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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지릉(智陵)
정의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인 익조 이행리(李行里)의 능.
개설
이행리는 덕원, 알동, 안변 등지에 거주하였는데, 사후에 안변에 안장되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그를 익조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호를 지릉이라 하였다.
조성 경위
이행리는 목조이안사(李安社)의 넷째 아들이다. 함경도 덕원에서 태어났으나, 원나라로 귀화한 목조를 따라 두만강 건너편 알동에 거주하였다. 이안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지위를 이어받아 천호(千戶)에 봉해졌지만, 토착 세력의 위협으로 인해 적도(赤島)를 거쳐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하였다.
이행리의 첫 번째 부인은 손씨이고, 손씨의 사후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 나중에 정숙왕후(貞淑王后)로 추봉되는 최씨이다. 최씨가 등주의 호장(戶長)최기열(崔基烈)의 딸인 까닭에 이행리는 이후 등주 인근에 거처하였으며, 사후에 안변부의 서곡현 봉룡역 북동에 안장되었다. 태조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자신의 4대조를 왕으로 추존하고 8월에 그들의 능에 제사를 지내면서 능호를 올렸는데, 이때 이행리는 익조로 추존되고 그의 무덤은 지릉으로 추봉되었다.
조성 상황
1392년 10월에는 지릉의 관리를 맡아볼 능지기와 권무(權務) 2명, 수호군 5호(戶)를 두었으며, 재궁을 건축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지릉에는 혼유석 1개, 장명등 1개,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등의 상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정자각과 수라청, 홍살문 등이 건립되어 있었고, 홍살문 밖에는 전사청과 제기고, 안향청, 재실 등의 부속 건물과 표석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지릉의 정자각에 익조의 위판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6년(세종 8)에 지릉의 위판을 철거하고, 정자각의 남쪽과 북쪽 벽을 평소에는 장자(障子)로 막아 두었다가 제사 때 틔워 놓고 제사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능지기와는 별도로 승려로 하여금 능을 수호하게 하였다. 지릉에 승려를 두는 관례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다가 1726년(영조 2)에 폐지되었다.
변천
지릉은 여러 번 화재를 당하였다. 성종대에는 지릉을 수호하는 승려 홍수가 비리로 인해 쫓겨난 뒤 그곳 참봉(參奉)을 해치려고 지릉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뒤 1581년(선조 14), 1624년(인조 2), 1630년(인조 8)에도 능에 화재가 나서 왕이 변복(變服)하고 애통해하며 자신을 경계하였다. 1732년(영조 8)에 정자각을 중수하였으며, 고종대에는 함경도 지역의 왕릉들을 보수하면서 지릉도 함께 수리하였다.
관련 사항
1445년(세종 27)에 함길도 덕원군 백성들이 올린 상소에는, 덕원에 거처하던 익조가 사후에 그곳 적전사(赤田社)에 장사되었다가 나중에 안변으로 이장되었다는 주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한편, 익조 정비(貞妃)의 능인 숙릉(淑陵)은 함경남도 문천에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지릉정자각개건의궤(智陵丁字閣改建儀軌)』
진전(眞殿)
정의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다가 정해진 날 어진을 벽에 걸고 제사 드리던 건물.
개설
고려시대에는 궁궐 안 경령전(景靈殿)에 태조와 직계 4대 선조의 어진을 모셔 놓고 정월 초하루, 추석, 단오 등에 왕이 친히 전물(奠物)을 올리고 의례를 지냈다. 궁궐 밖 여러 절에도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화나 초상 조각을 모셔 놓고 불교식으로 재를 올리는 건물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유풍에 따라 왕대마다 왕이나 왕비를 위한 사당 혹은 진전사원(眞殿寺院)에 초상화를 봉안하고 의례를 지냈다. 조선전기에는 함흥, 경주, 평양, 전주, 개성 등 5곳에 세워진 태조진전(太祖眞殿)이 진전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외의 다른 왕과 비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의례를 올리던 진전은 세종 때 통폐합된 뒤 유교식 사당으로 변모되었다. 즉, 왕과 비의 초상화는 경복궁 내에 새로 세운 선원전(璿源殿)에 궤 안에 넣은 채 보관되었다. 대신에 태조와 직계 4대의 위패를 봉안할 문소전(文昭殿)을 경복궁 안에 새로 세우고 유교식 제사를 올림으로써 사실상 태조진전을 제외한 진전은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려 낸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세조의 잠저(潛邸)에 봉안하고 남별전(南別殿)이라고 불렀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18일]. 여기에서 조선전기와 구별되는 다른 방식의 진전이 시작되었다. 숙종대에는 창덕궁 안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전기 선원전과 구별되는 새로운 진전이 정립되었다[『숙종실록』 39년 4월 11일]. 숙종은 1690년(숙종 16) 남별전에 영희전(永禧殿)이라는 호를 부여하였다[『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이후 진전은 1908년(융희 2)에 선원전, 영희전 그리고 모든 봉안처의 어진을 한곳으로 통폐합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진전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창덕궁의 선원전과 신선원전(新璿源殿) 그리고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전에 봉안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왕의 초상화도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국립고궁박물관의 영조 어진, 고종 어진, 순종 어진 등만이 남아 있다.
