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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에 요절한 가수
☞ 1970년 여름, 가정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한 나는 부모님을 도와서 부지런히 고추와 담배농사일을 하던 시기였다.
하루 종일 들에서 일을 해야 하는 관계로 하루해가 정말 길었다.
그래서 소형라디오를 하나 구입해서 들에 나갈 때마다 항상 함께 했었다.
그 시절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노래 중에서 ‘배호’가 부른 노래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 중에서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낀 장충단 공원’은 묘한 느낌을 주는 노래였다.
그래서 인기가요에 배경이 된 명소를 서울에 간 김에 직접 찾아보았다.
노래의 장소를 직접 찾은 것이 가수 ‘배호’를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 배호는?
본명은 배만금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1남 1녀 중 4대 독자인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후 서울에서 살다가 195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산으로 내려가서 이모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생활하면서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를 수료했다.
1956년 8월에는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상경을 하였다.
그리고 외삼촌인 김광빈에게서 드럼을 배웠다.
이후 1963년에 김광빈 악단 및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즈음 예명을 [배호]로 하고, 김광빈이 작곡하고 편곡한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영화 ‘황금의 눈’의 주제가로 발표한 ‘황금의 눈’이 처음으로 가요 차트에 진입해 대중에게 존재를 알렸다.
1965년에 발표한 ‘두메산골’의 실패이후, 가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배호와 그 악단]이라는 12인조 악단의 마스터 겸 드러머로 밤무대에서 연주활동을 하던 그에게 우연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든다.
그 무렵 친구들과 함께 먹은 돼지불고기로 식중독을 앓게 되는데, 대장균이 신장으로 침범하면서 ‘급성 신장염’을 얻는다.
그리고 이것은 만성으로 발전하면서 그의 운명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오늘날에도 막대한 병원비를 소진해야하는 난치병에 속하는 것이 신장염이고 보면 당시의 의학으로는 거의 불치병에 가까웠다.
비운의 시작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계기에서 시작 되었던 셈이다.
라디오에서는 초기 3곡 ‘두메산골’과 ‘황금의 눈’ 그리고 ‘누가 울어’가 가끔 방송을 타긴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무대에 혼자 서기가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악화 되어 있었다.
더 나빴던 것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라 퉁퉁 부은 몸으로 계속해서 업소 출연을 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병원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그에게 무리한 활동은 병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약에 의지하며 하루하루 버텨가던 어느 날, 그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되고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청량리 위생병원 뒤 단칸 골방에서 외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 병상에서 취입한 노래 : ‘돌아가는 삼각지’
투병생활 중에 작곡가 배상태를 만나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했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가 울고가는 삼각지
♩♪♬ ~ ♩♪♬ ~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도는 이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 하며
눈물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가 울고가는 삼각지
♩♪♬ ~ ♩♪♬ ~
특색 있는 음색과 호소력이 돋보이는 이 노래는 전국 인기 차트를 휩쓸면서 정상의 인기가수로 굳건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지금도 전설인 그의 창법은 당시 일반적인 트로트 가수들과 달랐다.
전통 팝 음악에서 나오는 중후한 저음을 배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강조하고 절정부에서 애절한 고음을 구사하는 방식이었다.
가창력 뿐 아니라 그의 '힙'한 스타일도 선풍적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세련된 슈트를 차려 입고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금테안경을 썼다.
그가 출연하는 무대에는 언제나 구름 같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방송사 가수상은 모두 휩쓸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1966년 11월경 신장병이 극도로 심해진 배호는 서 있을 수도 없는 몸이라서 의자에 앉은 채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한다.
작곡자 배상태씨의 회고에 의하면 1963년 작곡 당시 삼각지 로타리는 지금과는 엄청 많이 달랐다고 한다.
집이 노량진인 그는 전차를 타고 매일 삼각지를 지나다녔는데 ‘삼각지’라는 지명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바라본 삼각지의 풍경을 보고 우수에 사로잡혀 ‘돌아가는 삼각지’를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삼각지 일대는 온통 허름한 선술집 일색이었다.
