친 파워핸들오일이 모두 새버려, 원행을 중지할까 하다가 이왕 나선 길이니 하는 생각에 카센터에 가서 다시 보충한 다음 남안동 인터체인지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북대구에서 대구부산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신나게 달려 11시경에 밀양강가 영남루에 도착하였다.
한창 개회식이 진행되고 있는 한시회장에는 老詩客 이백 명 남짓 희끗희끗 앉아 있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들의 모습, 고풍스런 운치가 시원한 영남루 현판과 기둥을 함께 하는 시객들로부터 뭉클 풍겨오는 詩臭, 나는 이런 분위기가 좋아서 해마다 여러 곳에서 열리는 한시백일장을 찾아 아직 덜 익은 재주이지만 끌적끌적 한시를 쓴다.
이곳 밀양한시백일장이 가장 백일장답다. 문경한시백일장은 주최가 문경상공회의소라서 그런지 문경 새재 관광지에서 열리며 상업성이 강하고, 도산별시는 퇴계학 숭상 중심이다 보니 도산서원에서 열리며 격식과 예를 강조하는 科擧性 강하나, 밀양한시백일장은 풍류가 저절로 흐르는 밀양강가 영남루에서 열리며 참가자 면면에서 은일하는 선비다움과 한시 전통이 물씬 풍기는 유일한 백일장이다.
의연하게 정좌하여 시상에 몰두하는 老詩客들의 모습, 비록 수인사는 없지만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통하고 인정이 통하는 선배 시객들이다. 오늘의 시제는 ‘密城新秋’이고 이 자리에서 뽑힌 시객 몇 분이 정한 운자는 ‘秋頭流樓收’이다. 백일홍이 화사한 영남루 누각 아래에 신문지를 깔아 자리를 잡고 한 수 지었다.
密城新秋
天客暫留彩錦秋 천객잠류채금추
草木漸變戴黃頭 초목점변대황두
生物訴命爭美醜 생물소명쟁미추
無心密江笑然流 무심밀강소연류
登化詩仙後日求 등화시선후일구
煙霞定坐嶺南樓 연하정좌영남루
煩華起沒萬古愁 번화기몰만고수
一曲歌聲使人收 일곡가성사인수
하늘 손님 잠시 머물어 비단 가을 색칠하니
초목은 차츰차츰 누런 머리로 변해가고
생물들은 서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투나
무심한 밀양강은 싱긋 웃으며 저절로 흐르네
시선이 되어 하늘에 오름은 후일에 구하고
오늘은 연하 낀 영남루에 자리 잡아 앉으니
어지럽게 일어나다 사라지다 갖가지 시름 시름
한 곡 노래 소리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을 잊게 하네
시고를 내고 난 다음에 ‘密城大君出壇’을 둘러보면서 아내에게 여기가 우리 밀양박의 시원지임을 몇 번 강조하였다. 영남루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박시춘의 옛집이 있어선지 그가 작곡한 옛 가요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내는 박시춘이가 친일파임을 몇 번 말하였다. 밀양아리랑비를 읽은 다음 밀양강변에 있는 아랑각을 둘러보고 지정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내의 말, “ 노인들이 해마다 자꾸 줄어든다고 그래요.”, “ 그런데 보니까 한시책을 펴놓고 베끼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게 대면 당신은 현장에서 생각해서 쓰니까.” 한다. 아내는 분명 ‘당신은 한시백일장답게 시를 써요’라는 뒷말을 생략했으리라. 아내와 함께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오시던 어른들 가운데 오늘 못 오신 분들이 많으리라. 오늘 오신 노시객들 가운데 내년 팔월엔 뵙지 못할 분들이 여럿 있으리라. 영남루에 앉아 풍류와 시취를 즐기는 사람들이 희소해지는 이 시대, 한문이 쇠퇴하는 시대, 한문의 정수인 한시를 아는 시객들이 하나 둘 귀천하고 한시를 애호하는 젊은 시객들이 드문 이 시대, 고아한 풍류와 정취가 깃든 이 땅의 한시도 이제 그 맥이 자꾸 쇠약해지고 있으니 한 이삼십 년 후에는 한시 쓰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국문학자들과 문학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시가 아주 어렵고 까다롭고 한글 표현과는 다르기 때문에 국문학, 민족 문학, 민중문학과는 정체성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자와 한문은 이미 수천 년 세월 동안에 걸쳐 우리 민족의 뼈와 살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이제 와서 한문적인 것과 한글적인 곳으로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글과 한자는 이미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과 작가들이 한글로 표현된 작품만을 순수 국문학사에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민족문화의 여러 면 가운데에서 한글 표현 한 면만 보는 단견이 아닐 수 없다.