내용 및 특징
진전은 왕의 초상을 봉안한 사묘로서 왕실의 제례를 대표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관찬(官撰) 기록이 적지 않았다. 조선전기의 태조 진전에 대해서는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진전도(眞殿圖)」와 간략한 설명이 실려 있어서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궤와 같은 문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건물 내외의 시설이나 건축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조선후기에는 함흥 준원전, 전주 경기전, 평양영숭전(永崇殿) 등이 회복되었으나 경기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때문에 규모와 격식에 대해서는 경기전을 기준으로 짐작해 볼 뿐이다.
대신 도성 안에 세워진 영희전이나 궁궐 안에 세워진 선원전에 대해서는 의궤와 같은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영희전의 경우 도감을 설치하여 건축 공사를 시행하고 의궤를 편찬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궐내 진전인 선원전의 경우에는 도감을 설치하지 않았고, 비용도 국가 기관인 호조(戶曹)가 아니라 왕실 사고(私庫)인 내탕(內帑)에서 지출하였고 의궤도 편찬하지 않았다. 1900년(광무 4)의 경복궁·창덕궁 제일실 증건 공사와, 경운궁 선원전 중건 공사에 대해서만 도감을 설치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의궤를 편찬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아직 왕실의 진전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조의 계성전(啓聖殿),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의안전(仁安殿),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인소전(仁昭殿), 태조와 신의왕후의 어진을 합봉(合奉)한 문소전, 태종의 광효전(光孝殿) 등이 난립하였다. 그러다 세종이 어진 봉안처인 선원전과 원묘인 문소전을 세우면서 진전을 통폐합한 이래 진전 제도가 확립되었다.
태조의 어진만을 모시고 의례를 거행하던 외방 진전 5곳은 조선전기에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경기전, 준원전, 영숭전만이 회복되는 등 그 상징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도성 안에 영희전, 창덕궁 안에 선원전이 진전으로 확립되면서 태조 이하 역대 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진전이 증건되었다. 생전에 왕의 영정을 그린 경우, 특정 장소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는 그곳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숙종 어진과 영조 어진을 각각 봉안한 강화도의 장녕전(長寧殿)과 만녕전(萬寧殿), 정조 어진을 봉안한 화성의 화령전(華寧殿), 1836년(헌종 2)에 순조 어진과 익종 어진을 봉안한 경우궁(景祐宮) 성일헌(誠一軒), 철종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 궁궐 내의 여러 건물, 예컨대 경희궁태녕전(泰寧殿), 창덕궁주합루(宙合樓), 경복궁집옥재(集玉齋) 등도 임시로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희전은 원래 세조의 잠저였으나,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이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영정을 모시고 봉자전(奉慈殿)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비로소 제사와 관련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윤3월 6일]. 같은 해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여 종묘에 부묘한 뒤에는 비워 두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중에 무사했던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임시로 봉안하면서 남별전으로 불렀다. 강화도에 새로 영숭전, 봉선전(奉先殿)을 지은 뒤 어진을 이곳으로 옮겼고 남별전은 다시 비게 되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원종의 어진을 남별전 뒤에 새로 지은 온돌방에 봉안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불렀다[『인조실록』 10년 3월 9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의 진전 두 곳이 화를 입자, 이듬해에 심하게 훼손된 태조 어진은 땅에 묻었다. 세조 어진은 남별전 주벽에 봉안하였고 원종 어진은 동벽에 봉안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도감을 설치하고 크게 수리한 남별전의 내부에는 오봉산병풍(五峯山屛風), 모란병풍(牡丹屛風), 용상(龍床), 욕석(褥席), 전내염장(殿內簾帳), 상탁(床卓)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이때 어진 봉안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으리라고 판단된다. 1610년부터 1670년(현종 11)까지 60여 년에 걸쳐 남별전에서 시행된 건축 공사에 대해서는 『영희전별등록(永禧殿別謄錄)』에, 1676년(숙종 2)의 수리에 대해서는 『남별전중건청의궤(南別殿重建廳儀軌)』에, 1748년(영조 24)과 1772년(영조 48)의 두 차례에 걸친 중수에 대해서는 『진전중수영건청의궤(眞殿重修營建廳儀軌)』에, 1858년(철종 9)의 북변 1실 증건에 대해서는 『남전증건도감의궤(南殿增建都監儀軌)』에 잘 정리되어 있다.
1900년(광무 4)에는 남별전이 경모궁 터로 옮겨졌는데 이때 정전에 1실을 증건하였다. 이로써 경운궁, 경복궁, 창덕궁 등 여러 궁의 선원전과 함께 신실 7실을 갖춘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908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사제(祀祭) 체계가 와해될 때, 어진이 모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지면서 폐기되고 국유화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창릉(昌陵)
정의
조선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예종은 1469년(예종 1) 11월 28일 경복궁 자미당에서 승하하였다. 능호를 창릉이라고 하고 도성의 서편 고양(高陽)에 자리한 경릉(敬陵)의 북쪽 언덕에 능침을 조성하였으며, 1470년(성종 1) 2월 5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에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예종의 능 동쪽에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능침을 조성하고 1499년 2월 14일에 안장하였다.
