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일상의 지계바라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야 되겠는가
삼취정계에서의 율의계律儀戒란 보살 수행을 닦는 이는 지키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저절로
계에 어긋나는 행위는 모두 떨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업을 만들
정도의 욕심과 집착을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흔히 생각하는 살생과 도둑질, 음행을
저지르지 말라는 지계持戒와는 크게 구별됩니다. 이제는 지계와 지계바라밀의 크나큰
차이를 아시겠지요?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권승들의 파계 행위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게다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 만연한 상황입니다. 승단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가는 한국불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신심 있는
불자들의 정당한 자정自淨 요구를 승가에 대한 간섭과 도전으로 맞서왔습니다. 급기야
권승들의 타락을 고발하는 공중파 방송으로 국민적 공분公憤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니
그들과 같은 먹물 옷을 입고 같은 조계종단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십지품」에서 설하듯 선법을 실천해 중생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 해야 하는 수행자의
기본 정신을 망각한 과보로 이끌어 주어야 할 불자들에게 오히려 선법을 배워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승단의 정화를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의 고행을
택하신 설조 스님과 신행단체의 정법을 향한 자정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나마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제대로 고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앞의 보시바라밀에 이어 참으로 껄끄럽고 민망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책망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제가 꺼내기도 부끄러운 말을 자꾸 언급하는 것은 보살의 초지와 2지 수행의 핵심인
보시와 지계바라밀을 제대로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또한 이러한 내용을 불자들에게
강조하는 승가의 행태와 수준이 얼마나 한심한지 불자들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도들이 앞장서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교에는 그러한
전통이 있기에 화엄경 본문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반성하고 개선해 나가기 위한 의도인
만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실에서의 삼취정계, 인공지능의 윤리도 정해야
「십지품」에서 설하는 계戒의 의미가 ‘스님들은 고기가 들어간 자장면을 먹어도 될까?’라는
수준으로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을 겁니다. 삼취정계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윤리와 도덕, 가치의 존중과 배려, 곧 최소한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하는
덕목으로 이해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윤리도 변하고 삶의
가치도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기에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모든 것은 무상하다, 덧없다는 가르침을 앞세우는 것이 새삼 실감이 됩니다. 저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경전에 입각한 불교 교리의 깊이 있는 해석의 부재, 신도들을 이끄는
‘방편’의 문제에 대해 세존사이트와 몇 권의 저서 등을 통해 꾸준히 지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조하는 분들이 별로 없어서 구체적으로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게다가 선사에게 화두를 직접 받고 공부했다는 걸 앞세우며 아는 체하고
아만으로 무장한 불자들을 보면 한숨마저 나옵니다. 아만은 참된 불자의 보살행과는 3만 8천
리 떨어진 그릇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지품」에 걸맞는 큰 길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십지품」에서 설하는 지계는
삼취정계이고, 이 가운데 섭선법계攝善法戒 즉, 선법을 성취하는 보살의 수행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선법은 인간 최고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실현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윤리와 도덕은 살펴볼수록 가변성可變性이 내재되어 있어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해야 할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출가자는 당연히 불교에서
성립된 계율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율장의 250계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드려도 단박에 이해하실 겁니다.
• 두 신도의 돈을 합쳐서 한 벌의 좋은 옷을 지으라고 권하지말라.
• 6년이 못 되어 새 옷을 만들지 말라.
• 자기의 깨친 것을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 말라.
• 여인과 약속하고 동행하지 말라.
• 보름이 못 되어 목욕하지 말라.
• 다른 비구를 걱정시키지 말라.
2,000여 년 전 필요에 따라 제정된 계율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적절치 않은 점도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전 아난의 물음에 소소한 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지금 이계율을 들먹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계율을 실천함에
있어서, 개차법이라 하여, 때로는 열기도 하고 막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홀가분한 융통성은 불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유일신 종교인 경우는 상황이 크게
달라집니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낙태의 문제는 고전적인 경우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유일신교의 배타적 종교 윤리는 세계 갈등의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서구에서는 무슬림의 여성 차별에 대해 인권차원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유일신교가 아님에도 인도의 힌두교는 거의 3000년 전 시작된 사성제도에서 말미암은 계급
차별이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불교는 일상을 구속하는 강제적 윤리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불교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지를 가장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극대화해서
보살 수행의 도덕적 원천과 목적으로 삼는 불교는 세계의 어느 종교, 철학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입니다.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혼란과 갈등의 요소들에 직면해있습니다.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문제처럼 불가항력적인 요인들이 내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더 많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4차
산업혁명의 총아인 인공지능(AI)의 윤리성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지식의
총량을 넘어서는 특이점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국제기구에서 인공지능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의 반인류적 사고와 행동을
제어하는 장치를 제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공지능은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을
공격할 수 없다’는 식의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의 윤리와 도덕규범을 정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개인의 인권은 물론 그 정신적 취향과 사고思考 등 정체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일방적으로 발전시키면 언젠가는 1인 1윤리를 실현하자는 운동으로까지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저 혼자만의 논리적 비약일는지는 몰라도 인간이 ‘본인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무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련의 ‘개인 마음대로주의’의 확장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와 연관되는 내용, 현실에서 이미 노출된 문제들을 다음
인욕바라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