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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 시 76:1-12 (95)
이 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찬양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시는 앗수르의 신헤립이 유다를 침입했을 때 하나님께서 산헤립의 군대를 패하게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악한 자의 공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꺾고 자기 백성을 지키심으로써 백성들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대적들의 위세가 아무리 당당하고 그들의 실력과 무기가 강해도, 결국에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 시온의 침략자들을 물리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3)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1)
둘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2) 살렘과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거하는 곳,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호하십니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 하셨도다."(3) 시인은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서 큰 군사적 승리를 얻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찬양하도록 합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을 침으로써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십 팔만오천명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적들이 자랑하던 화살, 방패, 칼 등, 온갖 무기들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전쟁은 앗수르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2.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4-6)
첫째, 대적의 요새도 그분을 막지 못합니다.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4) 자신의 힘을 믿고 악한 횡포를 자행하는 자들을 패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존귀를 나타내십니다. 둘째, 대적의 용사들도 그분을 막지 못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5) 앗수르인들은 약탈을 위해 먼 땅까지 침입했지만 가진 것을 빼앗기고 패배를 합니다. 셋째, 어떤 무기로도 그분을 막지 못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6) 야곱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교만한 대적을 패하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서도 깊은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대적들이 지금은 고요한 죽음의 침묵 속에 있습니다. 최고의 군대도, 치밀한 계획도, 위력 있는 무기도 하나님의 꾸짖음 앞에서는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3.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7-10)
첫째,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외를 받으실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께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외 받을 이시니"란 말은 재판장 앞에서 죄수가 갖는 공포나 주인 앞에서 두려워하는 노예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깨닫는 자가 갖는 놀라움과 존경의 태도입니다. 그분의 위대함과 능력 때문에 생기는 존경심과 경외심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주"를 반복해서 말한 것은 "오직 주님만이" 경외할 분이라는 사실을 시인이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라는 표현에서 선다는 것은 넘어진다는 것의 반대로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생각만 해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분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땅의 모든 악한 자들을 향하여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진노가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악에 대한 의로우신 진노는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물의 최종 판결자가 되십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8) 앗수르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십팔만 오천 명이나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의 구원이 되십니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9) 여기서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갖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겸손히 주의 구원을 바라며 인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온유함을 지닌 자의 태도에는 하나님께 대한 것과 인간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를 찬송으로 바꾸십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10) 어떻게 해서 사람의 분노가 찬양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악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해 갖고 있는 적의를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는 기회를 삼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 경배하라 하십니다.(11-12)
첫째, 하나님의 심판으로 구원을 얻은 백성에게 서원 제물을 바치라 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11) 둘째, 땅의 모든 왕들이 그분께 굴복합니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12) 여기 고관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 일어났던 왕들입니다. 그들의 기를 꺾는다는 말은 그들의 교만한 마음과 어리석은 생각을 꺾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정원사가 나뭇가지를 가위로 잘라내듯 하나께서는 가장 용맹스런 용사나 왕일지라도 그분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 없어 절망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처한 환경이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고,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무너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한 순간에 그들을 멸하시고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라는 이 시편의 말처럼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우리의 모든 곤고와 역경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함 / 시 77:1-20 (343)
이 시는 극심한 환난이 계속됨으로써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이 고통과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난 속에서도 과거에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다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바라고 믿음을 회복합니다. 이처럼 고난에 처하여 하나님의 기사와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고난 중에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1. 고난에 처한 자의 내적 갈등입니다.(1-9)
첫째, 시인은 매우 절박하게 부르짖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지연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로다."(1) 이 구절은 단순한 고백이라기보다도 이제껏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고 고통이 계속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계속 진지하고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시인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고 밤중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2)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기 위해 밤에도 자지 않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셋째,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속히 임하지 않으므로 시인은 극도로 심령이 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3)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시인은 그렇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불안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넷째, 시인은 고통이 너무도 심해 잠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4) 시인은 고통으로 인해 잠 못 이룰 뿐만 아니라 말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기에 눈도 붙이지 못하고 말조차 할 수 없다고 했는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섯째, 자신의 고통과 하나님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시인은 이전의 경험을 생각합니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5-6) 시인은 과거의 날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섯째, 시인은 응답받지 못함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자 이로 인해서 마음에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그를 버리셨고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환난에서 건져주시기를 바라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2.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여 용기를 얻습니다.(10-12)
첫째, 고난 중에 시인은 믿음의 결단을 고백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10-11) 시인은 거룩하신 분의 사랑에 관해 의심하고, 거룩하신 분의 약속의 진실성에 대해 잠시나마 회의를 가졌던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것을 의지한 시인은 주의 일을 깊이 묵상합니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2) 이제 그의 초점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으로 바뀝니다. 그는 주의 모든 일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몰입되었던 자신의 문제와 근심에서 벗어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합니다.(13-15)
첫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13)
둘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자신을 게시하시는 분입니다.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14)
하나님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의 기록은 우주의 참된 역사이며 그 기록의 각 부분은 경이롭고 놀라운 일들로 충만합니다.