서오릉 경역에 처음으로 창릉이 조성된 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이 조성되고 다시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릉(明陵),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의 홍릉(弘陵) 등이 자리 잡게 되면서 숙종과 영조 연간에 왕의 행차가 잦았다. 왕이 서오릉에 행행할 때는 서오릉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창릉부터 봉심하였다.
조성 경위
1469년에 예종이 승하함에 따라 창릉을 조성하였는데, 봉분 주변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 12칸을 배치하고 동·서·북 삼면을 두르는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봉분의 남쪽에는 혼유석, 장명등 1좌, 망주석 1쌍을 배치하였다. 석상은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마석 1쌍, 양석 1쌍, 호석 2쌍을 두었다. 능침 남쪽 약 67보 아래에 정자각을 세우고, 정자각의 남서쪽에 수라간 2칸, 남동쪽에 수복방 2칸을 조성하였다. 망료위와 홍살문 망배위도 건립하였다.
1499년(연산군 5)에 안순왕후의 능침을 조성하면서, 예종릉에 마련되었던 정자각이 왕과 왕후의 능침 사이의 중간지점으로 옮겨 짓게 된다. 이때 하나의 능역 안에 왕과 왕후의 제사를 합하여 모실 때 정자각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연산군일기』 5년 1월 22일]. 창릉의 사례는 이미 예종의 신주를 모시고 길례를 지내고 있는 정자각이 있으며, 이후 안순왕후의 상례가 행해졌다. 전례로 제시되는 것은 광릉(光陵)과 헌릉(獻陵)·영릉(英陵)의 사례였다.
헌릉과 영릉의 사례에서는 모두 왕후가 먼저 상례를 치르고 이후에 왕의 상례가 이루어졌으므로, 뒤에 설행되는 왕에게 맞추어 상례부터 하나의 정자각에서 합설하여 제례를 행했다. 반면 광릉의 경우는 세조의 국상이 후에 이루어졌더라도 가정자각(假丁字閣)을 따로 지어 상례를 마친 후 길례를 지낼 때부터 정자각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합설한 사례이다. 이 같은 논의를 통해 산릉에서 이루어지는 흉례와 길례의 공간인 정자각과 가정자각의 용례를 결정하고 정형화 할 수 있었다.
정자각의 북동쪽에는 표석(表石)을 세웠는데, 1755년(영조 31)에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한 칸 지었다. 정자각은 1756년(영조 32)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영조실록』 32년 4월 25일], 그해 5월에 중건도감(重建都監)을 조직하고 당상으로 판서(判書) 이태중(李台重), 참판(參判) 홍익삼(洪益三), 감역으로 참봉 홍계우(洪啓祐)를 임명하여 중건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정전은 정면 3칸 배위청 2칸으로 조성하였다.
재실은 원래 홍릉 정자각 아래 오른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1757년(영조 33)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창릉 홍살문 서쪽 180보 위치로 이전되었다. 1765년(영조 41)에 이덕용이 편찬한 『창릉등록(昌陵謄錄)』에는 정자각의 규모에 관한 기록과 재실 간가도(間架圖) 형식의 그림이 수록되어 당시 창릉 내에 조성된 건축 규모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조성상황
오늘날에는 재실과 수라간, 수복방 등이 모두 소실되고,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정자각과 1칸의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창릉등록(昌陵謄錄)』
『춘관통고(春官通考)』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총호사(總護使)
정의
국상(國喪)에 관한 의식을 주관하던 임시 벼슬.
개설
국상에 관한 의식을 주관하던 임시 벼슬로 건국 초기에는 왕이 삼정승 중 한 명을 임명했다. 기록에 따라 ‘총호사(摠護使)’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국상이 발생할 경우 우선 예조는 상례에 관계된 모든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어 관련된 의례를 준비하여 시행하도록 조치했다. 국상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음악과 시장이 중지되었고, 혼인 및 도살 등이 금지되었다. 조정에서는 빈전도감(殯殿都監)·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여 장례에 관계된 일체의 일을 주관하였다. 이 세 도감의 도제조(都提調)에는 보통 좌의정이 임명되었는데, 여기서 도제조를 바로 ‘총호사(總護使)’라 불렀다. 총호사는 장례에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했다.
또한 관리 중에 1명을 교도돈체사(橋道頓遞使)로 임명해 장례에 관련된 교량과 도로의 수리를 담당하게 했다. 세종대 이후 보통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교도돈체사로 임명하는 것이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도돈체사는 태종대까지는 교량돈체사(橋梁頓遞使)로 지칭되었는데 당시는 판한성부사가 맡는 임시직이 아니었다. 이는 모두 세종대 이후 정비된 모습이다.
담당 직무
『세종실록』 「오례」에 따르면 빈전도감은 습(襲)·염(斂)·성빈(成殯)·성복(成服)·혼전(魂殿)·배비(排備) 등의 일을 담당했다. 제조(提調) 3인 중 1인은 예조 판서를 임명했고, 낭청(郎廳) 6인 중 1인은 예조 낭청을 임명해서 충당했다.
