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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교회 _ BT 마가복음 7장
마가복음서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누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갈릴리(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읽는 장면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6-19)
이는 이사야서 61장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2)
이사야서와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그 의미가 같다고 볼 때, 예수님은 ‘갇힌 자’를 ‘눈 먼 자’로, ‘마음이 상한 자’를 ‘눌린 자’로 말씀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앞을 볼 수 없으면,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 일정한 공간에 갇힌 자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외부의 압력이나 심리적 갈등에 억눌려 있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뜬금없이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마가복음 7장에 저자가 기록한 세 가지 이야기들이 바로 이사야서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고,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는 사명선언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이 말씀을 세상 가운데서 사단의 권세에 억눌리고 포로 된 자로 살던 우리의 영을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나에게 이 땅의 교회를 향해 “너희(교회)가 바로 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자”라는 절규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회당에서 읽으신 이사야서의 말씀을 사명선언문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이 실제로 그 말씀 그 대로 사셨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마가복음 7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가복음 7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장로의 유전(전통)을 지키지 않는 예수의 제자에 대해 비난하는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다.
두 번째는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이방인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고, 마지막으로는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다.
1. 사람이 만든 전통에 포로 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교회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전통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전통이 만들어진 본질적인 정신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이다.
우리가 십일조나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도 아니요,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돈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내가 돈의 노예로, 돈과 물질에 포로 되지 않았음을 십일조나 헌금 등의 행위로 들어냄으로써 날마다 내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전통 자체가 그 본질을 잃고, 절대적인 것이 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십일조하면 축복 받고, 안하면 벌 받는다고 한다. 십일조나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십일조나 헌금을 했으니, 형편이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한 가족의 필요를 채우거나 돌보지 않아도 정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 했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고르반처럼 말이다.
이 뿐인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에 따라 유사하게 우리가 구별하여 지키는 주일, 곧 주일성수는 어떤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아마도 배고품을 해결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전통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그 때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인자)이시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27~28) 곧,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안식일의 원래 목적대로 그 날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 주일성수가 아니겠는가! 주위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서도 외면한 채 예배시간에 늦지 않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주님이 주일성수했다고 칭찬하시겠는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인이 자신의 종교적 만족을 얻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이웃사랑의 행위를 면제받을 목적으로 전통을 이용하기도 한다면, 반대로 교회의 지도자나 사역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교회가 성령과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돈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교인의 이동을 비판하면서도,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로 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환영하고, 사정상 교인이 교회를 옮기더라도 십일조는 계속 자기 교회로 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율배적인 모습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초대교회 시대에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던 교회는 돈과 권력을 주인 삼지 않았다. 교인을 한 몸으로 여겼지, 결코 시스템을 유지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고,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돌아가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예수님을 따라 살았다는 초대교회가 지금 이 땅위에 존재한다면, 그런 교회 안에 굶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교회 차를 팔고 교회 건물을 팔아서라도 그 지체(교회, 주님의 몸)를 위해 사용할망정, 힘든 일 때문에 낙담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도가 부족하다거나, 교회 봉사가 부족하다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라는 말로 정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믿는 신앙과 가치를 그렇게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세상에 드러냈었기에 초대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교회 차를 사고,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서 어렵게 사는 지체(시스템의 부속품)들의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고 하고, 빚쟁이들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땅 가운데 빚을 내서 건물을 짓자고 말하는 대신, 빚을 내서라도 사람을 돕고, 억눌림에서 자유케 하자는 교회가 보고 싶다.
그런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교회가 적은 것은 아마도 교회가 개교회화 되고 양적성장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권력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소유욕이 전통과 만날 때 계명의 정신을 담아내는 도구로 빛을 내던 전통은 어느새 공동체를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런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 7:6~7)
2. 사회적 약자와 구조 악을 보지 않는 눈 먼 교회
두 자녀를 둔 아버지가 있다. 큰 딸이 빵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보던 작은 딸이 언니에게 한 입만 달라고 했다. 큰 딸은 자기 것이라면서 나눠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아버지가 보았다. 아버지는 바로 큰 딸을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본 큰 딸이 아버지에게 자기도 한 입 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한다.
“이건 아빠 것이라서 줄 수가 없구나.”
위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정말로 큰 딸에게 초콜릿을 줄 마음이 없어서, 자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음을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라면 잘 알고 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의 부탁이 거절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 슬프고 싫다면, 너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란다. 네가 너의 것을 나눠 주면, 아빠가 너무 기뻐서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동생이나 약자에게 할 수 있음에도 너의 것을 나눠 주지 않는 다면, 아빠는 무척 슬프단다. 딸아 네가 소중한 것처럼 너의 동생도 빵보다 소중하단다.”