회심의 역작이라고 생각한 무명의 작곡가 배상태씨는 당시 인기절정의 신인 가수였던 ‘남진’과 ‘남일해’ 그리고 ‘금호동’등 몇몇 가수에게 섭외를 했으나
“곡이 촌스럽다!”
“바쁘다!”
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다.
남 진 같은 경우는 소속사인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이런 촌스러운 노래를 불렀다가는 한창 인기 상승의 남진에게 악영향을 준다!”
며 거절했고, 무려 7명의 기성 가수에게 딱지를 맞는다.
배상태씨는 결국 유명 가수 취입을 단념하고 고심하던 중, 우연히 음반을 통해서 ‘두메산골’, ‘굿바이’, ‘누가 울어’ 등 배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배상태의 회고에 의하면 ‘배 호’의 노래자체는 별로였으나 목소리에 그야말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자신의 노래를 배호에게 취입시키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1966년 8월 배상태는 악보를 들고 배호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그러나 간신히 찾아낸 배호는, 단칸방에 칩거하며 병마에 신음하고 있었다.
병세는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었고, 도저히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 번만 불러 보자!”
라고 간청을 하며 배호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결국 배호는
“그럼 악보나 한번 보자!”
라고 말하면서 받아든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건강을 염려하여 적극 만류하는 어머니를 설득해서 취입하기로 결정을 내린 배호, 이윽고 병실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소형 녹음기와 작곡가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연습을 하였다.
[배상태의 증언]
“취입 승낙을 받았으나 병세가 심해 거동은 물론 노래하는데 가장 중요한 호흡조차 어려워서 과연 취입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배 호 본인의 증언]
“도저히 취입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날 아침에는 각오를 하고 간신히 연습 녹음을 했어요.
숨이 굉장히 찼어요.
한번 일어섰다 앉고 일어섰다 앉고…….
딱 한번 제대로 부르고 집으로 갔어요.
그런 곡이…….
발표되지 않을 거라 생각 했습니다.”
배호는 본인의 증언대로,
첫 소절 ‘삼각지 로타리에’를 한 번에 부르지 못할 정도로 숨이 가빴다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어가며, 의자에 앉아서 녹음을 했다.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서 탄생한 '돌아가는 삼각지'는 지병과 가난에 신음하던 스물네살짜리 무명가수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1967년 2월에 발매된 이 노래는 4개월 정도 별다른 반응이 없어 관련인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당시는 남진의 ‘울려고 내가왔나’가 큰 히트를 치고 있는 중이어서, 배호의 노래는 남진의 위세에 밀렸던 것이리라.
기존의 대중가요에서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배호의 개성적이며 선이 굵은 저음과 담백하면서도 애절한 호소력은, 6월이 되면서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먹히기 시작한다.
사실, 배호의 깊은 저음은 병으로 인해 음색이 변성되기 시작한 이후의 목소리라 한다.
병을 얻기 전 그의 목소리는 맑고 높은 옐로보이스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쨌거나 ‘돌아가는 삼각지’는 대구, 부산, 광주 등 지방 대도시를 시발로 서울로 상륙한 뒤 그야말로 태풍같이 대한민국을 뒤 흔드는 폭발력을 내보이며 그 해 KBS 가요프로인 ‘전국가요 릴레이’에서 20주 연속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대중음악에 입문한지 9년여 만에 마침내 배호라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인데 한국 가요사에서 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66년 최희준의 "하숙생"에 이은 세 번째의 대박이었다고 한다.
노래는 대박을 쳤지만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노래를 취입한 후 입원치료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토록 기다려온 자신의 성공을 병상에서 듣게 되었다.
노래가 히트하자 ‘아세아레코드사’에서는 그의 장래성과 대중성을 간파하고 배상태씨를 통해 입원비 전액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속가수 제의를 해 온다.