국장도감은 국상 당일에 조직되어 장례 뒤 종묘에 배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던 사당이었던 혼전에 신주(神主)를 모셔오는 우제(虞祭)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상례와 장례에 관련된 의전·재정·시설·문한(文翰) 등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재궁(梓宮)·거여(車轝)·책보(冊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기(明器)·길흉의장(吉凶儀仗)·상유(喪帷)·포연(鋪筵)·제기(祭器)·제전(祭奠)·반우(返虞) 등의 일을 담당했다. 국장도감의 제조 3인은 호조 판서·예조 판서·선공감 제조를 임명했다. 낭청 8인 중 4인은 예조 낭청·공조 낭청·선공감(繕工監)·제용감(濟用監)의 관원으로 임명해서 충당했다.
마지막으로 산릉도감은 현궁(玄宮)·정자각(丁字閣)·재방(齋坊) 영조(營造) 등 능 조성과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 제조 3인 중 2인에 공조 판서와 선공감 제조를 임명했다. 낭청 10인 중 2인은 문신(文臣)과 선공감 관원으로 임명해서 충당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총호사가 임명되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태종대이다. 당시 태종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하륜(河崙)을 총호사에 임명했고, 이조 판서이직(李稷)을 산릉사(山陵使)로, 안성군(安城君)이숙번(李叔蕃)을 교량돈체사로 임명했다[『태종실록』 8년 8월 17일]. 이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아직 국상에 3도감의 도제조로 좌의정을 임명하고, 판한성부사를 교량돈체사로 임명하는 원칙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후 세종이 즉위하면서 국상을 진행하는 임시 관직의 임무를 조정하게 되었다. 우선 국장도감 도제조를 총호사라 하여 상장에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하게 하고, 산릉도감 도제조는 산릉사라 하여 산릉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도록 조치했다. 아울러 판한성부사를 교도돈체사라 하여 교량과 도로의 수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9일]. 아직 3도감의 도제조로 좌의정을 임명하는 원칙이 수립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총호사를 좌의정으로 임명해서 3도감을 총괄해 국상을 치르도록 하는 원칙이 정립된 시점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종실록』 「오례」에서 이후 국상 의례의 원칙이 되는 사항들이 모두 소개되고 있어 관련된 규정이 1420년(세종 2) 이후 완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선조국장도감일이방의궤(宣祖國葬都監一二房儀軌)』
『인목왕후국장도감의궤(仁穆王后國葬都監儀軌)』
『정조대왕국장도감의궤(正祖大王國葬都監儀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태릉(泰陵)
정의
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문정왕후윤씨는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이다. 명종이 1545년(명종 즉위)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동생 윤원형(尹元衡) 등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태릉은 이러한 문정왕후의 강력한 권력이 반영된 큰 규모의 능이다. 혼유석은 물론이고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능에 비해 큰데, 다만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 주듯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곁에 묻히기 위해 생전에 무리하게 정릉을 옮기기까지 했지만, 결국에는 홀로 안장되었다. 그 대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康陵)이 같은 능역에 조성되었다. 이후 태릉은 1960년대에 능역 내에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왕릉으로서의 면모를 잃었다.
조성 경위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들의 요구에 따라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하였다. 왕후의 부친인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을 반대하다 반정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중종은 첫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를 맞았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 10)에, 뒷날 인종으로 등극하는 세자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일찍 승하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장경왕후의 능침 곁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 12)에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 뒤 1545년에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1562년(명종 17)에, 장경왕후의 능은 그대로 둔 채 중종의 능만을 한강 남쪽 봉은사(奉恩寺) 옆으로 옮겼다[『명종실록』 17년 1월 8일]. 이는 자신이 죽은 뒤 중종과 함께 묻히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전한다. 실제로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명종은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하고[『명종실록』 20년 4월 12일], 정릉 곁에 능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가까이에 있는 한강 지류가 자주 범람하여 새로 능을 조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릉을 본래 있던 원당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많았지만, 명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다만 정릉 곁에 능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포기하고, 도성 북쪽 노원(蘆原)에 터를 마련하고 능호를 태릉이라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무리하게 중종의 능을 봉은사 옆으로 옮겼지만, 결국에는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곳에 묻히고 말았다.
조성 상황
『태릉지(泰陵志)』에 따르면, 태릉은 양주 남쪽 노원면 대방동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었다. 봉분 뒤 삼면에 곡장을 둘렀으며, 봉분에는 12면 병풍석을 두고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은 길이가 15자 4치에 폭이 10자 2치이며, 높이는 2자 5치였다. 이는 『세종실록』에 전하는 상석(象石) 크기인 길이 11자, 폭 6자 3치나, 『춘관통고(春官通考)』에 기재된 광릉(光陵)의 혼유석 규모인 길이 14자에 폭 9자보다 큰 것이었다. 장명등 역시 높이가 17자 5치로, 광릉의 13자보다 4자 5치나 높다.
