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13. 10. 29
장소 : 충남 예산군 덕사면 시량리
주관 : 충남대학교 동서문명연구소
강사 :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
윤봉길은 1908년 6월생이다.1921년 서당인 오치서숙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고, 15세 배용순과 혼인하여 아들 종과 담을 두었다. 그는 오치서숙을 수료한 직후인 1926년 가을 문명퇴치를 위하여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그는 야학운동을 하면서 교재로 (농민독본: 전3권)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자주정신을 강조하였고, 평등한 사회 건설을 이룰 것을 염원하였다. 27년 3월에는 목계농민회를 조직하고 농민의 경제 자립을 위한 부흥운동을 펼쳤다. 또한 1928년 2월에는 목계농민회 "부흥원"의 상량식을 가졌다.목계농민회에서는 생활필수품을 직접 공장에서 싸게 사서 공급하고 , 수확한 농산물을 공동으로 판매하고자 하였다. 고구마의 재배법을 개선하고 양잠 및 부업을 권장하여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켰다. 또한 당시 돈이 없어 돼지를 살 수 없는 농민에게 돼지를 살 수 없는 농민에게 돼지를 사주고 기르게 하여 새끼를 낳으면 그 절반은 기른 농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또 다시 다른 농민에게 한 마리씩 주는 수내제도를 실시하여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1929년 2월에는 위친계를 조직하여 길융사에 도움을 주었다. 1929년 2월에는 야학에서 이솦 우화를 각색한 "토끼와 여우"라는 학예회를 개최하였다가 순사의 경고와 훈계를 받았다. 1929년 4월 부흥원에서 월진회를 조직하여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벌리고, 애국사상을 고취, 공동경작과 공공식수를 통한 농촌경제향상을, 위생보건사업과 청소년의 체력단련을 통한 체력 향상 등을 제시하였다.
그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 이란 글을 남겨놓고 가출하여 상해 행에 올랐다. 중국에서 어려운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1932년 1월 김구를 만나게 되어 4월 29일 의거를 감행할 뜻을 밝혔다. 윤봉길은 4월 27일에는 안공근의 집에서 양복을 입고 가슴에 선언문을 펴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보자기에 싼 도시락과 수통을 메고 손에는 일장기를 들고 홍구공원에 입장하였다. 축하식이 거의 끝날 때 단상의 일본 수뇌부를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단상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하여 7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12월 19일 교외에 있는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하였다.
관현당 : 윤봉길 의사가 4세 때까지 성장했던 곳이다.
저한당 : 윤봉길 의사가 4세 때부터 1930년 중국 망명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저한이란 "한국을 건져 내는 집, 한국이 어려울 때 붙들어 맨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부흥원 :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광현당(光顯堂)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사적 229호)
부흥원(復興院)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사적 229호)
저한당(狙韓堂) : 충남 예산군 덕사면 시량리(사적 229호)
첫댓글 지나치면서 못봤던 부분도 다 담아주셨네요^^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