드디어 그는 컴컴한 골방에서 화단이 있는 전세 집으로 집을 옮겼고 정상적인 치료를 받게 되는데 그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길어야 삼-사년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가혹하게도 운명의 신은 성공과 사형선고를 함께 베푼 셈이라 하겠다.
모진 병과 싸우며 호흡마저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배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울어',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 '0시의 이별' 등이 모두 병상에서 부른 노래들이다.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는 직접 무대에도 섰다.
음악평론가‘임진모’는 당시 배호와 인연이 깊었던 사람의 기억을 인용해 그를 회상하는 글을 썼다.
다른 가수와 그토록 잘 어울렸던 사람이 이 무렵에는 하루가 다르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대기실에서도 드러누워 있는 적이 많았다.
그러다가 1970년 광주공연에서는 급기야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10대 가수’ 모두가 무대에 등장했지만 배호는 분장실에 누운 채
“노래를 못 하겠어요”
라고 했다.
사회자가 무대로 나와서
“배호 씨가 너무 아파서 출연이 곤란합니다.”
고 객석의 양해를 구했다.
배호의 인기가 절정인 상태였고 출연 펑크가 빈번했던 시절인지라 관객들도 양보를 하지 않았고
“우린 배호를 보러왔다! 안 나오면 입장료 물어내라!”
며 막무가내였다.
객석의 상황을 전해들은 배호는
“그럼 나가야지요!”
하더니
“미안하지만 좀 부축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래서 배호는 내 등에 업힌 채, 이대성이 들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해야만 했다.
순간 나는 코끝이 찡했고 배호는 눈물을 흘리며 열창했다.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의 빅히트로 스타덤에 오르며 형편이 펴기 시작한 그는 집중적인 병원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몸이 좋아지면서 활발한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돌아가는 삼각지’가 대히트를 하자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기라성 같은 배우 ‘김희라’, ‘장동휘’, ‘문 희’가 주연을 맡았다.
♣ 가슴 아린 비련의 곡 : ‘안개낀 장충단 공원’
이 노래의 배경은 서울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공원’이다.
남산은 과거 목멱산·인경산·열경산·마뫼 등으로 불렸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풍수지리상 남쪽의 안산(案山)이라고 해서 남산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 산은 우리 역사 속에서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아 대중문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1967년 최치수가 노랫말을 짓고 배상태가 작곡한 이 노래에서도 그렇게 쓰였다.
노래를 부를 당시 배호는 25세, 요절하기 5년 전이었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 ~ ♩♪♬ ~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의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 ~ ♩♪♬ ~
노래 속 화자의 가슴은 시퍼런 멍으로 얼룩져 있다.
마른 잎이 서걱거리는 늦가을의 공원으로 고목에 새겨놓은 옛사랑의 이름을 찾아온 화자의 눈앞에는 사랑했던 연인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대중가요는 화자의 인생과 가수의 운명,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이념이자 감성이다.
이 노래를 부르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주인공이 된다.
까마득한 얼굴 하나가 아른아른 떠오르는 것이다.
1966년 을지로 6가를 우로 돌아 1킬로 남짓 가노라면 막다른 곳에 흐르는 물이 고인 연못이 있고 고목이 울창한 산골짜기가 나타난다.
바로 이곳이 장충단 공원이다.
소음과 공해와 오염된 공기에 시달리는 도시인들이 잠시의 여가를 훔쳐 이곳을 산책하면서 도시 속의 자연을 즐기는 곳이었다.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싶어 하는 연인들에게는 정다운 나무그늘을 제공하는 곳, 그래서 장충단 공원에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흔히 눈에 띄었다.
이 무렵 작곡가 배상태도 이곳을 즐겨 산책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는 흐르는 냇물과 앉기 좋은 바위,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이곳에서 곡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한 그의 눈에 문득 뜨인 것이 많은 사랑의 사연과 흔적들......,
바위며 나무에 남겨진 이름과 연월일, 사랑의 말들은 모두가 깊은 맹세를 담은 것들이었다.