셋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역사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15) 이 구절에서 "속량"이란 말은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팔"은 힘을 의미합니다. "야곱과 요셉"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에브라임과 함께 때로 북쪽 왕국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다른 구절에서 요셉은 모든 야곱의 후손을 대표합니다.
4. 출애굽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회상합니다.(16-20)
첫째,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16) 시인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된 상태에서 벗어난 사건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홍해가에서 백성들을 기다리게 하시던 때를 기억했습니다. 백성들은 앞에 놓인 물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하늘과 땅에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17-18) 하늘의 요란한 천둥과 번개와 폭풍우, 이 모든 자연 현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19)
넷째,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이 손으로 인도하였나이다."(20) 하나님은 바닷길을 여시고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널 때까지 바다가 열려 있게 하셨습니다. 애굽 군대들도 겁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기 위해 그 바다 길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이지만, 그 길이 애굽 군대에게는 심판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함으로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서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현재도 이 어려움 가운데서 도우실 것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처한 상황에 우리의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의 환난 속에서 도우셨던 하나님이 현재의 환난 속에서도 도우실 것을 믿고 그분께 시선을 고정 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시 18:6절에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환난 중이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고 부르짖어 간구하므로 하나님께 응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역사가 주는 여호와 신앙의 당위성 / 시 78:1-72 (379)
아삽이 쓴 이 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영적 교훈을 제공해 주는 역사시이자 교훈시입니다. 그런데 노래로 만들어 예배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하도록 한 이 민족사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들의 불신앙과 반역을 다룬 것입니다. 특히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할 때부터 다윗이 통치하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언급하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사의 내용보다는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들의 그릇된 자세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1.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도록 초청합니다.(1-8)
첫째, 시인은 먼저 교훈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교훈(율법, 말씀)을 듣는 데서 출발합니다.
둘째, 귀를 기울이라고 요청한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 전에 시인은 경건한 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시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백성이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해 자주, 그리고 철저히 가르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받은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다음 세대에게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찬양할 수 있도록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주님을 바로 알고 섬기도록 가르치는 것은 구체적인 교훈을 주므로 대를 이어 가르쳐야 합니다.
넷째, 시인은 경건한 자의 책임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를 설명합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야 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합니다. 1) 주님을 기억하며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2) 실패한 선조들을 따르지 않기 위함입니다.
2. 멸망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전합니다.(9-16)
첫째, 먼저 에브라임의 배신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이스라엘에게 유혹적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1) 우상은 물질적 대상으로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우상은 옮겨지고 통제되고 가두어 둘 수 있습니다. 3) 이방신들은 풍년을 가져오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4) 어떤 신들은 출산의 복을 주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5) 우상숭배는 모든 이방인들 문화의 표준입니다.