민족 주체성이니 자주성이니 하는 민족주의적인 잣대로 문학을 정의하여 작품을 재단하지 말고 인간 정신과 민족정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는가 하는 문학주의적 잣대로 작품을 본다면, 한자든 한글이든 영어든 모두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와 현대에 걸쳐 한국인에 의해 한자로 표현된 모든 작품은 국문학이 된다.
민족문학이라는, 국문학이라는 영역 설정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은 세계문학의 한 부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문명의 한 부분인 ‘세계문학’ 속에 ‘민족문학’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시는 한자라는 언어도구를 차용했을 뿐 화려강산 삼천리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 문학의 한 영역인 시이다. 시와 한시는 생각과 느낌을 한글과 일상어라는 언어도구로 표현했을 경우와 한자와 함축어라는 도구로 표현했을 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한글 시에서도 표현기법으로 함축미가 필요하지만 한자가 갖는 함축미와 중의는 한글 시가 따르지 못하는 영역이다. 즉, 한글 시의 경지와 한시의 경지는 서로 다른 맛과 향을 갖고 있다. 문학을 하는, 시를 아는 자라면 한글이란 한 가지 언어도구에만 머물지 말고 한자라는 언어도구도 활용할 수 있으면 생각과 느낌을 정선, 압축하여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화려강산 남쪽 땅 방방곡곡에 살고 있는 이 시대 21세기 초의 마지막 선비들, 그 가운데에서도 시를 아는 선비들 이백 명 가량이 풍광 좋은 영남루에 모여 이루는 오늘 이 詩會 , 그들이 쓴 한시들도 도도히 흐르는 국문학사에 합류하는 작은 물줄기이다. 문화가, 인간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에는 한시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비록 가늘지만 유구히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한문이 한시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하지만 간편성과 감각성을 잣대로 하는 군중들에게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는 게 현실이라는 수수로운 생각을 하며 삶의 아우성이 가득한 밀양시장을 구경하였다.
다음 관광지는 밀양 시내에서 약 20분 남짓 거리인 무안면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 유적지이다. 사명대사를 찾아 고개길을 오르면서 박시춘에 대해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는 박시춘이가 친일파임을 강조한다. 나는 “뭐 그 당시 박시춘 같은 유행가 작곡자 처지에서 일제의 강요를 거부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런 면에서 약자인 박시춘이가 조금은 이해가 돼.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망명을 가든지 목숨을 버리든지 하려는 결심이 섰다면 알제의 강요를 거부할 수 있지만, 겨우 겨우 목숨이라도 부지하며 생활하려면 친일파가 안 되곤 안 되었을 거야. 물론 적극적인 친일, 자기 출세하여 잘 살려고 앞장서서 친일한 자들은 엄단해야지.” 하였다.
나도 나이가 쌓이긴 쌓이는 모양이다. 피가 펄펄 끓던 젊은 날,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극적 친일이든 소극적 친일이든 모조리 처단해야 한다고 굳게 생각했는데, 이젠 소극적 친일 정도는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무안면은 농촌 면다웠다. 냇가에 논밭이 그런대로 좀 있어 생산이 풍부해서인지 집들도 대체로 말끔하고 사람들도 여유가 돈다. 이런 면 단위 생활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리라. 매일 보며 빤히 아는 사람들, 무슨 무슨 회, 모임, 계 등 등 가로 세로로 엮인 지연 혈연 학연 속에서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큰 고뇌 없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어쩌면 그것이 정상인들의 생활 아니랴. 가끔씩 뜻 맞는 친구들과 함께 밀양 시내 나가 기분도 풀면서 즐겁게 사는 모습, 아 나도 한 일이년간 면소재지에서 마음 편히 살아보고 싶다.