그밖에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마석(馬石) 각 1쌍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2쌍 배치되었다. 특히 문인석과 무인석은 몸체가 사각형에 가깝고 육중하며, 체형이 둔중하면서 목이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이다. 생기는 없어 보이지만 크기에서 압도적이다. 봉분과 병풍석 사이에는 봉분의 흙을 지탱해 주는 만석(滿石)과 인석(引石)이라는 긴 석재가 깊숙이 박혀 끝부분만 돌출해 있는데, 돌출한 면에 십이지의 문자가 양각되어 있다. 석물의 크기뿐 아니라, 곡장으로 둘러싼 봉분 주변 면적도 다른 단릉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넓다. 이러한 태릉의 장대한 석물과 넓은 규모는 문정왕후가 누렸던 막강한 권력을 잘 보여 준다.
태릉은 그 곁에 명종의 능인 강릉이 조성되면서 한층 위상이 높아졌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승하하자, 모후의 능인 태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에 따라 태릉과 강릉은 하나의 능역으로 인식되었고, 후대의 왕들은 강릉을 참배하러 가서는 자연스럽게 태릉에도 절을 올리곤 하였다. 1574년(선조 7) 4월에 선조는 강릉에 직접 제사하러 가면서, 먼저 태릉에 들러 제사하고 뒤이어 강릉에 참배하였다.
변천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면서 사소한 보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능제에 변화가 생길 정도의 대대적인 수리는 없었다. 숙종 때는 정자각을 고쳐지었다[『숙종실록』 20년 윤5월 24일]. 건물이 낡고 오래된 까닭에 정자각 중건청을 두고 완전히 새롭게 지었다. 『일성록』 1694년(숙종 20)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기존의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에 퇴가 반 칸씩 있고 배위청이 2칸 반이었다.
그런데 중건청에서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의 전례를 들어, 좌우의 퇴는 불필요하므로 철거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에 따라 새 정자각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 반의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좌우 퇴를 없애는 대신 좌우 벽에 풍판을 달아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았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오늘날 전하는 것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의 평범한 모습으로 199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1723년(경종 3)에는 태릉을 봉심하고 온 관리가, 병풍석에 기울어지거나 깨진 곳이 있고 틈이 많이 벌어져 있으므로 차제에 철거할 것을 청하였다. 신하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리자 왕은 더 논의해 보라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고종 때는 봉분 위 만석이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어서 한 차례 크게 손을 보았다.
관련 사항
태릉은 1970년에 강릉과 더불어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966년에 태릉 내에 국가가 운영하는 선수촌이 건립되어 이미 왕릉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한 뒤였다. 최근에 들어와서 조선 왕릉의 문화적 가치가 재인식되면서, 선수촌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태릉을 왕릉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춘관통고(春官通考)』
『태능지(泰陵志)』
헌릉(獻陵)
정의
조선 태종과 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능.
개설
헌릉은 경기도광주군에 위치한 대모산(大母山)에 조성되었으며,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헌릉은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승하했을 때 처음 조성되었고,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여 이곳에 안장되면서 쌍릉이 되었다.
조성 경위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세종은 당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했는데,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을 조성한 박자청(朴子靑)이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참여했다[『세종실록』 2년 7월 10일]. 이때 상왕이었던 태종은 4도감 12색을 설치하여 국장을 진행하던 방식을 바꾸어 3도감인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만 설치하고 나머지 업무는 각 사(司)에서 담당하도록 했다[『세종실록』 2년 7월 19일].
이후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사망한 당일에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이번에도 박자청은 산릉도감 제조가 되었고, 산릉을 조성할 인부는 수군 1,000명, 도성 내에서 1,000명, 가까운 도에서 2,000명을 동원하고 수레를 끄는 소 수백 마리를 사용하여 인력을 대신하게 했다[『세종실록』 4년 7월 12일].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 봉분이 따로 조성되어 있는 쌍릉 형식인데, 난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봉분 주변으로 석양, 석호, 곡장을 둘렀다. 능 앞의 석물들은 고려의 현릉과 정릉의 형식을 본떠 조성하였으며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쌍씩 배치하였다.
조성 상황
『세종실록』에는 헌릉의 조성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석실의 규모와 구조, 석실에서 봉분에 이르기까지 왕릉을 조성하는 모든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세종실록』 2년 9월 16일][『세종실록』 4년 9월 6일]. 이를 정종의 후릉(厚陵)과 비교해 보면, 가치개석(加置蓋石)의 크기와 방석(旁石)의 개수만 다를 뿐 그 규모와 형태는 동일하다.
석실은 먼저 터를 정하고, 그 위에 금정기(金井機)를 설치하여 광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다음 광중 위에 능상각(陵上閣)이라는 가설물을 설치하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였다. 광중의 깊이는 10척이며, 석실은 너비가 8척, 길이가 11척, 높이가 7척이다. 석실은 동쪽과 서쪽 벽면의 양방석(兩傍石)과 북쪽 벽면의 북우석(北隅石), 천장 역할을 하는 개석(蓋石), 개석 위에 놓는 가치개석 등으로 이루어지며, 문입석(門立石), 문역석(門閾石), 문비석(門扉石), 문의석(門倚石) 등은 입구에 위치한다. 또한 부재가 접하는 곳은 모두 유회(油灰)로 메우고, 석실 외부는 잡석과 흙을 채워 조성한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헌릉은 능 아래 135보 거리에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을 중심으로 오른쪽 40보 지점에 수라청(水刺廳), 왼쪽 38보 지점에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신도비는 정자각 동쪽 80보, 홍살문은 동쪽 135보 거리에, 망료위(望燎位)는 뒤쪽 55보 거리에 각각 위치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살펴보면 헌릉에 대해 말하면서 ‘연지(蓮池)’라는 제목은 두었으나, 구체적인 서술은 하지 않았다.