둘째,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잊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잊었습니다. 2) 애굽에서 구원 받은 것을 잊었습니다. 3) 광야에서 이적으로 물 주심을 잊었습니다.
3. 광야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반역을 전합니다.(17-42)
첫째, 시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에 대해 말합니다. 둘째, 그들의 불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21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셋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불평하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늘 양식인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에게 매우 적절한 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비 되어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23)는 큰 복을 하늘에서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법을 소유한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회개합니다. 성경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생명을 취하는 심판을 행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섯째,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회개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는 입에 머물렀으며 진실된 마음이 결여되었습니다. 일곱째, 그들의 거짓된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 벌을 받고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계속되는 자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역과 불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역사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이적들과 그들의 반역,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4. 애굽에서 행한 구원을 다시 회고합니다.(43-53)
이 단락에서는 애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다시 회고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재앙들 중에서 일곱 가지를 언급하는데 일어난 순서대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재앙-강물이 피로 변합니다. 네 번째 재앙-쇠파리 떼, 두 번째 재앙-개구리, 여덟 번째 재앙-황충, 메뚜기, 일곱 번째 재앙-우박, 서리, 여섯 번째 재앙-전염병(악성 종기) 열 번째 재앙-장자의 죽음, 이렇게 열 가지 재앙을 받게 된 것은 계속적인 바로의 저항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은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5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진노를 드러내실 길을 닦아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노를 위하여 통로를 터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떠나보내기를 계속 거절함으로써 결국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가 죽게 되는 열 번째 재앙까지 불러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의 장막"(51)이란 애굽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이어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떼를 돌보는 목자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지도하셨습니다.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인도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끄시기에 위험한 광야에서도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한 구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인도와 보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위험한 곳을 안전하게 통과하게 하시며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필요한 약식을 공급하시며 돌보셨습니다.
5. 가나안 정착한 이후의 범죄를 지적합니다.(54-64)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소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광야를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인도하시고 약속된 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둘째,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들의 불성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실로를 떠나셨고 이방으로 그들을 침략하게 하셨습니다. 1)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습니다. 2) 범죄의 결과로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3) 범죄의 결과로 적에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4) 범죄의 결과로 제사장도 죽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베푸신 회복의 은총을 증거 합니다.(65-72)
시인은 끝으로 유다 지파를 택해 돌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아니라 유다 지파를 선택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실로가 아니라 시온산을 선택하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완전한 사람입니다. 완전함은 성실하게 한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능력의 사람입니다. 이 능력은 능숙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지도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과 능숙함입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기 원하는 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까?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셔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잘 감당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을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 시 79:1-13 (370)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대적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당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당한 것을 탄식하며, 적들을 징벌함으로써 다시 주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고 이방국가들을 사용하신 것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1. 멸망의 비참함에 대해 탄식합니다.(1-4)
첫째,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적들이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침략자들은 이스라엘 땅에 물밀듯 쳐들어와서 온 땅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처참하고 절망적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으나 그 시체를 묻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이 조소를 당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4) 살아남은 자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낮선 땅에 끌려가 이방인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고, 사람에 의해 조롱당하는 비참함 속에서 탄식했습니다.
2.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5-7)
첫째,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진노의 기간이 단축되기를 호소합니다. 가슴을 찢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은 노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진노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될 것인지, 언제까지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둘째,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 단축되기를 호소하면서 압제하는 적들에 대한 징벌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방 나라들의 잔인한 살육과 모욕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모독이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해 일어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왕국들 위에 심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스라엘도 바로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기업이요 언약 안에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인데 돌아서서 그분을 배척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심판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이 기도는 실제로 응답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다룬 바벨론을 징벌하셨습니다. 결국 바벨론은 메데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3. 용서와 도우심을 간구합니다.(8-9)
첫째, 시인은 조상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사오니"(8) 이는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둘째, 시인이 무엇보다 슬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힘을 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을 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 시인이 자신들의 구원을 호소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심정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위해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백성은 그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은 파괴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교정하여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이지만 그분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도록 버리셨다면 이방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방국가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것이고 시인은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도우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호소한 경우는 모세에게도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죄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이름에 호소했습니다. 만일 백성을 광야에서 다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새 민족을 일으키신다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으셔서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후 광야에서 다 죽이셨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는 호소였습니다.