근년에 새로 조성된 기념관 부지는 넓었지만 허전하였으나, 오래 된 송운대사구택과 사랑채, 정칙, 사당인 숙청사 등은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명대사는 하급관리의 소생으로서 32살 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졸지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안내문에는 사명대사가 어느 날 문득 ‘사나이 대장부가 맨날 공자왈 맹자왈 써먹지도 못하는 책만 읽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출가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과거에 실패하고 무언가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념관에는 사명집과 그가 쓴 한시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가 비록 그 당시의 고승인 서산대사의 제자였지만, 임진왜란을 만나지 않은 시대였다면 그냥 역사에 이름 없이 묻힐 평범한 승려였을 것이다.
사명당 뿐만 아니라 이순신, 유성룡, 선조 이균, 패장 원균 등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덕분에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겼는가. 인물은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이 명언 중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사명대사 유적지를 둘러 보고나니 불보박물관 영산정사란 광고가 보였다. 돌아 나가는 길이어서 들러 보았는데, 영산정사는 신흥 사찰로서 각지에서 수집한 다양하게 많은 양의 불교관계 물건들이 난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무어 인도와 동남아 등지의 패엽대장경이란 것들과 그 지역 여러 고승들의 사리라고 하면서 많이 전시해 놓았는데, 재질이 비슷한 종이들과 패엽마다 비슷비슷한 고대 인도 글씨, 비슷비슷한 색깔과 모양의 사리들, 아무리 봐도 불교적인 감흥이 풍겨오지 않았다. 아내는 사리를 보더니 킥 웃더니 낮은 목소리로 “절에 중들 그거 못해서 고인 게 저거 된다지요?” 한다. 글쎄나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도를 통한 스님만 생기는 게 맞겠지.
요즘 들어서 새로 지어지는 대규모 절들이 많다. 돈 많은 불자들이 시주를 많이 하는 모양인데 절에만 시주하지 말고 불우이웃 돕기 성금 시주 등 좀 더 사회적으로 유익한 곳에 돈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돈은 많은데 몸은 늙고 병들고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심약한 불자들도 문제지만, 난세에 태어나 중이 되어 이 절 저 절 떠돌아다니며 들은 염불과 공부로 거대한 깨침을 아직 이루지도 못한 처지이면서도 노티를 자랑하며 무슨 큰 스님이라도 된 듯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려드는 자들이 더 문제이다. 그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나이 오십을 넘으면 지천명이 되어 혼자만 세상을 통관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부턴 배우는 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가 되려한다. 그러나 옳은 배움은 나이와는 무관하다. 오십대라고 해서 다 배운 게 아니다. 팔십이 되어도 배워야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종교계나 학계, 문화계 등에 종사하는 사람 거개가 오십만 넘으면 원로 행세를 하려 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의 성장이 멈추어지고 퇴전한다.
돌아오는 길에 무안면 소재지에 서 있는, 큰 국난을 만날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각을 둘러보았다. 우리 한민족사에서 가장 위급했던 국난인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워 이 강토와 백성을 살려낸 사명대사, 관광객들이 무리지어 오는 곳은 아니지만 젊은 부부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온 모습이 자주 눈에 띄어 마음이 흐뭇했다.