한편 『헌릉지(獻陵誌)』에 따르면, 헌릉은 광주부 서남쪽 20리 지점에 있었다. 대모산이 주산이며, 동쪽으로 세천(洗川)까지는 1리, 서쪽 신원(新院)까지는 2리, 남쪽 달의천(達義川)까지는 5리, 북쪽 한성까지는 35리 거리였다.
변천
정자각은 1422년(세종 4) 9월에 축조하며, 1494년(성종 25) 6월에 수리하였고, 1664년(현종 5) 7월에 다시 중건되었다. 최근 1973년 헌인릉(獻仁陵) 재실을 보수하였으며, 1988년 정자각을 보수하는 등 헌릉의 개보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관련 사항
『세종실록』에는 조선초기 왕릉을 조영하면서 석실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석실에서부터 봉분에 이르기까지의 조성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2년 9월 16일]][『세종실록』 4년 9월 6일]]. 이 두 기록에 따르면, 광중의 깊이는 10척이며 각 부재의 맞춤과 이음 또는 결구를 통해서 상부나 측면의 토압, 행력으로부터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식 등이 나타나 있다.
또한 능상의 병풍석은 지대석(地臺石)에 복련(覆蓮)을 새겨 설치하고 지대석 위에 열두 방위를 따라 지면석(地面石) 12개를 설치한다. 그 위에 우석(隅石)과 만석(滿石), 인석(引石)을 각각 12개씩 차례로 쌓아 올린다. 병풍석 주변에 있는 난간석은 지대배석(地臺排石)을 놓고, 그 위에 우석과 석주(石柱), 동자주석(童子柱石) 등을 설치한다. 이러한 조성 방법은 제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후릉을 비롯해,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등에도 사용되었다. 특히 두 왕릉은 석물과 일부 부재의 개수만 다를 뿐, 석실의 규모와 형태, 난간석 등이 모두 동일하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능원지(陵園誌)』
『춘관통고(春官通考)』
『헌릉지(獻陵誌)』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문화재관리국, 『헌릉(원경왕후능)해체실측보고서』, 1989.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현릉(顯陵)
정의
조선 문종과 비 현덕왕후의 능.
개설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권씨(權氏)의 능으로, 왕릉과 왕후릉이 한 묘역 안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되었다. 서쪽이 문종의 능이고, 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두 능은 처음부터 한 묘역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소릉(昭陵)’이라 불리던 현덕왕후의 능을 1513년(중종 8)에 현릉 곁으로 천릉함에 따라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성 경위
현덕왕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의 딸이자, 단종의 어머니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세종 23) 문종보다 11년 먼저 승하하였고, 안산의 소릉(昭陵)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 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그 뒤 약 10년이 지난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승하하자, 묘호는 ‘문종’, 능호는 ‘현릉’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옆으로 산릉 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물이 솟아나, 건원릉(健元陵)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능을 조성하였다.
조성 상황
문종의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나, 현덕왕후의 능침에는 난간석만 두었다. 문종의 능은 『세종실록』「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석실 현궁으로 조성된 왕릉이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병풍석의 높이는 5척 5촌이었으며, 난간석은 12칸으로 난간 석주의 높이는 8척 2촌이었다. 또 장명등은 높이 12척에 둘레가 12척이었다.
능침 영역은 고려말기에 조성된 공민왕릉(恭愍王陵)과 마찬가지로, 상계(上階), 중계(中階), 하계(下階)의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공민왕릉 상계의 동서 길이는 40m이며, 북곡장의 길이는 41.4m로 상계의 동서 길이보다 길다. 중계의 길이는 5.7m이며, 너비는 상계보다 더 넓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치수는 알 수 없다. 또한 중계에는 장명등 2개와 문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좌·우·중앙에 각각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무인석이 놓여 있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현릉은 문종이 안치되어 있는 능역과 현덕왕후가 안치된 능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문종이 안치된 능으로부터 아래 80보 지점이자 현덕왕후의 능으로부터 아래로 105보 지점에 정자각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서쪽 10보 거리에 수라청 2칸이 있으며, 동쪽 26보 지점에 수복방 3칸이 있었다. 또한 정자각 동쪽 33보 지점에는 길이 7척 5촌, 너비 2척, 두께 1척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다. 망료위는 정자각 북쪽 33보 거리에, 홍살문은 남쪽 113보 거리에 설치되었으며, 능역 내에 재실 36칸도 건립되어 있었다.
