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鎭海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1면이 바다인 지형이다. 해군기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춰 군항 도시로 성장했다. 그래서 지역경제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모든 해군 장병들은 한 번 이상은 진해를 거쳐 가게 된다. 육군과 달리 해군은 공군(진주)·해병대와 더불어 신병·부사관 후보생 양성소가 진해에 딱 하나만 있다. 진해가 대한민국 해군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유다.
진해는 조선 시대에 경상도 웅천현이었다. 진주부 웅천군, 경상남도 웅천군을 거쳐 1908년 웅천군 폐지와 함께 창원군에 합병됐다. 1931년 창원군 진해면에서 진해읍으로 승격된 뒤 1955년 진해시로 승격하면서 창원군에서 분리됐다. 1973년 창원군 웅천면이, 1983년 의창군(창원군은 1980년 의창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1년 원상회복) 웅동면이 진해시로 편입됐다. 2010년 진해시는 창원시‧마산시와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로 재편됐다.
도시 구조는 서쪽 끝의 본시가지와 동쪽 끝의 웅동동 시가지로 나뉜다. 본시가지는 고층 건물이 많지 않다. 아파트단지조차 고층으로 짓지 못하기 때문에 빌라 수준이다. 진해비행장이 있는 덕산동과 그 주변 지역에 고도 제한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고도 제한이 완화된 뒤로 20층 넘는 건물이 들어서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고층 건물은 별로 없는 편이다. 최근 고도 제한 완화로 아파트가 엄청나게 들어서면서 장유처럼 창원의 베드타운 역할이 커지는 추세다.
반면 시내와 멀리 떨어진 동부 웅동2동에는 원래부터 고도 제한이 별달리 없어서 고층 아파트단지가 조성돼 있다. 항구도시지만 바닷가에 각종 해군 군사시설이 들어차 있어 제대로 된 바다 풍경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진해 군항마을역사관
진해는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 할 수 있다. 진해 군항마을역사관이 있는 진해구 중앙동 일대는 구한말 웅천현의 서면 지역으로 ‘중평한들’이라고 불리는 넓고 기름진 벌판이었다. 1906년 일본은 이 일대를 일본 해군 군항 도시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토지를 매수한 후 1910년 일본 해군건축성 진해지부 ‘진해 군항 대시가계획도’가 설계되면서 벌판 한가운데 수령을 알 수 없는 노거목인 팽나무(포구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에 여덟 갈래의 길을 내어 방사직교형 시가를 만들었다.
현재 ‘중원로터리’라 불리는, 팽나무가 있던 자리는 주변 들판에서 일을 하던 농민들의 휴식 공간이었으나 이것이 만들어진 이후 출입을 할 수 없는 공간이 됐다. 진해는 1912년 진해면으로 출발해 1931년 진해읍으로 승격됐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사람에게는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 시가지였다. 중원로터리 일대에는 지금도 일제 때 지어진 건물과 오래된 점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군항마을역사관은 진해 지역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 유산을 창조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근대역사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해 진해의 근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원광장
1910년대 일본이 예전 중평한들이라 불리던 진해의 서부 지역 일대의 한국인 2000여 명을 경화동으로 이주시키고 군항 도시를 건설하면서 조성된 광장이다. 일제는 중평한들 한가운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숭배되던 약 1200년 된 팽나무를 중심으로 광장을 조성하고 그 주변으로 여덟 갈래의 길을 내었다. 중원광장의 8거리는 근대 초기에 설계된 방사형 가로 구조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어 도시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1950년대에 팽나무가 고사한 후 느티나무를 심었고, 1962년에 분수대와 시계탑을 세워 광장을 정비했으며, 1967년에는 모형 거북선을 설치했다. 2007년 다목적 활용을 위해 현재의 잔디광장으로 조성했다.
*진해우체국
러시아풍 건축물인 진해우체국은 1912년 5월 청사 건축을 시작해 10월 25일 준공됐다. 일본의 우편국으로 출발해 2000년까지 진해우체국 청사로 활용됐다. 현재 국가지정 사적 제291호다.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붉은 벽돌조 3층 건물로 당시 진해 요항사령부로 사용됐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지니고 있다. 요항要港은 군사상 경비를 요하는 항구.