밀양 시내로 나오는 고개 길 아래 마을에 있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아랫대들이 잘 받들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점필재 선생의 직계자손이 귀해서인지 몰라도 작은 규모의 퇴락한 생가뿐이었다. 근년에 생가를 좀 보수하고 대문 밖에 흉상과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종장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적이 이리도 퇴락하였다니, 그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후세인들의 짧은 안목도 안타깝지만,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여러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고 그마저 부관참시란 참변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절손되다시피 했으니, 학맥이든 후손이든 그를 우러러 기리고 융숭하게 대접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의 직계제자들은 사화를 당해 거의 산멸하고, 살아남은 제자들과 자손들이 있다 해도 사화에 워낙 데었기 때문에 고관대작 벼슬길 보다는 순수학문 쪽으로 궁구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퇴계든 율곡이든 우암이든 역사상 위대한 학자로 떠받들어지는 이들을 보면 모두 제자들과 후손들이 현달한 사람이 많다. 그 제자들과 후손들은 스승과 조상을 불천위로 모시어 높이 숭상할수록 저들에게 들어오는 이익이 많음을 산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점필재 선생의 퇴락한 생가를 보면 점필재 그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성리학을 자기화하여 조선성리학을 처음으로 열 그 당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점필재 선생이 조선성리학을 열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학문이 벼슬이 되고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아마 그러한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좀 현실을 알고 융통성 있게 처세하였더라면 충분히 회피할 수도 있었던 기묘사화 등을 온몸으로, 심지어 삼족이 멸족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갔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과 가르침이 결코 權道와 金道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점필재 학문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사림파들이 화를 당한 후 그의 학문은 실제적으론 맥이 끊어졌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들이 자연사하고 나서부터 은둔하는 후학들에 의해 겨우 조선성리학이 숨을 쉬게 되었는데, 조선 성리학의 대가라고 칭송받는 화담이나 퇴계, 율곡 등 16세기의 학자들은 점필재의 학문을 이어받았다고 하기보다는 명으로부터 직수입 된 주자학을 이었기 때문에 사화 이전의 성리학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점필재가 열고 조광조 이언적 김굉필 등 열렬한 후학들이 실천하다가 연거푸 사화를 당하는 바람에 인멸된 순수 조선성리학과, 중국 학자 주자의 학문을 고대로 옮겨와 외우고 쓰고 주석하고 제도화한 화담, 퇴계, 율곡의 현실 조선성리학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 차이점을 알기에 화퇴율 등의 주자학자들은 점필재를 조선 성리학의 연원, 종장으로 모시기는 하나 그렇게 높이 숭상하지는 않는다.
점필재 학문의 정수는 ‘순수’이다. 그 ‘순수’는 ‘절대정신’에 닿아있다.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절대정신’, 그 실천이 ‘혁신’이다. 그들은 시대를 혁신하기 위해 그들의 생애를 바쳤다. ‘순수’를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초개처럼 내놓았다. 그래서 사화를 당할 때마다 무더기로 죽어갔다.
그에 비해, 성삼문 등 사육신과 생육신의 학문은 충효 차원이었다. 그래서 제왕의 운명과 자기들의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을 지선의 가치로 여겼다. 그들에게 백성이나 공동체 의식보다는 불사이군이라는 충성 의식만 가슴에 팽배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백성들과는 무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직수입한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시작한 현실 조선성리학, 그 종장인 화담과 퇴계, 율곡. 그들의 행장과 학맥을 보면, 심학 궁구를 기초로 하되 심학이 일정한 단계에 오르면 과거용 공부에 치중하며, 과거급제를 하여 고관대작으로 종신함을 최선의 가치로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을 그들은 변호하기를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한다. 이미 그들의 변호 속에는 점필재의 ‘순수’보다는 영악한 ‘현실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주자학에 내장된 ‘현실주의’가 후대로 갈수록 심화되어 학벌, 문벌, 족벌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고, 이념의 차이에 따른 숙청이나 사화보다는 권력과 부에 대한 쟁탈전이 격심하게 되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의 죽음은 점필재와 그의 제자들이 겪은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점필제의 제자들은 순수정신이 맺은 이념을 지키다가 떼죽음 당하였지만, 화담과 퇴계, 율곡의 제자들은 이념보다는 권력을 지키거나 빼앗으려다 소수가 사약을 받은 정도이지 아니한가.