또 아늑한 골짜기로 이루어진 장충단 공원은 이른 아침녘이면 짙은 안개가 끼기 일쑤였다.
그런 어느 날 새벽 공원의 안개 속을 거닐다가 짙은 안개의 장막 속에 남의 눈을 꺼리듯 나무그늘을 더듬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흔적은 곧 시상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비련이 명곡이 되었다.
가사가 말해주듯이 안개 자욱한 고요한 공원에서 잃어버린 사랑에 이제는 허사가 된 맹세의 말들을 어루만지면서 흐느끼는 영상을 그린 노래이다.
가사와 배호의 흐느끼듯 하는 저음의 창법이 어울려 완전히 비련의 이미지를 소화해 낸 보기 드문 히트작이 되었다.
이 곡이 크게 히트하자 1971년 남한 감독이 연출하여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장충단공원은 한양을 수비하던 군인들의 훈련소인 ‘남소영’이 있던 곳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을미사변)되고 나서 5년 후 고종은 이곳에 추모단을 건립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소실됐고, 지금은 장충단비가 남아 있다.
그런데 2019년에 직접 찾아본 그곳은 생각보다는 별로이다.
노래의 분위기가 훠~얼씬 좋았다.
‘아세아 레코드’사에 배호는 작곡가 배상태와 전속이 된 후 20여개가 넘는 레코드가 찍어내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이로 인해 음반 기획사로 시작했던 아세아레코드는 단단한 회사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는 소위 라이브공연을 시작했는데, 그의 공연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광란’이라고 한다.
자신의 히트곡을 똑같이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그때그때의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인 창법을 구사했다.
이런 방식은 음반으로만 줄곧 노래를 들어온 관객들을 압도해버렸고, 특히 여성 팬들에게 있어 그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남성적인 저음과 끈끈한 창법에서 품어내는 성적 매력,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무대매너가 그 카리스마를 받치는 뒷심이었다.
동료 여가수 [정훈희]의 증언
“당시에 여자가수들은 배호에게 미쳐있었다.”
동료가수 [최희준]의 증언
“그의 타고난 가창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후 연이은 히트곡과 최고의 음반판매량, 각방송사의 상을 휩쓸어버리는 기록들을 세우면서 그는 부와 명예를 손에 쥔다.
가수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5년간 〈비 내리는 명동거리〉·〈누가 울어〉·〈파도〉·〈울고 싶어〉·〈안녕〉·〈영시의 이별〉·〈조용한 이별〉·〈두메산골〉 등 300여 곡을 남겼는데, 〈영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간에 이별을 한다는 노랫말이 문제가 되어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레코드사에서는 그를 ‘달러박스’라고 했을 정도로 나오는 음반마다 엄청나게 팔려 나간다.
매니저의 표현을 빌면 돈다발을 머리에 배고 잤을 만큼, 돈을 꽤 많이 벌었던 가수에 속했다.
그러나 돈은 벌어들이는 족족 엄청난 병원비로 모두 없어져버렸고 이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무리한 공연과 취입을 강행함으로써 다시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입원과 퇴원, 요양과 활동재개를 되풀이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빠르게 재촉해 갔던 것이다.
배호가 가수로서 활동한 5년 동안 그럭저럭 건강했던 시절은 일 년 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공연도중 업혀나가기도 하고 각혈을 하고 쓰러지기도 했으며 휠체어에 앉은 채 노래를 부른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대기실에서는 누운 채 심한 기침을 해대며 늘어져 있었으나, 무대에 서면 기침이나 실수 한 번 없이 노래를 끝내는 강한 프로정신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 배호의 마지막 노래 : ‘마지막 잎새’
그가 용산 ‘성남극장’에 섰던 무렵엔 거의 사경을 헤맸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공연이기도 했던 이 무대에서 불렀던 곡은‘마지막 잎새’였다.
결국 이 노래는 이승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가 되고 말았다.