한편 『춘관통고』에 따르면 재실은 4칸 규모였으며, 그 동쪽에는 건원릉과 함께 사용하는 전사청 12칸이 있었다. 전사청 뒤에는 제기고가 있었고, 안향청은 8칸 규모였다. 또 홍살문은 정자각 남쪽으로 100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능원지』와 약간 차이가 있다. 연지는 따로 없으며 동구릉 외영역에 외연지가 있고, 현종의 능인 숭릉(崇陵) 앞에 연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41년(세종 23)에 현덕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안산에 묘를 조성하여 안장하였다.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함에 따라, 현덕빈(顯德嬪)으로 불리던 현덕왕후는 왕후로 추존되었고, 그 묘는 소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런데 세조 연간에 단종(端宗)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이 본래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아들 죽인 것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 능을 파서 물가로 이장(移葬)하였다.
이후 1512년(중종 7)에 대사헌남곤, 대사간조원기 등이 소릉과 현릉의 제사를 함께 지낼 것을 진언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소릉의 천장이 논의되었고, 결국 문종의 현릉과 가까운 곳을 택하여 천장하였다. 그 뒤 소릉이라는 능호를 버리고 문종의 능과 합하여 현릉이라고 하였다.
현릉은 오늘날 동구릉의 하나로, 건원릉의 동쪽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능은 동구릉 좌측 아래에 문종의 능침이 있고, 반대쪽에 현덕왕후의 능침이 위치해 있다. 문종 능침의 좌향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현덕왕후의 능침은 동북쪽에서 남서쪽 향하는 인좌신향(寅坐申向)이다.
참고문헌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능원지(陵園誌)』
『선원보감(璿源寶鑑)』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
『주자가례(朱子家禮)』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춘관통고(春官通考)』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혜릉(惠陵)
정의
조선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심씨(沈氏)의 능.
개설
동구릉의 하나로, 숭릉(崇陵) 왼쪽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다. 단의왕후는 1696년(숙종 22) 11세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 경종이 등극하기 전인 1718년(숙종 44) 2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3월 8일에 시호를 ‘단의’라 하였는데, 그에 따라 묘소도 단의빈묘로 조성되었다. 그 뒤 1720년(경종 즉위)에 경종이 즉위하여 단의왕후로 추봉하고 능호를 혜릉이라 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6월 15일].
조성 경위
1718년(숙종 44) 2월 7일에 세자빈이 승하하자, 이튿날 빈궁도감(殯宮都監)·예장도감(禮葬都監)·원소도감(園所都監) 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645년(인조 23)에 있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국상을 전례로 삼아 원(園)의 제도로 하지 않고, 모두 ‘묘(墓)’ 자로 수정함에 따라 원소도감은 묘소도감(墓所都監)으로 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수원관(守園官)과 시원관(侍園官)도 수묘관(守墓官)과 시묘관(侍墓官)으로 바뀌었다.
세자빈의 국휼에 대한 전례를 찾기 어려워 1441년(세종 23)에 있었던 문종의 비 세자빈 권씨의 국휼을 상고하기도 했으나, 내상(內喪)에 대한 등록을 첨가하여 상제(喪制)를 결정하였다.
묘소의 간심은 선왕들의 능 주변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경릉(敬陵) 내 명릉(明陵)과 익릉(翼陵) 사이에 있는 언덕과 순릉(順陵)의 좌측 계좌, 자좌 언덕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결국 양주에 위치한 숭릉의 청룡 밖으로 결정하였다. 묘(墓)의 제도는 능상 석물은 소현묘(昭顯墓)를 따르되, 양석(羊石)·마석(馬石)·석인(石人)·혼유석 등의 규격은 모두 명릉의 체제를 따랐다.
조성 상황
혜릉은 숭릉의 왼쪽에 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능침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12칸으로 둘렀으며, 주변에는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밖을 향하도록 둥글게 배치하였다. 봉분의 남쪽에 혼유석을 놓았고, 장명등 1개와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다. 그 앞에는 문무인석(文武人石) 각 1쌍과 마석(馬石) 2쌍을 배치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는데, 1995년에 중건하였다. 현재는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의 정자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북쪽에는 비각이 있고, 동쪽에는 홍살문이 있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는 수복방이 위치해 있다.
관련 사항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흉례」에 실린 국휼의 복제 가운데 빈궁의 상에 대한 규정은 모두 1718년에 단의빈의 상례를 행하면서 정한 의례를 기준으로 하였다.
혜릉은 원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호였다. 1632년(인조 10) 6월 28일에 인목왕후가 승하하자, 7월 7일에 능호를 혜릉이라 하고 전호를 효사(孝思)라 하였다. 인목왕후의 능침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동원이강으로 조성된 목릉(穆陵)에 언덕을 달리하여 합부되는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언덕이 다른데도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을 모두 광릉(光陵)이라 부르는 전례에 따라, 정자각을 합하여 설치하고 인목왕후의 능호 또한 목릉으로 바꾸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0년 8월 14일].