역사에서 가정법은 소용없지만, 사화가 없었다면 점필재의 학문이 제대로 이어져서 제자들과 후학들의 힘으로 한 시대를 충분히 개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루한 주자학이 조선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선 전기, 얼마나 좋은 시대적 조건이었는가. 건국 한 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이라는 외형적 제도와 법률이 서고, 다음으론 그 속을 채우는 사상 -조선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에 지주가 될-이 꼭 필요한 시대적 조건에서 점필재와 후학 사림파들이 주창한 순수성리학이 꼭 알맞았는데, 왕권과 훈구파라는 현실 권력이 일으킨 역풍을 만나 그만 좌초하고 말았으니, 그 빈 자리를 직수입된 주자학이 슬그머니 채우고 말았으니, 이후의 학문과 사상의 동향, 그에 따른 백성들의 부침이 어떠했는가는 명약관화하지 않겠는가.
점필재의 학문이 순수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실천을 강조하다가 사화를 당해 산멸하는 것을 본 다음 시대의 학자들은 현실적 실천 보다는 순수정신 탐구를 주업으로 했다. 점필재 학맥의 ‘현실적 실천’에 대하여 오늘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개략적인 평가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과격하였다’인데, 그러한 평가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들의 허물을 들추는 격밖엔 안 된다. ‘走肖爲王’이라는 간계에서 보듯이 절대 권력인 왕권과 견고한 기득권 세력의 비겁한 강공 앞에서 ‘순수’는 나약할 수밖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평할 때 ‘그러나’란 말은 뒤에 하지 말고 ‘그들의 이상은 순수하였다’라고 하여야 마땅하다.
다행이라면, 영원한 시간 동안 밤하늘 높이 돌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듯이 시간은 흘러 역사를 이루어도 점필재의 정신은 의식을 가진 이들의 가슴마다에 지금도 살아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학문이 부흥한다고 해서 무어 생가를 넓히고 서원을 짓고 광고하는 고루한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단출 소박한 삼간 기와집 한 채가 주는 의미만 바로 보면 충분하다. 그의 학문이 오늘날 비록 형해화 되었다 해도, 학문을 옳게 하는 자라면 한 채 생가가 주는 역사를 읽고 그 연원을 더듬어 올라가 선생의 정신을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 글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학문이 넓다는 면도 되지만 후학들로 하여금 스승의 학문을 간단명료하게 습득케 하기보단 길을 잃고 헤매게 하는 면도 있다.
점필재, 남아있는 그의 글이 적다고 하여 결코 소홀히 대할 선학이 아니다. 참으로 황당한 형벌인 부관참시 될 정도라면 절대 왕권 시대 그의 글들은 얼마나 탄압을 받아 금서가 되었을까.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읽거나 갖고 있는 자라면 결코 살아남지를 못했을 것 아닌가. 그에 비해, 화담은 비교적 저술이 적은 편이나 퇴계와 율곡은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가. 자기 나름대로 궁구하고 터득한 것 보다는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학 서적을 보고 주석을 단 글들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종교라는 큰 테두리 속에 다양한 종교가 담기나 종교마다 특성과 지향점이 다르듯이, 유학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 훈고학 주자학 양명학 실학 등이 담기나 각각의 학마다 특성과 지향점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성리학이라는 틀 속에 여러 가지 학문이 담기나 그 모양과 냄새, 맛이 각기 다르다. 주자학을 받아들여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퇴계와 율곡의 학공은 대단하지만 지나치게 심학 궁구에 천착함으로써 현실과 괴리된 점이 있었다. 심학 자체가 갖는 폐쇄성과 현실세상이 갖는 개방성을 맞추지 못한 것이 괴리의 원인이다. 그 괴리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유보됨으로써 결국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학문과 현실이 틀어지게 되어 마침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나라는 쇠약해지게 되고 말았다.