4. 죄인들이 처벌받도록 호소합니다.(10-11)
첫째, 시인이 대적들의 처벌을 호소하는 근거는 그들이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10)
둘째, 시인은 또한 자신의 민족을 포로로 삼은 자들에 대한 처벌을 호소합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갇힌 자의 딱한 사정을 돌아보시고 보호해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11)
5. 회복을 소망하며 찬양을 서원합니다.(12-13)
주님의 구원을 확신한 시인은 대적들이 주를 훼방한 것을 심판해 주시도록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소망을 선언합니다.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2-13) 여기서 시인이 요청한 일곱 배의 보상은 충분한 정의에 대한 관심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복수하기를 원했던 라멕과는 달리, 하나님을 비방한 자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공의의 집행을 요구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요구를 통해서 그들의 편에 서실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 땅으로부터 옮겨져 절망스런 상태에 있으나,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압제자로부터 구원과 자신들의 죄의 용서를 기대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님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헌신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장 깊은 재난의 시간에도 하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지라도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치료하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갖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복을 위한 기도 / 시 80:1-19 (310)
이방 군대에 의해 파괴된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배경에 대한 견해로는 대체로 북이스라엘의 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봅니다. 이는 북왕국을 대표하는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에 대해 언급이 있는 반면 "예루살렘"이란 말이 나오지 않으며, 또 70인역 성경에서 이 시편에 "앗수르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주전 721년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과 관련되어 있으나, 아직 북스라엘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은 시점으로 봅니다.
1. 북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구합니다.(1-3)
첫째,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1)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는 모두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셋째, 포로 된 상태에서 회복되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3) 이 구절은 본 시편에서 세 번이나 등장하는 후렴구로서 "우리를 돌이키라"는 말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룁니다.(4-7)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시인은 황폐된 자신들의 처지를 주께 아룁니다. 이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뢰는 것입니다. 첫째. 시인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시인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토로합니다. 셋째. 시인은 이웃으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고합니다.
3.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자비를 기억합니다.(8-11)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는 물론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인도해 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여러 민족들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분의 백성을 위해 땅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신 일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를 위해 그 땅에 있던 일곱 나라의 뿌리가 뽑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를 돌보듯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포도나무가 열매 맺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포도나무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주님은 그 나무를 잘라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다시 훈련시키셔야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9-11) 주께서는 심으셨을 뿐만 아니라 뿌리를 굳건히 내리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4.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었음을 아룁니다.(12-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셨지만 이제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황폐된 실상을 그 이유와 함께 말씀드립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는 담을 허셨기 때문에 황폐되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12) 포도나무의 죄악으로 인해서 그분은 포도나무를 보호하는 담을 허무셨습니다.
5.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14-17)
첫째, 하나님의 돌이키심을 간청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14) 둘째, 하나님의 소유를 돌보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15)
셋째, 백성을 파멸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했습니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16) 포도나무는 단순히 찍힘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은 마치 삼림에 불을 놓은 것처럼 모조리 탔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위해 간청했습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17) 오른쪽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장 영예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언약 가운데 그분과 연합한 사람입니다.
6. 구원을 확신하고 헌신을 결단합니다.(18-19)
마지막으로 시인은 구원의 응답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8) 시인은 백성을 대표해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셔서 회복하게 하시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약속드립니다. 주에게서 물러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러간다."는 것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배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해 주신다면 변함없이 충성하겠다는 서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고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함으로써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과 함께 시인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자신의 결단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제 그들은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시기 호소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시인은 최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구원의 손을 향해 부르짖는 자기 백성에 대해 주님은 영원히 진노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향해 참된 자비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주이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기쁨과 평안과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