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최선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9명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2명의 형님들과 2명의 누나들, 나와 동생이 가족 구성원이였다. 9명이 함께 한 집에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절에 아침 식사를 할 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상에서 식사를 하셨고, 4형제가 한 상에서 그리고 여자들인 어머니와 누나들은 상이 아닌 쟁반에 밥과 반찬을 올려놓고 식사를 하셨다. 식사 때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셔서 밥상 앞에 앉으시고 숟가락을 먼저 드셔야 나머지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밥상이 큰방에 준비되어 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직 오시지 않았을 때는 나나 동생이 마루에 나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이였던 겨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 분들에게 연락을 취할 때, 지금처럼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직접 부고장을 들고 다니면서 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아버지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는데 지금처럼 장례식장에서 하지 않고 집에서 문상객을 맞이하였다. 앞마당에 대형 텐트를 치고, 한 마을에 사시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문상객들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렸다. 3일째가 되어 출상하는 날도 도로에 많은 눈이 쌓여서 상여 앞에서 눈을 치우며 앞산으로 갔다.
어머니는 2001년 봄에 돌아가셨다. 토요일,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만 계시는 고향집에 나 혼자 내려가서 자고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광주에 있는 교회에 출석했다. 다음날인 월요일 오후에 학교에서 퇴근하려할 때 고향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이, 자네 어머니가 냇가에서 돌아가셨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내과로 가셨네.”라고 이해했다. 며칠 전 어버이날에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에 있는 병원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작은형님으로부터 ‘어머니가 앞냇가에서 빨래하시다가 돌아가셔서 구급차로 ○○병원으로 가신다고 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셨고 전화기의 숫자 버튼을 직접 누르시지 못했다. 전화기의 메모리 버튼에 아들딸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해 두면 순서대로 기억하시고 누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도 3년을 더 사신 후 여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골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광주를 모시고 와서 광주에 사는 3형제가 4개월씩 돌아가며 모셨다. 처음 광주로 오셨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가끔 생각나실 때, “니그 어머니가 왜 전화 한 통화가 없다냐?” 하시곤 하셨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 계실 때는 틈이 나는 대로 나들이를 시켜드렸다. 추월산 아래 담양댐으로, 소쇄원으로, 화순으로... 어머니가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았으면 더 오래 사셨을 거라는 많은 아쉬움이 있어서, 아버지가 아프다고 하시면 전남대병원으로 모시고 가 할 수 있는 검사들을 모두 받으시도록 하였다.
최근 시골집에 가서 대청에 있는 빛바랜 앨범 속에서 오래된 사진들을 보았다. 1980년도의 아버지 회갑잔치 사진들 중에는 일가친척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보니 6남매중 큰형님과 큰누나 그리고 작은누나만 결혼 하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속에 큰 형수님과 큰누나 남편인 큰 매형, 작은 누나 남편인 작은 매형이 있었다. 오래된 사진들 중에는 큰 누나가 시집갈 때의 사진도 있었다. 큰 누나는 담양 대덕으로 시집을 가셨는데, 시골집에서 전통혼례식을 올리고 3일 후에 대덕으로 가셨는데 그 시절에 택시를 타고 가셨는지 택시 사진도 보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에게 교육하셨다. “딸이든 아들이든 세 명은 되어야 한다.” 그 덕분인지 우리 6남매는 모두 결혼하여 3명씩의 자녀를 두었다. 그것도 아들만 3명, 딸만 3명이 아니라 아들과 딸을 포함하여 3명씩이다. 다만 막내인 남동생만 자녀가 둘이다. 큰형님과 작은 형님이 결혼하셨을 때는 형수님들이 3개월 이상을 시골집에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결혼 후에 바로 분가해 버리면 며느리와 시부모가 평생 서먹서먹할 수 있으니 결혼 직후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방침이셨다. 이 덕분이지 우리 집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찾아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6남매가 자주 모였다. 설날과 추석 때는 어렵지만 봄철의 어머니의 생신날과 가을철의 아버지의 생신날에는 6남매와 사위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까지 함께 모였다. 모임도 한 집에서만 갖지 않고 6남매집을 순회하며 가졌다. 다음날에는 광한루, 금산사, 통일전망대 등 주변 관광지를 구경한 일들이 영화의 필름처럼 지나간다. 이렇게 자주 모였던 형제들이 부모님이 모두 떠나시고 난 뒤에는 잘 모이지 않는다. 설날과 추석에 고향으로 성묘갈 때도 서울에 사는 동생 가족은 거의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2년전, 6남매 부부의 계모임에서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가 태풍으로 여행지를 충남안면도로 장소를 바꿔서 2박3일 다녀온 것이 가장 최근의 모임이다. 다들 자주 모이자고 하시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더 나이들기 전에 모임의 기회를 자주 갖도록 해야 겠다. 오는 5월 5일이면 부모님 기일인데 이날이라도 6남매가 모두 모였으면 좋겠다.
첫댓글 할아버지에서부터 6남매까지 대가족을 짤막한 글에서 다 다루다 보면 나열하는 식이 돼서 깊은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 글은 그런 문제를 잘 피해 갔네요. 할아버지와 부모, 6남매의 성격이 살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