물론 조선 사회의 화석화를 초래한 원인을 퇴계학과 율곡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조 초기부터 유래된 훈구파의 사장학이 근본 원인이다. 사장학 자체가 文知의 경쟁과 과시이기 때문에 그 특성이 과거제도에 순응하여 고급 관료가 된 인사들의 특성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쥔 사장파들은 저들의 정치사회적 목적을 위해 심학을 잠깐씩 이용했을 뿐, 심학의 심오한 논리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장파들의 권력 범위는 한 시대이지만 심학 이론은 여러 시대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퇴계학과 율곡학에게도 조선 사회 화석화와 쇠약, 붕괴에 대한 책임의 일단이 있음은 분명하다.
오후 늦게 밀양시립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밀양 역시 이 땅의 한 지역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알려주는 여러 유물들을 시작으로 하여,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소눌 노상직 선생, 성호 이익 선생의 문집책판을 비롯하여 김홍도, 장승업의 회화 등 낙동강 유역의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화석전시관에는 밀양 지역의 지질구조를 알려주는 각 시대별 대표적인 화석을 비롯하여 가스토니아, 플라티벨로돈의 공룡 골격 등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같은 건물을 쓰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밀양장날 만세운동, 단장장날만세운동 등 밀양의 대표적인 3.1운동의 다양한 모습과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밀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담은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우리나리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훌륭한 기념관이다.
구한말과 일제 시대 초기에 나라의 자주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영남의 선비들이 연명하여 쓴 만인소에는 봉화, 안동, 밀양 등지의 선비들이 많았다. 이 세 지역은 나와 공통점이 있다. 봉화는 고향이고 안동은 현재 사는 곳이고 밀양은 본관이다. 글을 배웠어도 대의를 위하여 선뜻 나서기는 어려운 게 현실을 사는 인간의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안위보다 자주독립이란 대의 실천에 나선 선비들의 기개, 그들의 이름 석자라도 읽고 기억하는 게 후세를 사는 우리들의 도리 아니겠는가.
이곳 밀양 출신인 김원봉과 윤세주로 대표되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무력투쟁사는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장한 일이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 한 시대 의열투쟁을 이끌었고 윤세주는 상해임정 쪽으로 기운 김원봉과 헤어져 의열단 활동을 마감한 후 조선의용대원으로 항일 전선의 최선봉에 섰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이 이끈 팔로군이 정강산에선가 토벌군인 장개석군에게 포위당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윤세주가 자기 목숨을 던져 그들의 활로를 타개해주었다. 그 공을 잊지 않은 팔로군은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다음 정강산 전투 현장에 윤세주의 공로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장한 기운이 전신에 감도는 항일독립군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저 시대에 살았다면 저들만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야외에는 무력투쟁, 폭탄투척, 정치, 경제, 시위, 교육, 독립운동자금 등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활동한 항일투사들의 흉상이 마흔 개 정도 ‘불꽃’ 이란 이름을 가진 탑을 중심으로 해서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이 글을 쓰는 9월 초순의 뉴스난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하는 기사가 연일 뜨고 있다. 부자 세습권력 행사가 어언 회갑을 넘었다. 해방 전까지의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공이 과소평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김원봉과 윤세주의 의열단, 조선의용대 활동에 비하면 그 비중이 약하다. 항일 현장성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김원봉과 윤세주는 광복 때까지 항일 현장인 대륙에 있었지만 김일성은 1940년부터 5년 간 안전지대인 연해주에 있었지 아니한가.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상 역시 대단했지만 1940년 이후엔 거의 소멸되었지 아니한가. 또, 항일 전투역량과 전과 면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윤세주, 무정 등의 지도자가 이끈 조선의용대는 수만 병력으로서 1945년 8월까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정규전을 펼쳐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김일성이 이끈 빨치산은 1940년까지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 상대적으로 적은 전과를 거두었지 아니한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관점으로 볼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해방공간에서 김원봉이 극우 세력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타의에 의해 삼팔선을 넘어 북행을 한 사실이다. 해방 후 곧바로 북으로 안 가고 남쪽으로 귀국한 김원봉이 서울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고 고향 밀양에서는 인산인해를 이룬 환영객들의 영접을 받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김원봉은 고향인 남쪽에서 정치인이 되려고 계획했지 북한체제를 추종하는 극좌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테러리즘이지만 식민지 백성들로 보면 속 시원한 쾌거인 의열단의 눈부신 활동을 이끌었고, 30년대 중반 이후엔 우익 위주의 상해임시정부와 좌익 무력인 조선의용대의 연결고리였던 김원봉이 결국 월북함으로써, 그것도 북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권력 상층부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위명을 견제하는 사대주의 세력들에 의해 숙청됨으로써, 그의 고향인 남한에서는 반국가, 반체제범이 되어 그가 이룬 빛나는 항일투쟁 업적이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사보다 권력을 선택한 자들에 의해 소외되고 잊혀진 것은 김원봉 그의 개인적인 운명이기도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사회모순과 인간정신의 황폐화가 깊이 곪다가 드디어 20세기 벽두에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하여 반세기 동안 고름과 피가 흘러내린 우리 민족의 운명이기도 하다