빵에 눈이 멀어, 동생을 보지 못하는 언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아빠는 마음이 아프지만, 딸에게 모진 말을 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딸을 살리려고 먼 길을 달려온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모질게 들린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곧, “넌 개 같은 사람이야.”라는 말과 같다. 고상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그냥 인격 모독에 쌍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아무도 예수님의 이 말에 놀라거나, “아니, 예수님, 여인에게 인격적으로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변에서 예수님의 이 말을 듣던 모두가 이 말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왜냐면, 실제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특히 이방 여자들을 자기와 같은 존엄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개나 돼지 정도로 취급하는 게 비단 고대시대의 이야기일까? 오늘날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가? 언젠가는 어떤 고위직 관리자가 국민을 개, 돼지, 기니피그라고 말해서 공분을 산적이 있으며, 대기업의 가족들이 직원을 모욕하고 폭력을 가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상상해 보자.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멋진 차를 타고 왔겠는가? 나귀나 소를 몰고 왔겠는가? 다급한 마음으로 옷을 걸친 듯 만 듯 허겁지겁 달려 왔을 것이다. 향수라도 뿌리고 왔겠는가? 귀신들린 딸을 오랫동안 간호한 여인이라면 어떤 행색이었겠는가? 냄새나는 이방여인이 곁으로 다가온다. 제자들의 얼굴 표정과 반응이 어떠했을까?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송강호가 다가오자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냄새에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는 이선균의 표정 말이다. 냄새는 신분의 차이를 말한다. 그 영화의 감독은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진자가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며 넘 볼 수 없는 신분의 선이 존재함을 냄새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사람을 개, 돼지 보듯 바라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을까?
“정말 눈이 먼 것은 이방 여인의 딸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란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이런 역설의 화법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면, 이방인에게도 관대했던 예수님이 왜 그 순간만 이방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들이 놀라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여인의 부탁을 들어 주었을 때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의 눈 먼 자 뿐 만 아니라, 그 시대에 소외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
부당한 권력에 강도만난 자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 나건만, 교회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는다.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을 사회악이요, 빨갱이요, 사단의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멸시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과연 예수님께서 악취에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릴 곳은 어디인가?
3. 가난한 자의 외침에 귀 막고, 불의한 세상을 향해 침묵하는 교회
귀 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어떤 무리가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 묻은 손으로 그의 혀를 잡은 채 말씀하신다. “에바다” 그리고 귀 먹은 이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된다.
귀 먹고 말더듬는 사람은 신체적으로 억눌린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자유케 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오늘 이 기적이 일어난 곳을 성경은 굳이 밝히고 있다. 성경의 저자는 이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고 말하고 있다. 갈릴리 바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어부들이었다. 이 시대에 가장 천시당하고 힘들게 살던 사람들은 남의 양을 치던 삯꾼 목자들이었다고 한다. 그에 못지않게 힘든 생활을 했던 이들이 바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다. 하루하루 생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면서도, 귀 먹고 말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삶이 어떠했을까? 그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갈 수도 없었다. 귀가 안 들리니 예수님이 오셨음을 어찌 알 수 있으며, 말할 수 없으니 알았어도 자신을 예수님께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자신도 힘든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어부들이나 목자들이 어려운 삶을 살아갔던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로마의 압제 때문이었다. 바로 악한 권력 구조 때문에 힘없는 사람들이 노예처럼 살아간다. 오늘날에도 악한 권력에 부당하게 짓밟히고 억울함을 당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나를 좀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다. 아무도 봐주지 않기에 그들은 굴뚝에 올라가고, 크레인에 올라가고, CCTV 철탑에 올라가서 외친다.
그러한 외침에 교회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이웃이 되어 주어야할 교회는 가난한 자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 불의 앞에 침묵하고 만다. 빵을 달라하면 주면서도 사회구조를 비난하면 정치와 연관시키며 그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안식일에 회당 가운데 모여 있는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임과 동시에 회개와 돌이킴이 없다면 심판의 말씀일 수 있는 아주 두려운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예배당 건물 안에 앉아 전통에 얽매여,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지 않는 눈멀고, 귀 먹고, 침묵하는 교회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마지막에 바빠서 정리가 잘 안되었네요. 짧게 정리한다는 것이 쓰다보니 또.... 스크롤의 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