참고문헌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단의빈상장등록(端懿嬪喪葬謄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혼궁(魂宮)
정의
왕세자나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의 장례를 마친 뒤 신주를 모셔 두고 삼년상을 치른 곳.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의 상(喪)을 ‘국휼(國恤)’이라 하여 나라 전체의 상례로 행하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격식을 달리했는데, 왕과 왕비의 상은 대상(大喪), 왕세자와 세자빈의 상은 소상(小喪)이라 하였다. 또 왕비와 세자빈의 상은 각각 내상(內喪)과 소내상(小內喪)으로 따로 구분하였다. 혼궁은 왕세자와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의 국상에서, 시신을 묘소에 안치한 뒤 3년여 간 신주를 모시는 곳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나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이 세상을 떠난 경우, 다시 말해 소상일 때는 빈소를 빈궁(殯宮)이라 하고, 시신을 안치하는 곳은 묘(墓)라 하고, 삼년상 기간 동안 신주를 모시는 곳은 혼궁이라고 불렀다. 소상에는 시호와 묘호 그리고 상례를 마친 후 신주를 모실 사당의 묘호(廟號)를 정할 뿐, 혼궁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 따라서 여러 혼궁의 사례를 나열할 때에는 시호를 붙여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효장세자혼궁(孝章世子魂宮), 의소혼궁(懿昭魂宮), 효순혼궁(孝純魂宮) 등으로 시호를 붙여 불렀다. 대행왕과 대행왕후의 시호를 함부로 부를 수 없기에 전호(殿號)를 지어 올려 각각의 혼전명을 갖추고 시호를 부를 것을 삼간 것과 비교된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경우는 시호만 정하고 묘소를 순회묘(順懷墓)라 하고, 혼궁과 사당 모두를 순회궁(順懷宮)이라 불렀던 사례도 있다.
혼궁은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설행하는 공간인 혼전(魂殿)보다는 위계가 한 단계 낮게 조성되었다. 혼궁의 중심 공간인 정전은 대개 경덕궁의 경선당(敬善堂), 창경궁의 옛 내반원, 강서원, 통화전 등이 선정되어 신주를 봉안하고 제례를 행하였다. 혼전이 주로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경덕궁의 자정전 등 궁궐의 편전(便殿)에 해당하는 전각에 마련된 것과 비교해 보면, 규모가 작고 격이 낮은 건물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전의 형태는 어칸 남쪽에 ‘정(丁)’ 자 모양으로 중배설청을 3칸 조성한 까닭에 정자각(丁字閣)과 유사하다. 정전 서북쪽에는 내중배설청을 두었으며, 동행각 혹은 서행각에 이안청을 3칸 규모로 마련하였다. 정전의 북쪽에는 방전(方甎)을 깔고 망료위(望燎位)를 설치하였다. 정전으로 들어서는 행각은 이중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삼문의 형태를 갖추었다. 삼문 밖에는 안향청·전사청·재실 등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들이 마련되었다.
『동궐도(東闕圖)』를 살펴보면, 그림에 묘사된 통화전은 혼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화전 정전 어칸에 연결하여 3칸 규모의 중배설청이 ‘정(丁)’ 자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중배설청이 7칸으로 조성되어 있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전의 경우 중배설청 7칸 외에도 내삼문 밖으로 이어지는 외중배설청과 외삼문 밖의 제물 출입 행각 등으로 긴 행각이 이어진다. 이에 비해 혼궁은 정전에 맞대어 조성된 3칸의 중배설청이 내삼문에도 이르지 못한다. 『동궐도』는 이처럼 조선후기의 혼전 및 혼궁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전의 내부에는 간소한 가구를 배치하였다. 혼궁의 중심에는 모란이 그려진 장지로 삼면이 이루어진 당가(唐家)를 두었다. 당가 하부의 어탑(御榻)은 당주홍(唐朱紅)이 칠해진 것을 사용했으며, 어탑 위에 놓는 신좌교의(神座交倚)와 신탑(身榻), 방교의 등은 모두 흑진칠(黑眞漆)이 된 것을 썼다. 정전과 중배설청 등에 배치하는 제상(祭床)과 정전 문밖에 놓는 아가상(阿架床)도 마찬가지로 흑진칠이 된 것을 사용하였다. 어탑의 동쪽에는 도장을 놓는 인장을 배치하고, 서쪽에는 책장을 두었다. 그 아래로 서쪽에는 청개(靑蓋) 한 쌍을 놓았고, 동쪽에는 작선(雀扇) 한 쌍을 배치하였다.
여기에 비해 혼전의 경우, 당가에 오봉(五峰)이 그려진 장지를 배치하였다. 신좌교의와 신탑 및 방교의 등에는 왜주홍(倭朱紅)을 칠하였다. 또 인장 대신 왕의 어보(御寶)를 놓는 보장(寶藏)을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동궐도(東闕圖)』
『[순조]빈전혼전도감의궤([純祖]殯殿魂殿都監儀軌)』
『헌경혜빈빈궁혼궁도감의궤(獻敬惠嬪殯宮魂宮都監儀軌)』
『[효명세자]빈궁혼궁도감의궤([孝明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제19권 3호, 2010.
윤정, 「조선시대 혼전운영에 대한 기초적 정리」, 『규장각』제28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