독립국이든 식민지든 한 나라, 한 민족이 가는 길이 문과 무의 조화라면, 문은 상해임정 등의 우익 독립운동 단체가 주류였고 무는 좌익 조선의용대가 주류였다. 그 무력이 독립된 조국, 통일된 조국에 고스란히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북한의 무력이 된 것은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무정 장군이 이끈 수만의 조선의용대가 압록강 도강을 소련군으로부터 저지당하여 장군 이하 간부 장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은, 남쪽에서 김구 선생 등 상해임정 요인들이 미군의 저지를 당하여 결국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과 똑같이, 민족의 해방이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대표적 좌절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초가 어긋났기에 해방 이후 남북의 현대사가 비틀어지게 되어 지금 현재까지 제살 제가 깎아먹는 소모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을 접수한 강대국에 아부한 사대주의자들이 시작해놓은 수렁에서 우리는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까나.
남쪽에선 친일파 기득권 세력이 잔명을 보존하더니 불과 수 년 만에 기세등등하여 항일독립운동가를 좌익으로 몰아 탄압하고 위해를 가한 것도 비극이지만, 북쪽에선 항일전선의 전사였던 조선의용대의 장졸들이 북한 인민군의 중추가 되어 1950년 6월 남침전쟁의 주력이 된 것은 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용대의 지휘 장군, 간부 장교들과 병사들, 대륙의 화북과 북만주 전선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일본군과 전투를 할 땐 분명 꿈에서라도 장래에 남쪽의 동족을 사살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꿈에서라도 자기들이 흘린 땀과 눈물, 피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란 위장막 아래 장치된 세습왕조 건설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였으리라.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해마다 봄이면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듯이 어느 누구의 정신이나 고유성과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 항일전선에 헌신한 열사들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이 땅의 무인이라면 다시는 동족상쟁의 전선에 타의에 의해 내몰리진 않으리라. 그 선열들이 무엇을 위해 항일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는지 안다면, 진실로 삼천리 화려강산을 민족을 위한 길이 어느 것인지 나름대로 분별하고 있으리라.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양식 있는 민족적 좌익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소련을 호가호위하는 사대주의자들의 정략을 극복하고 북한의 무력이 되었다면 최소한 육이오는 없었을 것이다. 한 시절 민족 유일 무력인 조선의용대를 호령하던 무정 장군이 그만 날개 꺾인 독수리가 되어 겨우 인민군 사단장에 자족하곤 남침전쟁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니, 그의 용맹은 선천적이나 그의 역사의식은 선천적이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추해볼 때, 대의를 위해 한 몸을 던질 결기로 가득 찬 열혈남아들의 용맹이 민족과 민중을 위한 바른 길에 쓰여 지도록 하는 역사의식의 함양과 길 터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선 몸을 쓰는 용맹한 실천가들의 영역이 있고 정신을 쓰는 침착한 이론가들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해방공간에서 조선의용대 이론가들의 영역이 김일성을 조종한 러시안 이론가들의 영역보다 더 넓지 못하였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역사적 정리를 할 수 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치열했던 민족 운명의 폭발과 분출도 이젠 반세기가 지나니 잦아들고 상처 위에는 커다란 딱지가 덮였다. 남과 북의 생각 있는 인사라면 어는 누구도 그 상처 딱지를 다시 떼고 싶지 않으리라. 상처 딱지가 자연스레 떨어지고 뽀오얀 새살이 돋아난 걸 보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때가 되어야만, 지금은 고향 박물관에서 해방공간 치열했던 이데올로기 차원과 국가권력 관계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만 대접받고 있는 김원봉과 윤세주 등 밀양 출신의 열혈남아들이 이룬 항일공로가 비로소 청천백일 아래 후세들에게 환하게 읽혀지리라.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독립투사들을 태어나게 하고 키우고 가르친 밀양은 분명 우리나라 삼천리 화려강산을 지켜낸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성장기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밀양의 아이들이 무의식 형성기 때부터 귀가 반질거리도록 들은 점필재 이야기와 사명대사 이야기, 책으로 전해지지 않는 구전 이야기도 많이 들었으리라. 밀양은 사명대사 유정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정신이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땅이었다. 그래서 감격스럽다.