애절한 사연을 토해내는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 듯 낙엽지고
달 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 ~ ♩♪♬ ~
싸늘히 파고드는 가슴을 파고 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는 님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인데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 ~ ♩♪♬ ~
1971년 10월 20일에 이종환이 진행하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에 출연 후 귀가를 하다 비를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신장 이식수술의 초기 단계였던 당시, 그의 주치의는 신장수술을 시도하나 이미 그의 신장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최악의 상태였고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 채 그대로 봉합되어 버리고 만다.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요절가수 배호는 2003년에는 가수로서 최고영예인 문화훈장이 추서된다.
그리하여 71년 11월 7일, 한국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던 배호는 지병인 신장염으로 5년간 투병하다 숨을 거둔다.
이날 아침 등교를 하니 연예가 소식에 정통한 친구가 교실에 있던 친구들에게 이 뉴스를 전해준다.
당시 우리는 고등학생이었다.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 배호는 이날 아침 수업 시작 전 우리들의 입 담화를 뒤로 하고 그렇게 먼 길을 떠났다.
“‘마지막 잎새’를 불렀기 때문에 노래처럼 그렇게 되었다!”
고 하면서......,
29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의 탄생 비화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현곡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도는 길!
작사자 [정귀문]은 바람 한 점 없이 달빛만 싸늘한 1970년 늦은 가을밤 들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담장 길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걷던 29세의 문학청년은 흐느적대며 떨어지는 낙엽 한 장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학교 담장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담 너머로 가지를 길게 뻗어 늦가을이면 수많은 낙엽을 흩날렸다.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맴도는 ‘마지막 잎새’를 잡은 작사가 [정귀문]은 불현듯 소년기 때 이별한 여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은 낙엽이 곧 자신의 분신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여자 친구는 까까머리 소년 시절 한 살 아래의 현곡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딸이었다.
학교장 관사에서 생활했던 그녀와 친구로 지내든 정귀문은 첫사랑의 속앓이를 대단히 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소녀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옛날 달빛이 싸늘한 운동장에서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으며 함께 뛰어 놀았지만 막상 좋아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헤어진 그 소녀에 대한 심경을 문학청년 [정귀문]이 가다듬은 노랫말이 바로 '마지막 잎새'이다.
이 가사에 배상태가 작곡을 하고 배호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비’는 작사자의 고향인 경주시 현곡면에 세워지게 되었다.
작사가 [정귀문]은 생전에 이렇게 회고 했다.
'마지막 잎새'를 한이 맺히게 마지막으로 목메어 부르고 배호가 타계했다!
는 비보를 고향마을 경주 현곡면 하구리 자택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다가 접했다고 한다.
해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배호의 기일(11.7)이면 깊은 생각에 빠진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마지막 잎새'의 제목처럼 그의 마지막 노래가 되는 바람에 팬들로부터 배호를 살려내라는 항의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한다.
작사가 정귀문(1941~2020)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김연자의 ‘먼훗날’, 최안순의 ‘안개낀 터미널’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하였지만 늘 아마추어 정신으로 고향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향에 거주하며 1,000여 곡의 족적을 남긴 한국대중가요 작사가였다.
2003년 6월 22일에는 배호 팬클럽 회원들의 정성을 담은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비는 작사가 정귀문 선생의 고향이자 타계할 때까지의 거처이기도 한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 저수지 소공원에 건립되었다.
- 누군가에겐 읽을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댓글 노래한곡에도 얽힌 사연들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고 노래를 접하면 훨씬 더 그 노래에 애정이 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배호의 마지막 노래 '마지막 잎새'의 무대가 우리 고장에서 가까운 경주 현곡초등학교 운동장에 지금도 울창하게 버티고 있는 '플라타너스'나무였다니 더욱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배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가슴 아프네요.
노랫말 처럼 된다는 얘기가 아니드라도 그때의 상황이 그럴수 밖에 없음이 느껴 집니다.
가슴이 찡 합니다.
감사 합니다
더 좋은 노래를 더 많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