*진해 요항부 병원장 사택
일제강점기 당시 진해 요항사령부의 병원장이 살던 관사였으나 지금은 대중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5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됐다.
*수양회관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6각 누각이 있는 중국풍의 3층 건물로 ‘뾰족집’이라 불렸다. 본래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대칭돼 남‧북으로 각각 1채씩 총 3채가 건축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초소였던 이곳은 현재 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독특한 외관과 근대 상업시설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나 외관은 일부 변형됐다. 3층으로 올라가는 내부 계단과 창을 통해 바라보는 전망이 아름답다. 건립 연도 1938년.
*진해역
1926년 건립된 역사로 당시 전형적인 간이역사의 형식과 규모를 보여 준다. 등록문화재 제192호 지정.
*장옥거리
한 벽에 길게 늘어져서 지은 건물을 길 장長 자를 써서 장옥長屋이라고 한다. 1층은 상가, 2층은 주거용으로 사용됐다.
*구 충의동 유곽
충의동 유곽은 시가 계획에 따라 연작정連雀町(현재의 중원로 근방)에 계획되어 만들어졌다. 연작정은 진해역에서 동남쪽으로 10정(1정町은 약 109.09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2곳의 유곽이 있었다.
*방공호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이 방공호는 높이 2m 남짓, 폭 5m가량의 동굴로, 현재는 20m쯤 들어가면 반대편 통로는 블록으로 동굴이 막혀 있다.
*원해루
원래 이름은 영해루榮海樓였다가 지금의 원해루元海樓로 바뀌었다. 현재도 중국 음식점으로 운영 중이다. 영해루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 출신인 장철현 씨가 만든 중국집으로 수많은 명사들과 이승만 전 대통령까지 방문한 식당으로 유명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건립 연도 1949년.
*진해 희망의 집
1946년 이약신 목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중에 230명이나 되는 대식구를 이뤘다. 1957년 경남도로부터 희망원 제15호 시설로 허가를 받았다.
*이순신 동상
진해 북원로터리 이순신 동상은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됐다. 한국 해군의 중심 기지인 진해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동상이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
진해 기지사령부 안에 있는 건물로, 해방 이후 해군에서 건물을 인수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했다. 1979년 수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흑백다방
화가 유택렬 씨가 1955년 칼멘다방을 인수해 흑백다방으로 개명하고 2008년까지 운영했다. 현재 다방은 운영되지 않고 연주회장과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도 문인,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제황산 공원‧진해탑
제황산 공원은 해발 90m, 면적 43만㎡의 도시공원으로 공원 정상에 진해를 상징하는 진해탑이 우뚝 솟아 있는 휴식 공간이다. 1967년 지어진 진해탑은 1층을 사무실, 2층을 진해시립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3~8층은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모노레일카 2량과 화장실 3곳, 정자 2곳도 갖추고 있다.
*마크사 거리
진해는 군항의 도시이기에 군인들의 군복에 마크와 이름표를 달아 주던 마크사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김명시
진해가 속한 창원시의 독립운동가들의 면모를 살필 때, 김명시金命時라는 인물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0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는 스티로바‧김희원金喜元·김휘성金煇星·김휘연金輝然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4년 마산 지역에 공산당 지부를 세운 김형선金炯善, 1930년대에 부산과 진해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이끈 김형윤金炯潤과 남매 사이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다가 1924년에 중퇴했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유학생으로 선발돼 12월에 국제 공산주의운동 지도자 교육기관인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아시아 국가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1931년 5월에는 상하이로 가서 중국공산당 한인 특별지부의 선전부 책임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오빠 김형선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코뮤니스트’와 ‘태평양노조’ 등의 선전물을 만들며 공산당 조직의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 1925년 5월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피신하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7년 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으며, 1939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탈출해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소속되돼 해방이 될 때까지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여장군 김명시’ ‘조선의 잔 다르크’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