저녁 늦게 시내에서 40분 남짓 걸리는 곳에 있는 재약산 표충사를 찾았다. 어둠살이 짙어져서인지 매표소가 문을 닫아 공짜로 절 구경을 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께 미안하지만 절 구경할 때 꼭 입장료를 받아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입장료도 어른이 4천원이다.
표충사는 지금까지 내가 찾은 절 가운데 가장 아담했다. 계곡을 따라 긴 직사각형 경내 안에 좌우로 고운 단청을 한 건물들이 숙연하면서도 고운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우선 저 멀리 배경을 이루는 재약산과 천황봉이 이곳이 좋은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녁 산안개가 피어나는 수려한 암석봉우리들이 표충사를 보호하듯 주욱 늘어서 있어 사뭇 성스러운 분위가 감돌았다.
어느 절이나 사천왕상은 무서우면서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절을 찾는 사람들을 초입에서 반겨준다. 일주문을 지나니 안내판에 무슨 종이들이 붙어있어 들여다보니 ‘행자 구함 고졸 이상 50세 이하 건강한 사람’이다. 요즘은 중질 하려 해도 학력이 높아야하고 50 넘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야 이젠 나도 중 되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하니, “ 왜 그렇게 땡땡이 중맨치로 혼자 사는 거 좋아하더니 이젠 중질도 못 하겠네” 한다.
그래서 짐짓 의젓한 목소리로, “ 아 나는 중처럼 혼자 공부하며 살다 죽는 그런 인생을 찬성하지 않아, 사람은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게 가장 바람직 해, 그래서 나는 유학자, 선비야 선비” 라고 말하였다.
가족 단위의 구경꾼들이 많았다. 절이라서 그럴까 초로의 여인네들이 풍기는 쓸쓸함이 문득 문득 눈끝에 매달린다. 인생이란 거,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인데 왜 이리도 고뇌가 많은지, 생로병사, 연분홍 얼굴이 금세 흙빛으로 변하고 겹겹의 주름이 만들어지니. 그래서 절이 지어지고 부처님이 법당 중심에 모셔지는 거겠지. 조금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저마다의 가슴에 저마다의 부처를 새기는 거겠지.
사명대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표충하기 위해 나라에서 중창했다는 ‘표충사’, 숭유배불 -유학이 주류이고 불교를 천대한 조선 조정에 그래도 중인 사명대사의 공을 기린 유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래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한 지성의 힘으로 조선이 500여년을 버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중엔 결국 사문난적 -반지성의 폭력 때문에 조선이 붕괴하고 말았으리라.
사하촌 식당에서 혼자 노는 장닭을 보며 비빔밥으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오던 길을 되잡아 달려 밤늦게 안동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한 밀양 여행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밀양에서 오는 공룡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있다.
* 사진은 양백산 문화역사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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